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 (잠언 1:1-7, 20-23)
지혜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는 거울
“아주 간단해, 무엇이든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아.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법이야.”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오랫동안 남는 사막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은 명언 중의 하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보이는 것, 화려하게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러니까 별 중요하지 않는 것에 매여 살고, 어린 왕자가 본 여러 사람들처럼 살게 됩니다.
이 세상의 많은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는 지혜가 정말 필요합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이란 동양고전은 삶의 지혜를 모은 책인데,
책의 제목이 밝을 명, 마음 심, 보배 보, 거울 감, 즉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이란 뜻입니다.
요즘 없는 것이 없는 세상을 살지만, 정말 중요한 마음을 밝혀주는 거울을 구하기는 너무나 힘듭니다.
마음을 밝혀주는 거울이 없으니 세상이 힘들다면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거울 같은 지혜입니다.
잠언은 그런 보배로운 거울입니다.
구멍난 인생을 깁는 바늘
잠언의 제목이 ‘잠언’(箴言)인데, 뜻을 물었더니 어떤 학생이 그 의미를 이렇게 답했습니다.
“잠올 때 읽는 책,” “잠깐 틈 날 때 읽는 책.”
잠언의 잠자는 ‘잠’(箴)자는 대나무 ‘죽’(竹)자와 모두 ‘함’(咸)자가 합해진 말인데,
의미가 ‘바늘 잠’자입니다. ‘대나무로 만든 바늘’이란 뜻입니다.
옛날 에는 대나무 바늘로 떨어진 옷을 기워 입었습니다.
잠언의 지혜는 구멍 난 옷과 같은 인생을 깁는 바늘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지혜는 구멍난 인생의 옷을 수선하는 바느질입니다.
바늘은 여러 천 조각들을 하나로 엮어서 옷을 만들기도 합니다.
가족, 친구, 직장, 취미, 언어, 음식, 문화 등 삶의 조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조각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데 지혜가 이것들을 이어 한 벌의 멋진 옷이 되게 합니다.
잠언의 지혜는 삶의 옷을 만드는 바느질입니다.
지혜가 필요하다.
실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난 주 빈 라덴이 죽은 이야기가 톱 뉴스가 되었습니다.
9.11 테러의 주범이 죽었는데, 이 죽음을 놓고 한쪽은 악이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고,
한쪽은 그는 순교를 당했다고 말합니다.
한쪽은 축제를 열고, 한쪽에는 데모하면서 더 큰 보복을 다짐합니다.
기준이 모호해지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기 어려운,
다들 자기 입장에 갇혀서 살아가는 상대주의 시대입니다. 정말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는 보이는 외모를 너무 중시하는 감각의 시대요,
보이는 외모를 바꾸어 버리는 성형의 시대며,
가상의 영상세계를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게 만드는 3D 시대입니다.
정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지혜가 무엇일까요? 지혜는 인생을 정말 제대로 살게 해주는 내적 능력입니다.
말하자면 IQ보다 감성지수(EQ), 혹은 역경지수(AQ)와 더 관련이 깊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전통에서 지혜는 헬라처럼 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필요한 삶의 기술입니다.
구역심방을 가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녀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습니다.
너무나 익숙한 가정에서도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지혜가 구합니다.
사회생활에도, 경제생활에도 인간관계에도 건강관리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영역에 지혜들이 필요한데 이런 지혜를 포괄하는 큰 원리와 같은 지혜는 무엇일까요?
지혜들의 기초가 되는 지혜, 지혜들의 근본이며 출발점이 되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그런 지혜를 집에서 주로 가훈으로 삼고 인생의 모토로 정합니다.
매우 고전적 가훈은 ‘가화만사성’입니다. 가정의 화목이 우선이라는 지혜를 삶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어떤 가정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존경 받는 사람이 되자”고 가훈을 삼습니다.
어떤 가정은 “자신에게 성공한 사람이 되자”를 가훈으로 삼습니다.
여러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의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 1:7)
“근본”이란 말은 기초란 말이지만,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출발점이고, 또 하나는 최고점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의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완성이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와 근대 후기의 지혜와 지식의 기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이성을 숭앙하는 것입니다.
근대를 열었던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것을 지식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우리 시대는 모두 자기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판단과 생각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세상과 인간은 결국 창조주요 보존자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산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지혜의 결론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중시하는데,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의미는?
효도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할 때 ‘경외’는 두려워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무서운 존재에 대한 공포가 아닙니다.
위대한 절대자 앞에서의 경건한 두려움과 공경입니다.
이 경외는 공경, 사랑, 존경의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지 않고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했는데,
막연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인격적이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포함된
공경과 조심스러운 마음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부모에 대한 효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가르칩니다.
레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하나님에 쓰는 동일한 단어를 부모에게도 사용합니다.
성경은 얼마나 효를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부모에게 효도해야 됩니다.
예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일까요?
