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균형과 깊이 "믿음의 선한 분투

왕언니 2024. 1. 15. 11:14

딤전 4:14~15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것을 가볍게 여기지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 6:11~16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만물을 살게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새해, 달력을 넘기면서 새로움을 기대하고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만, 새해 벽두부터 지진, 전쟁, 이란의 폭탄 테러, 야당 대표의 피습, 북한의 서해안 도발 등의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니,새로움은 달력이 바뀜으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올해는 ,1월 13일 대만 총통 선거에 이어, 4월의 한국 총선, 미국과 러시아 대선을 포함한 50여 개국의 선거들이 있는데, 이 또한 투표용지란  총알을 사용하는 또 다른 전쟁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쟁은 ,온라인상에서는 이미 상대를 증오, 혐오, 비난과 같은, <말만으로도 살해하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의 사회를 두고 학자들은 지금 우리사회는 피로사회에서, 위험사회와 분노 사회를 지나 ,증오 사회가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평화를 바라고 시작한 새해벽두부터 곳곳에서 전쟁과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싸움을 보면, 누군가를 적으로 삼고 싸우는 그 싸움의 대상이, 진짜 맞는 적인가? 아니면 진짜 싸움의 대상을 놓치고 있는건 아닌가? 진짜 싸움의 대상을 놓치는 싸움에 승자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때는, 로마가 제국으로 평화를 선포했던 때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의 깃발 아래서, 싸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이때도 수많은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감옥에서, 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무자비한 국가 폭력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이런 싸움들이 있을때, 에베소 교회안에도, “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딤후 3:8).  모세를 대적한 이들처럼, 바울과 디모데를 대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4~5) 이 구절에 나오는 언쟁과 분쟁 비방 다툼이 있었습니다.

 

금년 신년 새벽기도회에서 강사 목사님이 교회를 두고 ‘교회는 성자들이 모이는 천국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병원’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천국이 아닌, 예수님이란 의사를 통해 치료받으려고 환자들이 모인 병원이다 보니 그런 일이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로마의 평화란 깃발을 펄럭이는 시대도, 하나님의 집이란 교회도 다양한 종류의 문제와 갈등이 있고, 그런 싸움과 갈등은 가정에도 내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과 현실은 달력이 바뀌었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 목회를 하는 디모데에게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유언 같은 편지를 쓰는데 ,그것이 디모데전후서입니다. 

“아들 디모데야 …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 1:18)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 (딤전 6:11~12) “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

 

총 10장의 서신에서  ‘싸움’이란 단어가  무려 세 번 나오는데, 이 중 두 개는 히브리서 12장에서 나오는 믿음의 경주의 경주와 같은 단어입니다.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는 것은 ,사실,믿음의 경주를 하라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번 새벽기도회 둘째 날 제목이 믿음의 경주였습니다.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브리서 12:1).

 

믿음의 경주, 믿음의 선한 싸움을 ...믿음의 선한 분투로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경주라면 목표가 분명해야 하고, 싸움이라면 싸움의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세상의 수많은 싸움은 목표와 대상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고, 그가 세운 교회에 여러 어려움이 있을 때, 일반적으로 디모데에게 무엇과 싸우라고 했을까요? 로마와 싸워라, 교회의 누구와 싸우라, 이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선한 싸움은 싸움과 분투의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그런 싸움과 분투입니다.

