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를 회복하면 미래는 밝다 (교회의 내일을 위하여 )
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미래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현대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십여 년 전만 해도 세계는 영원한 성장과 풍요의 꿈에 빠져 있었지만,
코로나와 전쟁 이후모든 경제 사회 지표는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이런 변화 아래서 교회의 상황은 더욱 어렵다.
교회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여기 저기서 들려온다 .
과연 교회의 미래는 몰락으로 결정된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 있을까?
겨울이 되면 겨울 나무는 모든 잎을 다 떨구고 생명을 내면으로 집중시킨다.
그렇게 준비된 겨울 나무는 봄에 빛나는 눈부심으로 잎을 내며 다시 태어난다.
교회도 눈에 보이는 일들의 분주함을 넘어 가장 중요한 것을 제대로 붙든다면,
시대적변화라는 겨울의 찬바람이 불어도 봄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
그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교회의 원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의 미래는 교회의 원래속에 있다. 원래가 살면 미래가 산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교회가 그속에 원래를 답고 있다면 미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교회의 원래
교회의 원래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다 .
예수님은 헤롯이 짓던 예루살렘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 고 하셨고 ,
공생애 마지막 시점에서 성전에 들어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하셨다.
46년째 공사 중이던 헤롯성전은 당대 최고의 건물 중 하나로 꼽혔고
세계각지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순례로 번성했다 .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이 ‘원래’를 상실했기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셨고 유효기간 만료를 선언하셨다.
성전이 세상 속에 있는 이유는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성전으로 와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요 ,
하나님을 만난 그들이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거룩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
그런데 당시 성전은 화려한 외양과 달리 하나님과의 만남,이웃과의 만남이 사라진 상태였고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도 없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에 대하여 사망선고를 내리시고 사흘만에 성전을 짓겠다고 하신 것이다 .
예수님이 세우신다고 하신 그 성전은 화강암이 아닌 살아 있는 돌로 짓는 성전이었다.
그리고 그 성전의 첫째 산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인간에 의해 버림을 받은 돌이었지만 ,그 돌을 하나님이 성전의 모퉁이 돌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돌을 기준으로 다른 산돌들을 만들어 살아있는 성전을 확장해 가신다 .
산돌로 세워진 음부의 권세가 인간의 내면과 외면에 강력하게 지배하는 세상속에서 건져진 이들이었다.
죽은 벽돌과 같은 이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 산돌이 된 것이다 .
그들은 손에 천국 열쇠를 쥐고 세상속으로 파송된다 .
음부의 권세가 있는 모든 곳에서 천국을 열어 천국권세를 드러나게 만든다.
그래서 구원과 선교가 한지역에 고정되지 않고 모든곳에서 ,
몇사람이 아닌 모든 성도에 의해서 일어나게 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속에 교회의 원래 모습이다.
산돌공동체
이런교회가 역사속에 나타났다. 거대한 돌로 성전이 지어지고 있던 예루살렘에서
다른 돌로 짓는 다른 성전, 산 돌로 세워지는 예루살렘교회였다.
이 교회는 예루살렘성전과 달리 매우 소박했지만 성전의 기능인 구원과 선교가 제대로 일어났다.
성전을 이루는 돌들이 살아 있는 돌이었기 때문이다. 그 돌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핵심 DNA세가지가 있었다.
첫째가 성경의 빛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었고 성경을 따라 제사도 드렸으며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읽으면서도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다 .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오랫동안 닫힌 책이었던 성경에 진리의 빛이 비취게 된 것이다.
진리의 거룩한 빛 비췸이 산 돌의 첫째 특징이었다.
둘째는 성령의 불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종교관습을 열심히 지키며 살았고
특히 그 최고치는 바리새인들이었다 . 하지만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는 진리의 빛 그대로 살 수 없다.
그런데 성령님이 임하자 제자들은 인간의 열심과 의지가 가진 한계를 넘게되었다.
특히 성령이 임할 때 제자들은 방언을 했는데 , 이것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알아듣는 말이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단절의 벽들을 높이 쌓아 올리고 서로 싸우고 죽이는 역사를 써왔다.