잠언 9장 10절은”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을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과 함께 놓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곧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아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께 반응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외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참된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입니다.
칼빈은 우리가 정말 나 자신을 아는 가장 중요한 지식에 이르고자 한다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의 참된 현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을 알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면 자신이 얼마나 유한한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을 알게 되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 즉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잠언은 짧은 격언들이 많습니다. 각 격언들은 보석과 같이 빛나는 지혜를 그 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는 흩어진 채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비유와 이야기란 바구기에 담겨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잠언에는 내재된 이야기의 틀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길을 가는 청년과 지혜로운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한 청년이 길을 갑니다. 청년이 길을 가는데 길에서 두 여인을 만납니다.
두 여인이 그에게 다가오고 그를 부릅니다. 자기에게 오라고 합니다.
한 여인은 지혜로운 여인이고 또 한 여인은 미련한 여인입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때에 따라 아버지로 친구로 나오기도 합니다.
미련한 여인은 때에 따라 음녀 혹은 악한 이방 여자로 나오기도 합니다.
미련한 여인은 따라가고 싶지 않은, 매력적이지 않은 여자가 아니라 ,너무 유혹적인 여자입니다.
젊은 청년이 길을 가는데 두 여인이 계속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여기서 지혜는 여성명사입니다. 즉 지혜의 여인이 부릅니다.
잠언 9장 13절은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미련한 여인도 부릅니다.
삶은 이와 같습니다. 인생 길을 가는데 두 종류의 만남을 사람이 갖는 겁니다.
잠언을 읽는 독자들은 이 길을 가는 청년이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이런 긴장감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독자 자신이 바로 이런 길을 가는 청년임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인생의 길에서 누구의 말을 듣느냐? 지혜의 여인의 말을 듣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지혜는 하나님 경외를 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여인이 대체 누구일까요? 단지 선과 악의 의인화된 표현일까요?
두 여인이 젊은 남자를 부르는 지점을 보면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두 여인 모두가 ‘성중 높은 곳에서’ 이 젊은 남자를 부릅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와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초대합니다.
잠언 9장 1-6절,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잠 9:1-2).
지혜로운 여인이 진수성찬을 마련하고 청년을 부릅니다. 미련한 여인도 성중 높은 곳에서 부릅니다.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로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잠 9:13-14).
두 여인이 다 같이 성중 높은 곳에서 삽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성의 가장 높은 곳에 반드시 신전이 있었습니다.
평평한 지형에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도 지구라트나 계단식 피라미드를 세웠고
가장 높은 곳을 신의 거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성중 높은 곳에 사는 지혜 여인은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지혜 여인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매 여인의 집도 성에서 높은 곳에 삽니다.
우매 여인은 누구일까요? 이스라엘을 꾀어 여호와에게서 멀어 지게 하는 우상들과 거짓 신들입니다.
당시 메소파타미아 지역의 신들입니다.
가만히 보면 두 여인의 소리를 듣고 길을 가는 청년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입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에게서 여호와 신앙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위 나라와 정략 결혼을 하면서
이방공주들을 통해서 온 이방신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편 여호와의 소리, 그리고 한편 우상의 소리를 듣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두 여인의 소리를 들으며 길을 가는 청년은 또한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또 세상의 무형의 우상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솔로몬이 누구의 소리를 듣느냐를 결정해야 하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소리를 들으면서 선의 소리와 유혹의 소리를 들으면서,
두 신이 자기를 섬기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선이냐 악이냐, 하나님이냐 우상이냐라는 선택 앞에 서야 합니다.
선택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란 무엇입니까? 삶의 길에서 두 소리가 들릴 때,
지혜 여인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 여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서는 아담이 두 나무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입니다.
우리는 두 나무 중에 어떤 나무를 선택해야 하는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이기도 합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성경은 지혜란 것은 꼭 현자가 되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공부한 사람이라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혜는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 음성을 선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길을 가는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또 완성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마치면서 듣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참 지혜는 고상한 지식을 소유한 데 있지 않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지혜를 따라 살면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을 보는 거울 앞에 매일 서게 됩니다.
지혜를 따라 살면 구멍난 삶의 옷을 깁게 되고,
조각난 삶의 천들을 이어 한벌의 아름다운 인생의 옷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학교에서도,
대화에서도 관계에서도 모든 면에서 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모든 길에서 지혜가 필요한데, 지혜의 여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한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원리는 복잡하지 않고 간단합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지혜란 숨겨진 신비로운 비결이 아니라, 매일 삶의 길에서 지혜 여인을 택하는 길에 이미 있습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이미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에 담는 곳에 이미 지혜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읽고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가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가 있기를....
오월 말에 새생명 축제가 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란 영화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쉰들러씨는 나치제국에서 살았습니다. 다수의 독일백성이 히틀러의 소리, 즉 우매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쉰들러란 한 사람은 인생의 길에서 지혜여인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양심의 소리, 정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재를 털어 사람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누가 지혜로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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