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 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저는 금년 초 노회가 주관하는 성경의 땅 연수프로그램으로 이스라엘을 다녀왔습니다.
하루는 갈릴리지역에서, 저녁 시간에 모여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데,
현지 아가씨 2명과 아주머니 한분이 다가 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분들은 바로 BTS를 아느냐고 물어, 안다고 답했더니 ,
마치 우리가 BTS인것처럼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우리가 어떤 나라에 속한 사람인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 나라에 속한 것보다 내가 어떤 가족에 속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국민이 나라의 혜택을 많이 받는 것 이상으로, 자녀가 아버지에게 속한 좋고 많은 것들을 이어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그것으로 인해 받는 은혜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걸까요?
내가 원하면 그냥 되는 것이고, 아니면 내가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는 어떤 길을 만드셨습니까?
영접함
요한복음을 신약의 창세기라고도 하는데,
창조 이야기에서 시작하며 이 세상이 어떻게 생명이 살 수 있는 시공간이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최초의 상태를 창세기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2)
존재의 최초 상태가 공허와 혼돈인데 그것이 짙은 어둠이란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떻게 생명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됩니까?
혼돈과 공허를 향해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단계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생명의 공간이 됩니다. 혼돈과 공허 속에 존재와 질서를 넣으신 것이요, 흑암에 빛이 비췬 것입니다.
말씀은 ‘문이 열려 있다’는 상황 서술의 기능만이 아닌
‘문을 열라’는 권위자의 말이 문을 열게 만드는 상황을 바꾸는 기능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창조와 상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즉 태초의 어둠이 말씀의 빛을 받아들임으로,
공허와 혼돈이 생명이 살 수 있는 존재와 질서의 생명의 공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지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빛을 끄지 못했다, 이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빛과 질서가 공허와 혼돈의 어둠을 이기고 생명 시공간으로 바꾼 것입니다.
어둠이 빛을 영접하듯, 천지가 창조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생명의 땅이 된 것입니다.
세상이 물리적 빛과 질서로 인해서 생명공간이 되었지만,
사람은 그런 공간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에 영적 빛과 도덕적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빵만이 아닌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기에, 말씀의 빛이 있어야 참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리적 빛만이 아닌 또 다른 빛 즉 참 빛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리적 빛을 받고 살던 인간은 그 참 빛을 받아들였을까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10)
이 구절의 ‘세상’은 물질세계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창조된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닌, 하나님을 주로 섬기지 않고 거부했다는 의미입니다.
선악과 사건에서 보듯이, 로마서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말씀처럼
자기가 주인이 되는 삶을 선택하고 산 것입니다.
태양 빛을 암막커튼으로 차단하고 전기불만으로 사는 것처럼,
그 전기불이 참 빛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산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다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유대인들은
그들의 땅에 오신 메시아, 그 빛에 대해서 어떻게 했을까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그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그들의 땅이 비친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그들도 깊은 종교적 어둠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의 어둠이 빛을 받아들임으로 생명공간이 되었지만,
인간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여전히 어둠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리적 빛을 받으려고 집의 창문은 열지만, 참 빛을 받으려고 마음의 창문은 열지 않고 있으니
대낮을 살지만 어둠 속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삶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존재로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유대인이 이러한 상황 속에 있지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영접하면 빛을 영접한 어둠이 생명 공간이 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 1:12)
요한복음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이란 두 명칭을 통해서 두 부류의 사람을 구분합니다.
참 빛을 거부하는 이들을 유대인이라고
참 빛을 받는 이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한 나라의 국호이지만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참 빛을 거부하던 인간 야곱이 참 빛을 받아들인 존재가 되었을 때,
즉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참 빛을 영접함으로 됩니다.
어떻게 참 이스라엘이 됩니까? 하나님을 주로 모실 때 영적 참 이스라엘이 됩니다.
독생자를 영접함
물리적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듯 영적 어둠인 인간이 참 빛을 영접해야 하는데 그 참 빛은 어떤 빛입니까?