그런데 성령은 거짓의 영이 만든 분열과 단절의 벽을 허무는 능력을 주셨다.
교회는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룩한 능력을 받게 된 것이다.
셋째는 성화의 삶이다.
성경의 빛이 있어도 성령의 힘이 없으면 의미 있는 변화가 불가능하고,
성령의 힘이 있어도 성경의 힘이 없다면 혼란이 뒤따른다.
그런데 성경의 빛이 비취고 성령의 불이 임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내면과 일상의 변화가 일어났고 이웃과의 관계 변화가 일어났으며 심지어 공동체적 삶의 변화도 일어났다.
이런 변화는 세상을 놀라게 만들며 사회적 변화까지 이끌어낸다.
한국 초기 교회도 그랬다.
선교초기 조선 땅은 불교와 유교와 무속이, 변화를 거부하는 강력한 권세로 조선 땅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완고한 땅에 세워진 작고 소박한 영적 건물이 한국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교회도 예루살렘교회의 세가지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성경의 빛이다.
선교가 시작될 때 이미 번역된 성경이 있었고 ,
경전에 대한 갈급함이 매우 많았으며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를 위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둘째는 성령의 불이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경회 중에 성령이 임했다.
1903년 원산의 성경공부모임에 성령이 임했고,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있었다.
셋째는 성화의 삶이다.
술 먹고 도박하며 아내와 자식을 때리던 남자들의 변화가 관계의 변화로 가정의 변화로 확산하더니 사회개혁이 그 뒤를 따랐다.
음부의 권세가 강력했던 조선 땅에 세워진 산 돌의 영적건물이 천국 권세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음부의 권세에 흔들린 교회
하지만 교회가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교회가 흔들리는 경우를 보면 똑같은 지점들이 역으로 나타난다.
먼저는 성경을 덮었을 때이다. 성도들이 성경에 접근할 수 없었던 중세 시대, 교회는 병들었다.
교회 스스로 이성을 기준으로 성경을 부정하고 폄하하던 근대시대, 교회는 영향력을 잃었다.
또한 성령이 외면당할 때 교회는 흔들렸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 돈과 권력의 힘을 과시하고 지식과 제도를 의지할 때 교회 본연의 영광과 능력은 소멸해 갔다. 성화가 왜곡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 신앙을 그저 지식의 변화나 직분의 변화정도로 여길때,
문화 변혁이나 사회제도 개선정도로 오해할 때 교회는 길을 잃었다.
균형과 깊이를 추구하며
삼각다리의 의자가 다리 셋으로 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약하면 약한쪽으로 쓰러진다.
교회는 성경의 빛, 성령의 불, 성화의 삶이란 세가지 핵심 가치로 서야하는데 ,
이중 하나가 약하면 약한 쪽으로 쓰러지면서 음부의 권세에 흔들린다.
그러나 이 셋 모두가 굳건하여 균형을 갖추면 교회는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천국 권세를 보여준다.
이 셋이 균형과 깊이를 갖춘 교회가 주님의 마음에 있었던 교회요, 교회의 원래 모습이다.
이 원래를 찾으면 교회는 미래가 있다. 회의와 불안이 가득한 시대 ,교회는 그 원래를 회복하려고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가치들을 회복할 것인가?
먼저 성경의 더 밝은 빛을 구해야한다.
성경의 빛은 몸 안을 보게 하는 엑스레이처럼 우리의 깊은 속을 드려다 보게 한다.
이 빛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깊은 문제가 우리 속에 있다. 성경의 빛 아래 머무르며 은밀한 죄의 문제를 봐야한다. 명상, 수행, 힐링 정도로는 부족하다. 성경은 깊이 보게 할 뿐 아니라 멀리 보게 해주는 빛이다.
우리는 시야를 아무리 넓혀 보았자 과거 어린 시절과 미래의 노년정도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면 태초의 인간 아담이라는 가장 먼 과거부터
마지막 날 부활한 인간이라는 가장 먼 미래까지 비춰주는 빛이 필요한데 ,성경이 그런 빛을 비춰준다.
