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느니라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믿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물건을 구매할 때나, 길에 다닐 때나, 치료할 때나, 만날 때나 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더더욱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사도신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하신 사역, 창조와 구원의 드라마를 믿는다고, 그리고 하나님과 그 드라마 안에 내가 있고, 나는 그 드라마의 일부이면서 그 드라마를 함께 써가고 있음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두 가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 하나님은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는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연이 아닌 창조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의 근원은 존재, 즉 있음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질문이 있지만 가장 근원적 질문은 왜 모든 것은, < 없지 않고, 있느냐>입니다. 왜 없지 않고 무엇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연구한 것을 존재론이라고 하는데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한 답은 <모든 것이 우연히 있다>는 답이고, 또 한 답은 <모든 있음은 순수 정신인 신에게서 유출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있음은, 있게 하신 분 때문이란 믿음입니다.
모든 있음은 스스로 있는 분에 의한 것이란 믿음,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듯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믿음, 이것이 창조에 대한 믿음입니다.
필요가 아닌 사랑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왜 창조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무슨 필요가 있을 때 무엇을 만드는데 하나님도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자신 안에 불충분한 어떤 것도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내적 결핍 때문에 무엇을 만들지 않으시고, 또 그것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창조했을까요?
하나님은 자신 안에 무한한 선, 자유, 사랑, 생명, 행복이 넘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피조물로부터 자기의 결핍된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조물에게 자기의 충만한 것을 나눠주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즉 필요가 아닌 사랑 때문에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조한 피조물은 부리고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랑에 대하여 사랑으로 응답하는 대상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합니다. 그래서 창조한 모든 것을 두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습니다.
두 단계와 긴 과정
세상을 사랑 때문에 창조했다면 어떻게 창조했을까요? 이것을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두 단계가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1~2)
최초의 상태를 혼돈과 공허란 두 단어로 설명합니다. 공허는 텅 빈 없을 무이고, 혼돈은 있는데 질서가 없는 무질서입니다. 먼저 무에서 유를 만들고, 그 유에 질서를 넣어 형태가 생깁니다.
창세기는 1장은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무엇으로 채워야 할 공간을 만들고
빛과 어둠을 나누어 우주란 공간을,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누어 하늘과 바다란 공간을,
바다와 육지를 나누어 채소와 나무가 있는 땅이란 공간을 만듭니다.
그다음 채워 넣습니다.
우주란 공간에, 해 달 별과 같은 발광체를,
하늘과 바다의 공간에, 새와 물고기를,
식물이 자라는 땅의 공간에 동물들과 인간이란 생명체를 채워 넣습니다.
이처럼 창조는 먼저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 생명체를 채워 넣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것이 6일간의 창조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두 단계와 6일간의 창조는 엄밀히 말하면 과학적 진술은 아닙니다. 고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한 것입니다. 요즘도 원자의 모형도나 DNA의 모형도를 둥근 공 모양으로 혹은 나선 모양으로 그려 사람이 알아듣게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창조는 그냥 되지 않고 엄청난 지혜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첫 부분이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창조를 이룬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능은 어떤 능력입니까? 우리는 전능이 일순간에 세상이 단번에 만드는 그런 능력으로 생각하지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천지를 만드신 그 전능은 일순간에 천지를 완성품으로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라,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이렇게 단계별로 아주 긴 시간 속에서 창조가 일어나게 하는 능력입니다.
창세기는 6일간의 창조라고 했지만, 이것은 문자적 6일이 아니라 날은 욤이라고 해서 아주 긴 시간을 의미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전능은 일순간이 아닌 ,긴 시간을 통해 단계별로 창조하시는 그런 능력입니다.
지속과 변화
이렇게 텅 빈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생명체가 채워지는 단계로 창조가 일어났는데,
그 창조는 그렇게 완결된 것일까요?
아니면 시작된 창조는 계속 지속되고 보존되고 좀 더 복잡한 형태로 발전해 가는 것일까요?