종교적 빛이나 지혜의 빛일까요? 그런 빛 이상입니다. 사실 그런 정도의 빛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영적 깊은 어둠을 물리치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참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은 어떤 빛일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 1:14)
그 빛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신 말씀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신데 이분에게서 영광의 빛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분의 빛을 ‘봅니다’ (본문의 ‘본다’는 것은 ‘자세히 본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빛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의 빛이었습니다. ‘독생자’를 ‘하나 뿐인 독자’ ‘외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의미는 ‘하나뿐’이란 의미보다는 아버지와 ‘같은 신성을 가진 존재’란 의미입니다. 원어가 ‘모노게네스’인데 ‘모노’(유일한, 독특한)과 ‘게네스’(‘존재하는, 태어난’)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으니 하나님이면서 인간이시고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같은 신성’이면서 사람과 ‘같은 인성’을 가지신 독특하고 유일한 분이란 의미입니다.
은혜와 진리
이런 독생자가 영광의 빛을 발합니다. 그 빛을 자세히 보고 분광기를 통과시켜 보니 두 가지 빛깔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은혜와 진리의 빛입니다. 독생자의 생애를 봐도 은혜와 진리의 두 빛이 찬란하고 충만히 발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많은 일들은 두 가지의 빛깔을 가지는데 하나는 진리요 하나는 은혜입니다. 비유로 가르치셨고 바리새인들과 변론하시며 진리의 빛을 발하셨을 뿐 아니라,
병자를 치유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시는 등 은혜의 빛도 발하셨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은 진리의 밝음이요 은혜의 온기였습니다.
독생자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경우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법에 의하면 그런 죄는 돌로 쳐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돌을 들고 심판자로 그녀 곁에 둘러 섰습니다.
죄를 드러내는 진리의 기능이 필요한데, 그 결론은 오직 심판과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있었고, 그녀를 향해 남자들이 주로 돌을 들었습니다.
주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자, 다 물러갔습니다.
죄를 정죄하는 진리 하나만 있으면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여자에게 돌을 든 모든 사람들 역시 진리 앞에서 돌을 맞는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없는 진리는 온전한 답이 아닙니다.
당시와 우리 나라의 법이 달라서, 2015년 간통죄가 성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사생활 침해 금지의 이유로 폐지되었습니다. 서로 동의한 경우는 죄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도 그녀에게 정죄의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의 기준을 낮추게 되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은밀히 그런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수많은 가정이 고통을 겪게 될 것이며, 그 사람 자신도 건전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없는 은혜도 역시 답이 아닙니다. 은혜가 없는 진리나 진리가 없는 은혜가 아닌 은혜와 진리가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논리적 모순이기에 둘을 함께 연결하려면 둘을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시면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면서 진리도 세우셨습니다. 어떻게 죄를 죄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죄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은혜와 진리가 하나로 연결시키는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막과 십자가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독특하고 유일하게 존재하는 독생자가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모습을 요한복음은 성막에 비유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성막에)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 1:14)
본문의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이 원어로 ‘장막을 치다,’ ‘성막을 세우다’는 뜻입니다.
독생자로 이 세상에 오신 모습이 광야에 성막을 세운 것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먼저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땅의 어디에 머물러야 격에 맞을까요?
하늘의 하늘도 마땅치 않지만 작은 텐트를 거처로 삼고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시는 것도 낮아지심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것을 예표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왕이나 귀족이 아닌 가난한 나사렛 사람이 되었으니
실로 하나님이 텐트에 머무시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심을 성막에 비유한 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성막에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제사를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는 죄에 대한 심판(죽음)이고 또 하나는 죄인에 대한 용서입니다.
즉 진리와 은혜가 동시에 일어난 것입니다.
성막의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안에 언약문서인 십계명이 들어 있고,
그 언약궤를 덮는 뚜껑을 시은좌 즉 은혜를 베푸는 좌소라고 부릅니다.
매년 그 시은좌에 양의 피를 뿌립니다. 이럴 때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하나는 죄에 대한 심판이고 또 하나는 죄인에 대한 용서입니다.
즉 진리와 은혜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성막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한 분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이분은 사람이지만 사람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유일하게 가지신 분입니다.
바로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것은 성막에서 양을 제사로 바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성막에서는 양들에게 내려졌다면,
십자가에서는 독생자에게 내립니다.
둘째, 죄인에 대한 은혜입니다. 성막에서는 양이 죽고 헌제자가 살았다면,
십자가에선 그분이 죽고 죄인인 우리가 삽니다.