성경은 어둠을 보게 해주는 적외선과 같아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진리까지 보게 해주며 ,
또한 우리가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관이라는 안경까지 점검하게 해주는 빛이다.
안경을 낀 사람이 불편을 느끼면서도 안경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듯이,
우리는 세계관이라는 안경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망각하기 일쑤이다.
인간의 편견과 탐욕으로 왜곡된 안경을 성경의 진리로 교정해야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있다.
성경의 빛 아래 더 오래 머물고, 마음을 열어 그 빛의 조도를 더 높여야 한다.
둘째 성령의 불을 유지 해야 한다.
성경의 빛으로 가야 할 길을 보았다고 해도 그 길을 걷는 힘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그 길을 걸어가려고 했던 많은사람이 실패했고
결국 말과 실제가 다른 위선자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바울사도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고 말했던 것도
우리 힘으로는 성경의 빛이 보여준 길을 걸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길만 보여주고 그 길을 자기 힘으로 걷게 하지 않는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힘을 주시고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끝까지 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님에 대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잘 사용하게 된다.
은사에는 초자연적 은사도 있지만 자연적 은사도 있다.
초자연적 은사는 특별한 경우에 주어지지만 자연적은사는 모두가 가지고 있다.
어떤 은사이든 바로 사용하면 자신과 남에게도 큰 유익이 된다. 자연적 은사는 초자연적 은혜의 통로이다.
셋째는 성화의 삶이다.
우리는 계속 변화된다. 겉 사람도 바뀌고 속 사람도 바뀐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란 구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은 겉 사람은 노화되나 속 사람은 날로 성숙해져야 한다.
그런데 속사람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을 닮는 변화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육신의 부모를 닮지만 또한 첫째아담을 닮아 있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타인에 대한 자기 중심성을 가진 첫째 아담을 복제하고 재 생산하며 산다.
그런데 성경의 빛과 성령의 불은 첫째아담의 모습을 둘째 아담의 모습으로 바꾼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한 예수님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화되는 것이다.
성화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닮은 변화인데 이 변화를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점의 변화이다.
예수님은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2)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도“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롬 12:2) 라고 했다. 눈이 바뀌지 않고는 몸으로 사는 삶이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건강한 발전을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숫자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기독교는 우리사회의 주류종교고 그 중에서도 엘리트층의 비율이 높다.
문제는 관점의 변화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 성경의 빛과 성령의 불로 예수님을 닮은 변화가 일어나야한다.
균형과 깊이를 더하며
교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과거에서 교훈을 받고 지금 해야할 일을 알고 행한다면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 거대하게 지어지고 있었다면 지금은 훨씬 더 거대하고 더 화려한 현대문명의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현대문명은 단순히 화려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색채를 지닌다. 그 안에서 권력과 맘몬과 쾌락같은 무형의 신이 열렬한 숭배를 받고 있다 예루살렘성전보다 더 화려한 만큼 그 공허함도 깊다. 물질은 풍부한데 정신은 빈곤하고, 더 많은 이들과 쉽게 연결되지만 더 외롭고 고독하다. 편리를 위한 수단은 넘쳐나는데 정작 평안은 없다. 4차 혁명이 점점 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겠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인 사람의 변화는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그 변화는 ‘원래’를 떠난 변화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래는 위기이다 . ‘원래’를 벗어난 곳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가 ‘원래’를 잘 붙든다면 ‘미래’는 또한 기회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성경의 빛을 밝히고 ,성령의 생명의 불을 유지하고 ,성화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시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천국 권세를 보여주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역사속에서 증명된 일이다.
이 한해는 어쩌면 길고 추운 겨울과 같을지 모른다. 그럴수록 봄소식이 필요하다.
봄은 원래를 찾고 그것의 깊이를 더하고 균형을 잡을 때 온다.
원래를 붙잡으면 미래는 반드시 온다.
미래는 원래속에 있기 때문이다.
새해는 원래를 알고 ,그것의 깊이를 더하고 균형을 잡는 한해가 되기를,
봄의 소망이 아침 태양처럼 솟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룹명 > 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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