왕언니의 살아가는 이야기

제일 더운, 토요일의 일기.... ,택시운전사관람

왕언니 2017. 8. 10. 01:08


  


2017.8월5일 (토)



연일 기록을 갱신하는 폭염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어제밤엔  ,  37도가 될거라는,8월의 첫 토요일 일기예보를 듣고

정말 내일은  어디론가  피서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남편보다  유일하게 잘하는 짓? ,<인터넷으로 영화예매하기> 를 했다.


가뜩이나 기분도 우울한데

이 찜통더위에  잠깐씩 에어컨을 틀며 아까운 전기요금때문에 더 가슴을 태울바에야....

둘이서 8000원만 내면 OK인, 오리역  CGV에 가서 영화보기가 훨씬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일 더운 시간의 피서방법으로 12시45분에 시작하는 송강호주연의 ,< 택시운전사> .를 예매했다

나는 너무 앞자리에서 보는 영화가  눈에 부담스러워 ,언제나 가능하면 중간통로  이후의 뒷자리를 선호하는데

요즘 제일 인기있는 영화인데다, 방학이고,제일 더운 토요일이어선지,

7관에서 상영하는데도, 앞에서 6번째 줄 구석자리밖에 없는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 F1,2를 예매했다.


나는 송강호를 좋아한다.

변호인에서도  그랬듯이

미남도 아니면서 사람을 끄는 그의 매력은 ,뭐니 뭐니해도 자연스럽게 녹아있는,사람냄새나는  연기력때문이다.  


개봉이틀만에 300만을 돌파했다던가?

요즘 여기저기서 택시운전사에 대한 찬사도 들었고,  모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믿고 보는 그의 연기와  함께

무엇보다 ,1980년 5월18일 ,내가 현장에서 보았던 보았던 ?  그날의 광주 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궁금했고

과거에 만들어진 몇개의 광주항쟁이야기가 ,픽션이었기에 별로였지만

이번엔 ,원작이? 독일기자의 눈으로 본, 실제 겪은 ,넌픽션이었다기에 기대하는 바가 커서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픽션보다 넌픽션이 좋아지는것 같다.

늙으면,사건이나  사물을 보는 눈이 ,경험을 통해서 더 담담해지거나 ,더 엄격해지거나 둘중 하나다.

더 담담해지는건,살아보니 모든게 이해가 되고

아웅다웅 해봤자 그게 그거 더라는것...


더 엄격해지는건,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충 그려내는것이 손톱까스레기처럼 눈에 거슬려서다.

저게 아닌데...그게 아니었는데...하면서







택시운전사


더워서 그런지, 탄수화물이 빠진 ,두유와 과일 ,삶은 계란한개의 아침식사였는데도 별로 식욕이 없어

점심은 영화관람이 끝나고 오는길에 느즈막이 먹자하고 ,열두시가 되기전에 집을 나섰다.


오리역으로 가면서, 나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 자동차밖의 온도가 38도가 될수도 있다는 경이적인 사실을 경험했다.

우리나라가 점점 봄가을은 짧고 ,여름과 겨울만 있는 나라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구성역 근처,이마트트레이더스때문에 ,면허시험장 지나면서부터 길이 밀리기 시작했다.


필경, 피서의 절정인 8월첫 토요일에 떠나기 위해 ,그리고 다음주는 마트가 쉬는 의무휴무주일이기에

모두들  격렬하게^^ 피서용품을 사러가야하는 인파때문인것 같았다.

집에서20분정도면 충분한 거리인데도  30분이상 걸렸다.


극장은 소문대로,예상한대로 인파로 가득했다.

대부분 택시운전사를 보려는 사람들인것 같았다.

200명정도가 들어가는 상영관이 앞자리까지 거의 가득찼다.

근래에 이렇게 만석인 영화가 거의 없었는데...


영화는,

광주에서 벌어진 학생과 시민들에 대한 폭력진압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은 독일 ARD 소속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신군부에 의해 교통과 통신이 끊겨버린 광주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에서 만섭의 택시를 타고 광주로 잠입하는 과정과

학살의 현장으로 변해버린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탈출하는 과정을  뼈대로 하고 있다.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홀아비 개인택시 운전사 만섭은, 동료 택시기사의 집 지하에서  딸과 함께 월세 로  살고 있는데

undefined



월세는 10만원가량 밀리고 , 딸은 주인집 아들과의  싸움으로 얼굴에 상처가 나도 편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5월19일 때마침 ,기사식당에서,

어느기사가 외국인 기자를 태우고 그날안에 광주를 다녀오면 10만원을 받기로 했다는 자랑을 늘어놓는것을 듣게 된다.


undefined

광주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언론통제로 서울 사람들은 깜깜 무소식이던 시절,

택시 기본요금이 1000원이 안되던 시절이니 10만원은 거금이고,만섭은 당장에 월세가 10만원 밀려있는상황이라

그 기사 몰래 손님을 가로채서 광주로 가게 된다



undefined

사우디에 가서 일했던 경험으로 짧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위르겐 힌즈페터라는 독일기자 를 태우고 선불 5만원을 받고  광주로 가게 된 만섭은 ,

광주 가까이에 가면서 길을 막고 있는 군인들과 마주치고





undefined

페터는 기자의 신분을 숨기고 비즈니스로 광주에 먼저 와있는 상사를 만나러 간다고 위기를 모면하지만...