시작된 창조는 계속 지속됩니다. 하늘과 바다와 땅과 같은 생명체가 사는 공간의 환경은
일정한 법칙을 따라 같은 모습으로 오래 지속됩니다.
하늘 바다 땅이란 공간 속에 수많은 생명체가 사는데 그 생명도 오래 지속됩니다.
생명체는 생명이 생명을 낳으면서 지속합니다. 식물들은 씨를 통해서 계속 생명을 지속합니다.
“ 땅은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창세기 1:12).
동물들은 공중과 바다와 땅 위에서 새끼를 낳으면서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공간은 법칙을 따라 지속되고 공간 속의 생명체들은 생명을 낳으므로 지속됩니다.
그래서 창조는 시작된 고유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계속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시작하셨으면서 창조를 유지 보존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전능함
창조의 시작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가능했다면, 그 창조의 유지와 지속은 어떨까요? 저절로 굴러가는 것일까요? 유지와 지속에도 하나님의 권능이 필요할까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이 고백으로 창조의 시작만이 아닌 창조의 보존과 유지도 전능함으로 가능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창조 세계의 유지와 지속은 어떠한 전능으로 이루어질까요?
창조를 만든 하나님의 전능을 일순간 완성품이 눈앞에 나타나는 전능으로 생각하지만, 긴 시간 속에 단계적으로 생겨나게 하는 전능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은 혼자서 알아서 다 하는 전능이라고 생각하지만, 창조를 유지하는 전능은 그런 전능이 아닙니다.
‘전능한 하나님’에서 ‘전능한’이란 형용사는 헬라어에는 있지만, 고대 히브리어는 없습니다. 히브리어는 형용사가 아닌 명사 두 개를 붙여 사용합니다.예를 들면 ‘용감한 사람’을 “용기의 아들”로 씁니다.
바나바란 이름은 ‘바’는 아들, ‘나바’가 위로, 즉 “위로의 아들”입니다.
친절한 사람이 아닌 친절의 아들, 이런 식으로 부른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헬라어로 “전능한”이란 형용사를 사용했습니다. “판 크라토”입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능력이 많으신, 이런 뜻입니다. 구약 히브리 표현은 전능한 이란 형용사가 아닌 ‘만군’과 ‘여호와’란 두 명사를 결합하여 ‘만군의 여호와’라고 씁니다. ‘만군의 여호와’란 표현이 구약에 285회 나오는데, 그 의미는 만군 즉 ‘천군 천사’를 뜻대로 부리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혼자 모든 것을 척척 이루는 전능함보다는 만군을 능히 부림으로 뜻을 이루는 전능입니다. 수많은 천군천사에게 힘과 권한을 부여하여 그들이 주어진 힘을 사용하는데, 그 힘을 합해서 뜻을 이루게 하는 그런 능력이 전능함입니다. 유능한 리더는 혼자서 다 하지 않고 많은 부하에게 은사를 따라 적절한 권한을 주고 그들의 능력들이 합해져서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힘을 혼자서 다 가지고 혼자서 이루는 그런 전능이 아니라, 그 힘을 수많은 이들에게 나눠주고 그 힘을 가진 이를 살리고, 또 그 힘들이 합해져서 뜻을 이루는 그런 전능입니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창세기 1:11). 하나님이 땅도 창조하고 땅 위의 모든 채소와 나무도 창조하셨고 앞으로도 혼자서 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게 종류대로 채소와 과일을 내라고 명령하고 그런 힘을 부여합니다. 그러면 땅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함으로 채소와 나무를 내는 창조의 도구가 됩니다.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미와 새끼를 함께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미를 창조하면 어미가 새끼를 낳게 함으로 창조가 유지되게 합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권한을 위임하여 다스리게 함으로 인간이 창조의 지속하는 도구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함께 하시는 능력이고 조화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전능자가 위임하고 피조물을 높이는 사랑의 전능입니다.
