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야고보서 3:18 화평하게 하는 자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평화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아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 평화가 있을 때 자식들은 아비를 장사 지낸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아비들이 자식들을 장사 지낸다."라고 말했는데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이런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깨뜨리는 전쟁이 지금 그곳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 여러 집단 사이, 여러 계층 사이, 심지어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일어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성경의 큰 그림으로 보자면
우리는 모두 에덴의 동쪽에 거하기 때문이고 , 평화를 깨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 간에, 집단 간에 ,개인 간에, 평화를 깨는 사람들이 있고, 가짜 평화를 평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이기도 합니다. 관계에 때로, 내 마음의 평안을 내가 파괴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말씀하셨는데
평화가 위협을 받는 세상에서 그저 평화롭게 사는 자가 아니라, 좀 더 평화로운 곳으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가 깨어진 곳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저 평화롭게 지내시는 분이 아니라,
평화로운 곳으로 옮기는 분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로마의 평화
예수님은 팍스 로마나 시대, 곧 로마의 평화 시기에 탄생하셨습니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란 사람이 로마 제국을 만들어 지중해 권에 있던 크고 작은 전쟁들을 그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가져온 평화를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라고 불렀습니다.
그 평화는 국가 간의 전쟁을 그치는 점에서는 평화를 가져왔지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 평화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화는 모두의 평화가 아닌 로마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수많은 이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는 피에 흠뻑 적셔진 평화였습니다. 즉 로마인에게는 평화였지만 그 지배 아래 있는 다수의 사람에게는 평화가 아닌, 그들의 일방적 평화였습니다.
또 하나의 평화는 전쟁과 불화의 현실 속에서 평화를 찾기 위해 현실을 벗어난 마음의 평정이란 평화였습니다. 이 평정을 명상과 철학을 통해 추구했는데,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평화요 외면의 현실을 벗어난 내면의 평화였습니다. 이런 평정을 그리스 철학자들은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는데, 이런 평정은 그런 철학과 명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자들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타자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평화였습니다.
로마인의 힘의 평화, 그리스 철학자의 마음의 평정은, 로마인과 철학자 귀족과 같이 힘이 있거나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나 적용이 되는 평화였고, 다수의 민중들, 노예들, 여자들, 피지배인들에게는 해당이 없는 평화였습니다. 이런 힘에 의한 일방적 평화 , 마음의 내적 평정이란 부분적 평화를 평화라고 말하는 시대 속에 한 아기가 탄생합니다.
땅 위의 평화
그 아기에 대해서 하늘에서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누가복음 2:13~14)
땅 위에서는 로마 황제가 평화가 왔다고 선전했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내면의 평정을 즐긴다고 글을 썼는데, 하늘에서는 한 아기를 통해 평화가 온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선포는 로마의 평화, 그리스 철학자들의 평화와는 다른 평화가 이 땅에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참 평화가 이 땅에는 필요한데, 그 평화는 기다리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야 하는데, 그 일을 위해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참 평화는 힘에 의한 평화와는 다른, 사랑에 의한 평화요, 사색을 통한 내적 평정을 넘어서 깨어진 관계를 바로잡는 관계의 평화요, 일부만의 평화가 아닌 모두의 평화요, 사람들 사이의 평화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평화인, 그런 평화를 만들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구유, 나귀, 십자가
그러면 그 하나님의 아들은 어떻게 그 평화를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전 생애가 그 평화를 만드는 생애였지만, 그중에서 중요한 세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첫째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홀로 평화롭게 지내시는 평화에 머물지 않고, 분쟁과 불화의 세상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고통의 현실을 외면한 채 나 홀로 조용히 평화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수동적 물러남>이 아닌 <적극적 함께 함>을 통해서 평화를 만드는 자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둘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란 도시는 평화의 기초란 뜻입니다. 살렘이 평화란 의미의 샬롬에서 나온 단어인데,그러나 평화의 터전이란 이름을 가진 당시 예루살렘은 평화가 깨어진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성전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참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도시에는 말을 탄 로마 군인이 주둔하면서 반로마 세력을 제압하고 십자가에 매다는, 무력의 방식으로 그들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란 도구로 평화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셋째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타인들의 생명을 취함으로, 많은 경우 자신의 평안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자연의 파괴를 가져오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타인을 희생시킴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자기희생을 통해 모두의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전 생애는 홀로 평화롭게 있지 않고, 평화를 만드시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심으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님은 자신이 큰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에게 그 평화를 우리가 누리는 것에 그치지 말고 우리도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만이 참된 하나님 자녀의 표지라고 하셨습니다. “ 화평케 하는 자(평화를 만드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까? 당시 불화의 현실에서 벗어나 사막으로 들어가서 그들만의 평화 공동체를 만들어 살려고 했던 에세네 파란 무리는,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또 당시 현실을 떠나 철학과 사색으로 그들만의 평정을 구하는 철학자들도 있었는데. 그렇게 조용히 평화롭게 살면, 그것은 나는 평화롭게 살지 몰라도 깨어진 평화를 온전케 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 것을 충분히 사용하여 나만의 평안과 편리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깨어진 평화로 인해 생겨난 타인의 고통을 제거하는 일에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또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만듭니까? 당시 로마는 폭력과 무력이란 도구로 로마의 평화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로마에 대항했던 열심당원들도 무력이란 수단으로 로마에 저항함으로 유대인의 평화를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오늘의 현실 세계에서도 다양한 힘들, 군사력 경제력 정보력과 같은 힘을 사용해서 경쟁에서 상대를 이기고 또 상대를 제압함으로 그들만의 평화를 만들고 그것이 평화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속에 불화의 씨를 남게 하고 언제 다시 불화가 생길지 모릅니다.