 

제가 강원도 고성에서 소대장으로 있을 때 , 중대장이 등고선이 그려진 종이 지도를 주고는 그것으로 야산의 위치를 독도법으로 찾아서 그 고지 위의 적을 향하여 돌격하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 지역을 전혀 모르는데, 또 몇 야산들은 다들 높이도 비슷하고 게다가 밤인데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대충 지도를 보고 감으로, 이곳일 거야, 그러고는 소대원을 이끌고 밤에 소나무 가지에 찔리면서 조용히 올라가서 고지에 가까이 접근해서는 “돌격 앞으로!” 함성을 냅다 지르며 죽을힘을 다해서 올라갔는데 ...그 고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목표를 잘못 정하고 달린 것, 싸움의 대상을 잘못 알고 싸운 것은 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말할 때 그 싸움의 대상은 대체 무엇일까요? 무엇과 싸우는 것일까요? 믿음의 선한 분투라면 무엇을 추구하라는 것일까요? 정확한 목표와 바른 대상을 아는 것이 선한 싸움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배우고 확신한 진리를 향한 분투

 

첫째 진리의 말씀을 붙드는 분투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딤전 1:4).

 

당시 그리스와 로마 신화가 사람들의 종교적 상상력을 지배했고, 신화 속 큐피드 ,헤라클레스 ,시지프스 같은 신들은, 시대의 아이돌과 같은 영웅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이면 그런 신화의 이야기가 주 관심이었던 때에 바울은 그런 신화 이야기에 관한 관심 때문에 ,말씀 속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집중력을 뺏기지 말라고 합니다.

 

또 말합니다. “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 (딤후 3:13~14) 악한 사람들로 더 악해지고, 속이는 자들로 인해 속는 일이 많으나, 그럴수록 그런 헛된 말들을 듣고 재생산하지 말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더욱 거하라고 합니다.

 

또 당시 헬라철학에서 나온, 영지주의란 이단, 유대교에서 나온 유대주의 이단들이 믿음을 흔드는 경우가 많았기에 “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딤후 2:15) 라고 하면서, 진리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깊이 연구하는데 매진하라고 합니다. 또 그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딤후 4:2)

 

디모데에게 말한 믿음의 선한 싸움은 무엇일까요?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 관한 관심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나, 이단들의 가르침에 흔들릴 정도로 말씀을 잘 모르는 나, 그런 나와 싸우라는 겁니다. 그리고 신화, 이단, 속임 등이 있었던 당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려는 싸움, 진리의 말씀을 붙잡는 분투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해야 할 믿음의 선한 분투는, 말씀의 빛을 놓지 않으려는 분투입니다. 지금은 몇 신화들이 관심거리가 된 시대와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오락과 취미와 볼거리들이 우리의 관심과 시간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스마트 폰이란  매체를 통해서 다 이루어지다 보니 한번 스마트 폰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붙잡히면, 떠나지 못하는... 누구의 말처럼 마약과 같은 중독을 가져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분투해야 할 것은, 스마트 폰을 손에서 내려놓고 성경 말씀을 손에 드는 일인것 같습니다.

 

또한 지금은 포스트 트루스 시대, 진리 이후 시대로서 진리와 가짜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자기 생각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기준이란 왜곡된 안경과 관점이 많은 문제의 핵심임을 인정하지 않은 시대입니다. 이런 때에 말씀을 붙드는 그런 분투가 없으면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 의해 생각이 조종당할 위험이 너무 많습니다.

 

작년에 구약 통독반이 있었는데 ,참여한 분들은 다 이사야 53장, 시편 136편, 146편 등의 내용을 암송했습니다. 그중에는 74세가 된 집사님도 계십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분들도 말씀을 붙들려고 분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듣는 설교에서도, 구역에서 은혜를 나눌 때도, 내게 주는 한 말씀을 붙잡기 위해, 이런 분투가 필요합니다. 매 상황, 그것을 기록하고, 묵상하고, 마음에 담으려는 분투가 있어야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향한 분투>가 중요합니까? 

말씀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왜 말씀이 중요합니까?