창조와 생명 변화
그래서 땅도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창조되었지만, 단순히 수동적으로 창조된 대상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창조된 피조물들은 , 하나님의 창조가 지속되게 하는 데, 참여하면서 땅은 땅답고 바다는 바다답고 각 생명체는 그 생명체답게 되고, 이 모든 것들이 합해서 창조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창조는 계속 지속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속되는 창조는 처음 모습과 영원히 항상 동일할까요? 하늘과 바다와 땅이란 물리적 공간은 긴 시간 속에서 별 변화가 없겠지만, 그 안에서 생산하고 번식하는 생명체는 어떨까요? 영원히 똑같이 존재하면서 어떤 변화도 없을까요?
일찍이 성 어거스틴은 창세기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잠재적인 씨앗이 심긴 세상으로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시간 속에서 그 씨앗들이 싹트면서 창조 질서가 처음 모양보다 더 복잡하게 발전하게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창조는 처음 모습 그대로 영원히 똑같은 것이 아닌, 더 풍성하고 복잡한 생명의 형태들이 나올 수 있는 우주로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 속에서 창조물의 변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것도 창조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모습을 보고 진화론은 우연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창조를, 학교에서는 진화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갈등을 겪는데, 성경의 창조를 바로 알면 사실 갈등할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창조가, 진화가 말하는 생명현상을 포함하며 무신론적 진화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창조는 진화를 품고 초월하는 더 큰 우산이고 더 큰 개념입니다.
진화주의를 넘어서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이 우연히 있지 않고 창조된 것이며, 그 창조는 하나님의 전능으로 시작되고 유지되고 있음을 믿는데, 이런 창조신앙을 갖고 산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 창조의 원리와 정신을 바로 알고 사는 것입니다. 창조를 믿는다는 것을 창세기 1장에 나타난 내용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창조가 실제 6일 만에 이루어졌고, 지구의 역사는 성경 속 인물의 수명을 계산한 6천 년이라고 믿는 것이 창조를 믿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과학책이 아닙니다. 성경 창세기는 4천 년 전 언어의 한계 안에서 기록하면서 창조의 목적과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창조를 믿는 것을 진화론 내용의 전부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진화론의 무신론은 반대해야 하지만, 그 안에서 종 안의 생명 변화 과정까지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변화는 창조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존재 속의 생명들이 낳고 번식함을 통해 필요한 변화를 갖게 했다고 하면 그런 생명의 변화현상은 창조의 과정에 포함됩니다. 큰 그림에서 창조론이 진화론을 포함하는 큰 우산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은 문자적 창조론을 지지하거나 진화론의 모든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창조의 원리를 왜곡한 진화주의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자연 생명현상 속에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모습을 볼때, 이것만 보면 매우 잔인하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이것은 사슴의 개체수 조절을 통해 호랑이도 사슴도 함께 살리는 생태계 먹이사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작은 그림만 보고 이것은 인간사회에도 적용할 자연의 원리라고 주장하면서 강자의 약자 지배는 정당하게 여기는 사회적 진화주의가 문제입니다. 자연에서 사자는 사슴을 한 마리 먹으면 족한데, 인간사회에서는 강자 인간 사자는 약자 인간 사슴 수백 마리 잡아 버립니다. 창조주를 믿는 것은 창조의 원리를 바로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창조를 통해 창조주를
또 창조주를 믿고 산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존재를 바르게 보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피조물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이 있습니다. 일부 나라에서 그런 식으로 봅니다. 이것은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는 아예 모든 것들을 아예 물질로만 여깁니다. 심지어 인간의 정신 현상까지도 다 물질현상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의 <새벽출정호의 항해> 편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유스터스란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 세계에서 별은 그냥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가스 덩어리이거든요!” 그러자 라만두란 인물이 말합니다. “ 얘야, 사실 너희 세계에서도 별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가 곧 별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란다. ” (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물질주의는 별을 거대한 가스 덩어리로 볼뿐, 별에 대한 경이감도 없고 당연히 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별은 가스 덩어리고 무지개는 빛의 반사가 전부인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저 우연히 존재하다 사라지는 창백한 세계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 왕이 손에 닿는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순식간에 엄청난 부자가 되는데, 바로 그 손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딸도 죽은 금덩어리로 바꾸고 맙니다.