평화를 위해 평화를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없앤다는 것입니다.
군사, 경제, 정치, 정보의 힘을 타인을 희생시키는 쪽으로 쓰지 않고, 특히 약자를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쓰지 않고, 보복할 수 없는 무리를 희생양으로 삼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힘을 가진 자들이 그 여러 힘들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절제하고 타인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힘을 가진 자가 타자와 약자에게 희생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도구란 기도문처럼 그럴 때 평화의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자기 내려놓음, 자기 양보, 타자 이해, 타인 공감, 용서, 원수를 위한 기도와 같은 자기희생의 수단으로, 힘을 가진 자의 제한을 통해 참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진 힘을, 지배의 도구가 아닌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이 평화를 만들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행동
하나님의 아들은 혼자 평화롭게 사는 것을 넘어서, 평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 “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야고보서 3:18)라는 말씀이 있는데,
평화를 만들려면 즉 의의 열매인 평화의 열매를 얻으려면, 그것은 한 번의 영웅적 행동 하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평화의 씨를 뿌림으로 평화의 열매를 맺고 평화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평화의 작은 행동의 씨를 심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원수처럼 지냈기에 서로 같이 식사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그들과 같이 식사하는 일을 시작했고, 사도들도 엄격한 유대의 관행을 깨고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함으로 평화의 씨를 조금씩 심어갔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 안에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신앙생활을 했는데, 유대인 신자들은 할례와 음식법 안식일과 같은 종교의식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은 참된 평화가 어려웠지만, 의식법이란 법을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평화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한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평화가 이루어진 공동체를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평화의 씨를 심어서 평화의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평화란 한자어의 의미가 있습니다. 평화(平和), 화(和) = 미(米) + 구(口) 평화(平和)의 화자는 쌀 미와 입 구로 되어 있습니다. 평화란 쌀을 모두의 입에 공평하게 넣는 것이란 뜻입니다. 평화는 쌀을 나누는 행동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결국 불화는 여기서 생깁니다.
오늘 같은 극도의 양극화 사회에서는 꾸준히 나눔이란 평화의 씨를 심어야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물질과 관심, 친절,, 사랑을 나누는 작은 평화의 씨를 일상 속에 계속 심음으로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또 평화를 만들려면 여러 상황에 평화의 대응을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세상에는 상대가 폭력적 태도를 보이면 나도 그렇게 대하고,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똑같이 혹은 그 이상으로 대응합니다. 그가 불친절하면 나도 불친절하고 그가 거칠면 나도 거칠게 대응하는 그런 조건반사적 대응이 반복되면 그것은 점점 있던 평화도 금이 가게 하고 마침내 무너지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세계 전쟁을 지켜봤던 심리학자 칼 융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고 적절한 조건이 유지되면, 통제할 수 없는 연쇄 작용이 진행된다. 대체로 이들은 대부분 우리처럼 선량한 사람들이다. 엄밀히 말해 약탈과 방화 강간과 고문을 하겠다고 선택하거나 이를 은밀히 즐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불안하게 얕은 잠에 빠져 있던 그들 속의 짐승이 깨어났을 뿐이다. 잔인한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동기는 자기 방어와 정의였다. 그러나 타자 안에 있던 짐승이 그들 안에 있던 짐승을 격노하게 했다. 그것을 제어하던 도덕적 장벽이 무너지자 이 짐승은 복수에 나섰다. 악에 저항하면서 그들은 악이 놓은 덫에 걸렸다.”(칼 구스타프 융, "대재앙 직후”) 악에 대해 싸우려고 하다가 그가 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불친절에 불친절로, 대하는 태도를 보이고서는 결코 평화를 만들지 못합니다. 상대의 행동보다는 덜 불친절하고 덜 거칠게 반응함으로, 아니 주도적으로 먼저 평화의 방식을 보여줌으로 가다 보면 서서히 평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평화의 말
그런데 평화를 만드는 일은 말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벽이 있었는데 수천 년 된 증오의 높은 벽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속된 차별의 언어가 만든 벽이었습니다. 이방인을 ‘개’라고 부르는 비하의 언어, 상대를 악마화하는 언어, 상대를 꺾어 내리는 디스하는 언어, 이런 언어를 계속 사용하는 한 평화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언어를 바꾸는 일을 하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시고 사마리아인을 이웃이라고 부르시고 당시 무시의 대상이었던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그들이 천국에 갈 자라고 이름을 붙이셨고 여자에 대해서도 존대하는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독일과 일본의 차이 중에 독일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진심으로 잘못했다는 용서의 말을 하는데 매년 합니다. 그 용서와 평화의 언어 씨앗을 계속 심습니다. 그러다 보니 독일에 대해 용서하게 되고 평화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가볍게 유감이라는 말을 한번 하고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여깁니다. 한번 했으면 됐지, 그리고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합니다. 평화의 말을 계속 뿌리고 심어야 하는데 한두 번으로 그치고 신사에 절을 하니까, 피해당한 쪽과의 평화를 갖기가 매우 힘든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미안합니다’라는 평화의 씨를 심어야 하되 때로 계속 심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상대가 용서할 힘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평화의 씨를 심어야 평화가 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중에 <판단의 말>과 <공감의 말>.이 있습니다.