말씀만이 목이 곧고 자아가 너무 강한 우리들의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수술칼이고,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바울은 ,<말씀을 듣지 못하는 나와 싸우라, 말씀의 빛없이 한 주를 보내는 나의 습관과 싸우라, 내게 주는 말씀을 한마디라도 붙들려는 믿음의 분투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붙잡는 그런 분투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과 기도를 향한 분투

 

둘째 성령과 기도를 향한 분투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 (딤후 1:13~14)

 

말씀을 들어도 성령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말씀을 알아도 성령을 주님으로 구하는 매일의 기도가 없으면 그 모든 것은 지식에 그치고 그 지식은 실제 변화를 불러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향한 분투는 성령과 기도를 향한 분투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빛은 성령의 열과 같이 있어야만 합니다. 빛이 보여주는 길은 성령의 힘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 박사는 우리 시대 최고의 성경학자요 목사인데, 누구보다 말씀을 깊게 정확히 알았지만, 그는 매일 이렇게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제가 주님의 임재 안에서 살고 주님을 더욱더 기쁘시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 오늘 제가 저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성령님, 오늘 성령님이 저를 충만하게 채워 주시고 성령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제 삶 속에서 익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존 스토트 기도)

 

그는 주님의 임재,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인, 성령 충만을 구했습니다. 임재와 성령의 주되심을 구하는 기도가 있을 때 비로소 성령의 9가지 열매란 실제적 변화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일생의 기도로 삼아도 좋습니다.

 

성령을 강조한 바울은 기도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1~4)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임금들과 고위직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제국의 번영이 영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땅의 나라가 안정되고 질서가 유지됨으로 많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 입니다.

선한 싸움의 대상은 로마 제국이 아니라 그 제국 안에서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 안에서도 기도를 강조합니다. “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8).

남자와 여자가 말로 싸우면 남자가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손을 듭니다. 남자들끼리 다투면 금방 손을 상대를 향하여 들고 위협하곤 합니다. 그런 장면의 이미지를 완전히 리메이크하여, 높이 든 손이 하나님을 향하여 든 기도의 손, 상대를 축복하기 위해 든 손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남의 일에 무관심하거나, 관심을 가진다면 다름과 부족함을 보고 판단하는 지적하는 손짓을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과 서로를 향한 중보기도의 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보기도가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무관심한 자신과의 싸움, 중보기도를 하려는 사랑과, 기도의 분투가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구역마다 중보기도, 요일마다의 기도팀, 또 금요찬양기도회를 통해, 우리 모두 중보기도의 손을 높이 들기를 바랍니다.

 

유명한 신학자 본 회퍼가 미국에 신학교 교수로 있다가 나치가 정권을 잡은 것을 보고, 조국 독일로 들어왔는데, 히틀러 암살에 가담한 혐의가 발견되어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는 히틀러와 나치란 악한 힘에  저항하면서,종종  자신도 증오와 복수심이란 악한 힘에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깨달으며,그래서 그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악한 힘이 지금 나를 감옥에 가두고 있지만, 지금 나를 감싸는 것은 선한 힘이게 하소서. 성령의 선한 힘, 하나님의 선한 힘이 나를 붙드소서. 그래서 그는 증오와 분노의 악한 힘의 포로가 아닌 선한 힘의 종으로서 악한 힘과 싸우는 그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었습니다. 악한 힘의 포로가 될 수 있는 손을 선한 힘의 기도의 손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의 기도문이 이렇습니다. “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눌러도 /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온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본 회퍼)

 

우리는 세상의 악한 싸움판을 보면서 그 악한 힘의 희생양이 되거나 악한 힘의 도구가 되거나, 내가 증오란 악한 힘에 붙잡히기 쉽습니다. 악한 힘을 이기는 선한 싸움은 성령의 선한 능력에 더 붙잡히려는 분투입니다. 악한 힘이 사로잡는 세상에서 성령의 선한 힘을 붙드는 기도, 내 마음이 선한 힘 아래 있어 부정적 감정의 공격을 이겨내려는 분투, 이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이런 선한 힘을 붙들려는 분투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의 나를 향한 분투

 