물질주의는 세상 모든 것을 단순한 물질로만 보면서 자연을 착취하며 부자가 되었는데, 그 과정은 지식이란 손과 개발이란 손으로 모든 것에 닿으면서 다 생명 없는 물체가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 인간 자신마저도 죽은 물체로 바뀝니다.
별이 '가스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보는 물질주의 세계에서 인간도 결국 단백질 덩어리로 여겨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알던 인간이 폐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물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이나 모든 것을 물질로만 보는 물질주의, 둘을 다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인간'을 구할 수 있습니다.
창조신앙은 그것을 넘어서게 합니다. 창조신앙은 피조물을 신으로 보지도 않지만, 무의미한 물질만으로도 보지 않습니다. 모든 창조물은 예술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솜씨가 있고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창조물은 그 너머 예술가 하나님을 보는 창문입니다. 꽃이란 창문, 나무란 창문, 인간이란 창문을 통해 창조주를 봅니다.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편 19:1).
우리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볼 때 그 너머 하나님을 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리고 사람을 볼 때도 부하고 가난하고 등의 외모를 넘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봐야 세상은 아름답게 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재창조
우리가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창조신앙은 또 무엇을 믿고 사는 것입니까?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지금도 창조를 일으키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창조란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은 창세기가 아닌 이사야서입니다. 창세기에 여섯 번 나오는 창조란 단어가 이사야에 무려 열일곱 번 나옵니다. 바벨론에 멸망당할 당시의 유다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흑암과 절망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유가 무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주전 5세기경 칠흑 같은 어둠에 갇혀 있던 그분의 백성을 위해 '창조'라는 단어를 선지자의 입에 담아 주셨습니다.
그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입니다. 나라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그 없음 속에서 다시 있음을 꿈꾸게 합니다. 회복 정도가 아닌 창조란 단어를 입에 담게 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창조신앙을 말합니다. “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로마서 4:17)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없음 속에 있음을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믿는 것은 유에서 무로 만들 수 있음을 알고 겸손하기, 무에서 유가 생길 수 있음을 알고 절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도 있지만 망가져 버리게 된 것을 다시 창조하는 재창조도 있습니다. 요셉의 10여 년, 13년은 그런 계속 망가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는 것마다 제대로 안 되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꿈을 꾸고 희망에 부풀었는데 형한테 미움받아서 구덩이에 던져져서 노예 상인들에게 팔려 갑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성실하게 종으로 일했는데 애매하게 성폭행범으로 몰려 감옥에 가게 됩니다. 감옥에서도 매우 성실하게 지냈고 갇힌 죄수에게 좋은 일을 해줬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로는 다 잊히고 맙니다.
정말 그 세월은 추락만 경험하는 시간, 구겨진 종잇장과 같이 되어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망가진 시간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재창조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고, 형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고, 형들을 용서하게 되고, 형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도록 만듭니다. 대반전의 재창조가 있게 됩니다.
창조신앙을 갖는 것은 모든 것이 창조주의 손에 들리면, 재창조를 위한 재료가 될 수 있음을 믿는 것,
그래서 모든 상황 속에서 결코 낙망하지 않는 소망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매주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정말 그렇게 믿고 살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고백을 드리면서, 주여, 세상은 강자의 약자 지배를 정당화하는 진화주의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상호 공존의 창조 원리가 회복되는 사회가 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삽시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주여, 세상은 하나님 지으신 모든 창조물을 보면서 물질 그 이상을 보지 못하나,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통해 주님을 찬양하며 살게 하소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주여, 하나님의 창조는 지금 여기에서도 가능함을 믿고 살게 하소서. 내 실패, 내 아픔, 내 과거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손에서는 재창조가 됨을 믿고 낙망하지 않고 절대 소망을 갖고 살게 하소서
2024년 1월28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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