판단은 내가 기준이 되어 상대를 평가하는 말로, 그렇게 평가하는 판단의 말은 아주 겸손하게 상대의 형편을 알고 말하면 상대에 대한 충고가 되지만,그러나 마치 자신은 상대와 다르고, 자신은 상대를 판단할 자격을 가진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여기며 판단하면 이것은 판단의 말이 관계를 깨고 평화를 깨뜨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판단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1~3)
여기서 비판은 , 자기가 절대 기준이 되어 자기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때 상대도 상대의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헤아리는 일이 반복되면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를 만들려면 판단의 말이 아닌, 공감의 말을 하라고 합니다.
판단의 말은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함으로, 나는 너와 다름을 드러내어 나와 남을 갈라놓고, 친했던 사람들과의 관계까지도 깨뜨리지만, 공감의 말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너와 나를 보기에 상대방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자신도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더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 공감의 언어는 너와 나를 연결하고, 마침내 원수의 관계에도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원더>란 영화가 있습니다. 한번 보시면 좋습니다. 이 영화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해라.”(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이 말은 이 영화 전체에 흐르는 내용입니다. 이 말에서 옳음은 절대적 옳음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대적 옮음입니다. 영화에 여러 인물 중에 두 명이 주인공인데 한 명은 어기입니다, 기형의 얼굴로 태어나서 수 십 번의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그래서 얼굴 때문에 늘 집에서만 지내다가 드디어 학교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그 아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기고 피하곤 합니다. 그중에 한 반인 줄리안이란 아이는 어기의 얼굴을 보고 무시하는 판단의 언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학급 급우들이 어기의 얼굴을 보고 이해하고 공감하며 공감의 언어를 사용하고, 친구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마무리되는데, 그 마지막 대사가 이렇게 끝납니다. “ 부디 친절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힘든 싸움을 치르고 있으니까요. Be kind, for everyone is fighting a hard battle.” 자세히 보면 내가 판단하던 그도 나처럼 힘든 싸움을 싸우고 있으니, 부디 판단의 언어로 상대를 더 힘들게 하지 말고, 공감의 언어를 상대가 그 힘든 싸움을 잘 싸우도록 힘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 평화의 말을 하면 그 씨앗을 심으면 그것이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평화의 씨를 뿌리라
이렇게 평화의 씨를 심는 것은 소수의 영웅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란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나라 간에 일어난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사람들 사이의 불화, 주인공들인 나타샤와 피에르의 삶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서 벌어지는 '전쟁’까지 그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쟁에서 빠진 나라와 삶을 구해낸 것은 특별한 ‘영웅’이 아닌 평범하고 소박한 민중들에 있다는 것을 작품은 담습니다. 평화는 소수의 영웅만이 아닌 자기의 내면에서 평화를 만들고, 자기와의 관계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화의 씨를 뿌리는 것에서 있다는 메시지가 조용히 음악처럼 흐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영웅은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과 관계에 평화의 씨를 뿌리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참된 평화가 필요합니다. 가만히 기다리거나, 하나님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말고,
우리가 모두 일상 속에서 평화의 씨를 꾸준히 뿌리고 심을 때 평화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 일을 나부터 합시다, 그것을 아주 작은 행동과 말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 여기서 꾸준히 평화의 씨를 뿌리면 마침내 평화를 만들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 모두 평화가 깨어진 곳곳에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3년 11월 12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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