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시간을 계수하는 지혜

왕언니 2010. 1. 3. 23:22

 

 

 

 

 

한 해가 그 끝자락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얼굴에 주름살을 새기고 마음에는 기억 몇 조각을 남긴 채

망각의 바다로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시간은 화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서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다”( 90:9)는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런 시간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한 해의 끝자락을 만날 때면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벧후 3:8)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시간 차원이 다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같은 하루도 체험의 질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 따라

시간의 가치와 의미가 달라진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천 년이 하루의 무게를 지닐 수도 있고, 하루가 천 년의 무게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시간의 상대성이론은 물질세계만이 아니라

인간 역사와 삶에, 그리고 영적 세계 속에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6:24).

그의 일생은 하루의 무게 밖에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삼 년에 불과했지만,

그 삼 년은 삼천 년을 너머 영원의 무게를 지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루가 천 년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에 4장과 5장에 가인과 셋의 두 족보가 등장합니다.

셈의 족보에는 나이가 기록되어 있으나, 가인의 족보에는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땅에서 살았던 시간들이 계수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간이 하나님과 무관한 시간이었기에

하나님 나라 역사에 기록할 의미를 갖지 못하는 낭비된 세월이 된 것입니다.

천 년이 하루가 되고 말았습니다.

 

열왕기상은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했던 시점을 기록합니다.

출애굽 후 480년 만이었습니다(왕상 6:1).

그런데 사도행전은 그 시기를 출애굽 573년 후로 계산합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 사사시대 450, 사울 왕의 통치 40, 다윗 왕의 통치 40,

그리고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지 3, 합치면 573년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계산합니다.

두 기록 사이에 93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실종된 93년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사시대를 보면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섬겼던 기간들이 나옵니다.

구산 왕을 8, 모압 왕을 18,

야빈 왕을 20, 미디안을 7, 블레셋을 40,

그 세월을 합하면 정확히 93년입니다.

역사서는 이 세월을 낭비된 세월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창세기 16장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는 이야기로 끝맺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17장은 그로부터 13년이란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16장과 17장 사이에 13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 세월에 대한 성경의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었던 세월을 낭비된 세월로 보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열심히 살았다 해도

그 시간이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 없으면 그 세월낭비된 세월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세월이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으면 하루가 천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 역사책에 계수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준으로 우리의 시간을 카운트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시간에 관한 첫 번째 지혜입니다.

 

누구든지 계수되지 않을 낭비된 시간이 많습니다.

잃어버린 세월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후회스럽습니다.

그 잃어버린 세월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요?

흘러간 과거는 그것으로 영영히 끝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소설이 있습니다.

시간 회복의 가능성에 대한 문학적 실험입니다.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엮어 가던 작가는

의미 없이 보였던 여러 사건들이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과거에 대한 재구성을 통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환희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기억의 차원에서 삶을 의미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한 것으로

시간을 구원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재구성의 방법도 필요하지만,

미래의 도전과 신앙을 통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허무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험하고 부끄러운 세월을 살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26).

그녀는 자신의 구겨진 죄악의 과거를 영영히 떨쳐 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던 짐을 벗는 영혼의 자유를 얻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허비하듯 쏟아 붓자

온 집안에 향유내음이 가득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향기를 드러낼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26:13).

 

복음역사란 거대한 집안에 그녀가 행했던 일의 향내가 두고두고 남아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하루의 헌신이 그녀의 잃어버렸던 긴 세월을 다 건져냈습니다.

하루 가치도 안 되는 그녀의 세월이 길이 빛날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하루가 천 년이 된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25:40).

작은 자에게 주었던 한 잔의 물, 한 번의 영접,

그 일을 했던 사람들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그 사소한 일들을

주님께서 일일이 기억하셨습니다.

 

아무리 작게 보이는 일이라도 하나님 나라와 연결될 때

그것은 하늘의 책에 기록되는 소중한 사건이 됩니다.

순간이 영원을 만나자 하루가 천 년이 된 것입니다.

 

 

 

많은 세월을 잃어버렸다고 낙심하십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당신의 시간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십시오.

작은 일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영원합니다(고전 13).

 

지금부터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당신의 오늘의 사랑과 내일의 헌신이 잃어버린 과거의 세월을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미래가 과거를 다시 창조합니다. 이것이 시간에 관한 두 번째 지혜입니다.

 

다시 겨울이 옵니다.

흰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주님의 하얀 마음에 뚜렷이 각인되는

그런 인생의 시간을 살고 싶습니다.

겨울 너머 영원한 봄인 하나님 나라에 기록되는 삶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겨울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 우리에게 시간을 계수하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