셋째 그리스도 안의 내가 되기 위한 분투입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딤전 4:15~16).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그리스도를 닮은 너의 모습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나타나게 하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과 문제를 보고 지적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에 에너지를 쓰는 시대 속에서, 네가 너답게 되는 일에 전심전력하라, 너답게 된다는 것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네가 되라’ >그런 내가 아닙니다. 죄성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되는 것입니다. 말과 태도와 삶에서 성숙이란 열매를 보이는 일에 전심전력하며 분투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후서에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 선출의 조건들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 감독(목사,장로)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외인에게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딤전 3:2~7)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책망할 것이 없으며” (딤전 3:8~10)

 

왜 바울이 교회 직분에 관한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시했을까요? 교회 안에 직분을 가졌지만, 직분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 직분에 맞는 내가 되는 것이 전심전력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 아무에게나 경솔이 안수하지 말고” (딤전 5:22)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딤전 3:10).

교회는 콘스탄틴 공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교회에 들어와서 성도가 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인 이후로 교회 안에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고 직분자를 많이 세웠는데 기준을 너무 낮춘 것입니다. 그러자 중세 교회, 종교개혁 이전 교회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누구든 교회에 올 수는 있지만

너무 쉽게 직분자가 되는 것, 목사의 기준이 너무 낮아진 것, 사람을 섬기는 장로와 권사의 기준이 너무 낮아져 버린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남에 대해 말하기 전에 내가 직분에 맞는 사람이 되려고 전심전력해야 하는데 바울을 보면 우리는 놀랍니다.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6~27)

그는 가장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직분을 갖고 있지만 그것에 적절하지 못할까봐,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란 이름만 갖지 않고 그 이름에 맞는 자신이 되기 위해 전심전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직분을 떠나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닮은 내가 조금이라도 되기 위한 분투, 그렇지 못한 나와의 싸움, 이것이 싸움의 대상을 바로 아는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사회적 여러 직분과 직책이 있습니다. 그런 사회적 직책의 이름만 구하지 말고, 그 직책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전심전력하는 분투가 있어야 합니다.

 

 

선한 분투

 

이렇게 볼 때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싸움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들이기 전에 바로 나 자신입니다. 직분과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있으나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싸움의 대상입니다. 양당이 서로 싸우는데 진짜 적은 상대 당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자기 정당의 실망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의 적도 어제의 나, 작년의 나, 성숙이 없는 나, 열매가 없는 내가 진짜 싸움의 대상입니다. 진정한 내가 되려는 분투, 성령의 열매가 있으려는 분투,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믿음의 선한 분투는 목표와 대상이 분명한 경주요 싸움이요 분투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붙잡으려는 분투, 성령의 선한 힘 안에 거하려는 분투, 그리스도 안의 내가 되려는 분투,

이 세 가지가 균형을 갖추고 그것이 갈수록 깊이를 더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 한해 우리의 선한 분투는 이 세 가지를 붙드는 것입니다.

매일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려는, 오직 사람의 말, 내 감정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분투가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주 금요기도회, 구역모임에서 기도의 손을 높이 드는 한 해 되길 바랍니다.

이 한 해 우리가 작년보다 변화가 있고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 가지가 균형을 갖고 깊이가 더해지길 바랍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포로 속에서 믿음의 선한 분투를 했듯이...

성경의 빛을 붙잡고, 기도의 불을 끄지 않고, 택한 백성이란 이름에 맞는 성화의 삶을 보이는 균형과 깊이를 더하자,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었듯이,...

 

바울과 디모데도 확신한 말씀을 붙들고, 성령의 선한 능력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 안의 내가 되려는 분투, 그 셋의 균형과 깊이를 가짐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듯이,

우리도 새해를 시작하면서

다니엘처럼, 바울과 디모데처럼 믿음의 경주, 믿음의 선한 분투를 하기를 바랍니다.

성경, 성령, 성화, 이 세 가지가 균형을 갖추고 그 각각이 깊이를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