죄는 심판한다는 진리와 죄인을 살린다는 은혜는 논리적으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신 죽는 대속적 희생이 있다면 은혜와 진리가 함께 연결됩니다. 그 연결고리가 대신 죽은 양입니다. 독생자가 대신 죽으시는 어린양이 되심으로, 죄는 정죄받고 죄인은 용서받아. 그 결과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 에드먼드가 죄를 지어 그 나라의 법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사자 아슬란이 에드먼드를 대신하여 겨울 마녀에 의해 죽는 어린 양이 됨으로 죄인 에드먼드가 살고 나니아 나라의 법이 세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은혜와 진리를 하나로 연결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가져오신 독생자를 이렇게 영원토록 노래합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시록 5:12).
진리의 사자가 죽임을 당한 은혜의 어린 양이 되었으므로 죄를 처리하고 죄인을 살리는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
우리가 얻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맘만 먹으면 됩니까? 내가 자녀가 되겠다고 허락하면 하나님이 무조건 나를 받아 줍니까?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 편에서는 죄인인 우리를 영접해주시는 것입니다.
탕자 편에서는 멀리서 달려오는 아버지를 영접하지만 사실 아버지가 탕자를 먼저 품에 안는 것입니다.
탕자는 그냥 안기면 되지만, 하나님 편에서 재산과 명예를 다 잃어버리는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아버지가 탕자와 같은 우리를 그냥 품에 안으신 것이 아니라,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맞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은혜와 진리를 결합시키지 못합니다.
자기 힘과 자기 공로와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자력구원을 말하는 모든 종교는 은혜가 없는 진리를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자기 선행으로 갚아야 하는 카르마의 법만이 있습니다.
또 세상은 진리가 없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사는 나의 자유를 삶의 목표로 여기며 사는 비종교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은혜가 없는 진리나 진리가 없는 은혜에는 구원이 없고 은혜와 진리가 결합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죄인의 죄를 대신 지는 어린 양이란 연결고리가 반드시 있어야만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질 자격을 가진 분이 어디에 있으며,
또 그런 자격이 있다고 해도 그럴 마음을 갖고 실제 행한 분이 누구입니까?
오직 독생자 예수님만이 십자가를 통해 은혜와 진리를 하나로 연결시켰고,
죄를 정죄하고 죄인을 살렸습니다. 그 결과 탕자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의 이유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유대인들도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와 진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는 생물학적으로 신성을 지닌 신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의 첫 모습은 구약의 아담, 아버지의 세상을 다스릴 아들의 특권을 가졌으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다스려야 하는 의무도 동시에 가진 존재입니다.
둘째 모습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에게 선택되었고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불리웠으면서,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줄 의무도 가진 존재입니다.
셋째 완전한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누리는 특권과 함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의무를 동시에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보여줄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요약하면 진리와 은혜의 삶입니다.
은혜와 진리 둘 다는 붙드는 모습이 하나님이 찾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종종 하나를 붙잡고 하나는 놓칩니다.
남에 대해 진리를 적용하고 자기에 대해서는 은혜를 적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법이요’라고 하면서 진리를 대고,
자기에 대해서는 ‘은혜로 합시다’고 하면서 넘어갑니다.
이렇게 진리와 은혜가 분리되면 타인에 대한 용서에는 매우 인색하고 자기는 쉽게 용서거나, 타인의 드러난 모습은 보면서 자기의 진짜 모습은 보지 못한 자기 의에 빠진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며 기준을 무너지게 하는 무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진리와 은혜를 동시에 붙들어야 하는데,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기 쪽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진리는 먼저 자기에 대해 더 많이 적용하고
은혜는 먼저 타인에게 더 많이 적용해야 은혜와 진리의 균형을 좀 더 갖게 됩니다.
그러면 남의 죄를 보면서 자기 죄도 봅니다. 남의 상황을 보면서 타인의 형편도 더 이해하게 됩니다.
내게 먼저 진리를 적용하고 남에게 은혜를 먼저 적용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사람이고, 이것이 우리가 작은 희생의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은혜와 진리는 하나로 연결시키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이 찾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레 미제라블>에서 은혜 없는 진리만 붙드는 자베르란 인물이 아니라,
진리 없이 은혜만 붙드는 자기 맘대로 사는 여러 인물들이 아니라,
밀리에르 신부나 장발장과 같이 자기에게 먼저 진리를,
남에게 먼저 은혜를 적용함으로 은혜와 진리를 동시에 붙든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생자의 은혜와 진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는 은혜와 진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은혜와 진리의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023년 9월17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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