계속되는 도로통제로 ,정상적인 도로를 포기하고 산길을 돌아 돌아 간신히 광주에 도착하여





undefined



undefined


트럭을 타고 동료를 구하기 위해 가고 있는 류준열과 그 일행들과 만나며


undefined


페터는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사복형사에게 쫓기며 이리저리 헤매다 만난 광주의 택시운전사 유해진 의 기지로

(서울넘버를 단 택시의 광주진입금지) 광주택시넘버를 바꿔달고

무법천지인 광주거리를 헤매고 쫓기면서 서서히 실상을 깨닫게 된 만섭은

처음엔 홀로 두고온 딸에게 그날 돌아가겠다고 약속한것 때문에


undefined


5만원만 받고 페터를 버려둔채

혼자서 순천을 통하여 서울로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가다가  아들잃은 할머니를 태워주었고

식당에서 광주에서 얻어먹었던 주먹밥을 먹게 되며 마음을 고쳐먹고 광주로 돌아간다.

맨주먹으로 수부대와 혈전을 벌이는 광주시민들을 보며 페터를 다시만난 만섭의 마음은 서서히 변하고


이번엔 실상을 찍은 필림을 가지고  독일로 돌아가 세상에 알리려는 페터를 무사히  김포공항으로 데려다 주기 위한 필사의 탈출이 시작된다

유해진과 광주택시기사들의 엄호?로 군인들과 쫓고 쫓기는 질주가 이어지며

군인들에게 트렁크 검색을 당했지만 ,의식있는 ? 군인이 눈감아주고 보내주는 바람에 광주를 떠나 무사히 공항에 도착하여

페터는 이틑날 아침 예약한 비행기를 취소하고 당일로 출발하며 사복형사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과자상자속에 필름을 숨긴채 서울을 떠난다.

undefined

영화 말미에 그때 사진기자였던 위르겐힌즈페터가  나와 ,이 영화가 픽션이 아닌것을 알려주며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언론인이 수집한 자료를 방송으로 내보내지 않고 머릿속에 넣고 무슨 소용이 있나?'
 10롤의 필름 중 가장 중요한 5개는 허리 속에 넣었습니다. 광주에서 나오면서 두 번 검문을 받았지만,
 군인들은 총기가 있는지만 살폈지 자료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조선호텔 근처서 쿠키 통에 필름을 숨겼습니다.
이 필름은 일본에서 바로 독일로 보내져 그날 저녁, 독일에 방송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만섭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해달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끝내 김사복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했던  만복은 나타나지 않았고

페터는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병사했다한다.


기사이미지




그리고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망월동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undefined


장훈감독이  지금 42세라니 

5.18은  그때 우리 아들보다  한살이나 더 어렸던  그가 5살때 이야기이니

넌픽션처럼 완벽하게 묘사하기엔  무리한 일이었을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때의 광주항쟁 전말을 자세히 그리려는것(재현?)을 포기?하고 

철저히 ‘외부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방식을 취하며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한다”며 투덜거리던,

서울의  평범한 소시민 택시운전사 만섭의 눈으로 본 광주의 이야기를 그린다.



장훈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고

  광주에 살지 않아 그 사실을 모르던 사람들을  누군가 대변해야 한다고 봤기에.....


 "두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는 건데

 독일 외신기자의 시선과, 서울의 가장 평범한 소시민인 택시기사의 시선,

 관객들이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택시기사의 시선을 따라 외신기자랑 같이 광주에 내려갔다가

 그간 외면했던 진실을 직시하게 되는 과정을 따라갈 수 있는

 보편성 있는 캐릭터를 영화적으로 설정해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광주의 택시운전사 황태술(유해진),

광주의 꿈많은 대학생 구재식(류준열) 등 광주에서 만난 인물들도 모두 영화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김만섭, 힌츠페터와 함께하며 극을 생생하게 이끈다.

"김만섭은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라 영화적으로 따라갈 수 있게 창작한 부분이 있고,

광주에서 만난 인물들은 광주 시민들을 대변할 수 있는 캐릭터들로 설정해서 만든 부분이 있다.

당시 광주에 계셨던 분들의 증언이나 어떤 얘기들을 참고해 그 분들의 마음,

광주 시민의 마음을 대변하는 마음으로 황기사(유해진) 캐릭터들을 만들었고,

주변 광주 시민들을 설정하고 구재식이 광주에서 참여하게 되는 캐릭터로 설정해서 만들었다.


당시 실제로 굉장히 많은 택시기사님들이 부상자를 옮기고 시위에 참여하셨다더라.

영화엔 몇 대의 택시만 나오지만 보이지 않는, 실제 그때 참여했던 분들은 정말 많았다. 그걸 대변하는 캐릭터들이다."


“여전히 광주민주화운동 자체를 왜곡해서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가 작은 변화를 일으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때 36살이었던 나도 ,광주사람이 아닌 거류민?으로서 5.18을 겪었고 

 처음에는 만섭처럼 ,나도 ,외부자의 눈으로 그 사태를 목격했었다. 

 그러나 서울대를 다니고 있던 시동생이 5.21일  ,학교앞 다방에서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거의 한달을 갇혀있다 풀려난 사건을 겪으며

 언론이 완전히 통제된 서울에서, 날조된 광주의 상황을 그대로 믿고 있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직 40대이하인,

 그리고 그때 광주가 아닌 다른곳에서 소문만 듣고 오해했던 분들을 위해 광주항쟁 발생 배경을 검색해서 올립니다

 





5.18항쟁 발생 배경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움직임 속에서,

11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용했다.


하지만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0년 2월

 전두환은 보안사령부에 지시를 내려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한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린 상황이였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구실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같은 날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은 '북괴남침설'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라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을 접수하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고

 5월 15일 시위대 대열 속에 속했던 청년 한 명이 버스를 탈취하여 저지선을 돌파,

 전경에 돌진하여 전경 이성재 일경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5월 17일 24시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 부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같은 날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2,600여 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 의해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이날 내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정치 활동 금지·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