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공주의 치마자락.

평강공주의 시집살이.......[3]해마다 굵어지는 나무처럼

왕언니 2003. 9. 30. 18:33

사실 우리 친정에선 일을 안해보고 자란 내가,
그 가난한집 맏며느리 노릇을 어떻게 하나
속으로 퍽 걱정을 하고 계셨다.
아마 사흘도리로 전화해서
고되다고 찔찔 짜거나,
엄마에게 시집흉을 디립다 볼거라고 예상했을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몇시간 차를 타고 가야하는 먼곳에 시집간것처럼
찍소리도 안하고 잘 버텼다.
잘난척 거들먹거리며 잘나가던 시뉘가,
반대하던 가난한 집에 시집 가더니 꼴 좋다하고 새언니가 박수를 칠까봐 두려웠고,
우리 엄마 속아플까봐,
내가 한 선택이 최상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내가 시집살이를 잘 할 수 있는건 아니었다.
우리 어머님이 아니면 나는 ,
알고 보니 너무나 무미건조하고,멋대가리 없는 남편만 믿고
그렇게 열심히 시집살이를 할 수는 없었을게다.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있는 집 딸 티안내고,배운여자 티 안내고 ,일 안해본여자 티 안내고...
그렇게 꾀 안부리고 온몸을 던져 일하는 내가 기특해선지,
첫월급을 받던날 [그러니까 결혼한지보름만에]
시어머니는 내게 全權을 이양하셨다.

<아녜요 .저흰 용돈 타서 쓰는게 좋아요.>
<아니다 배운 니가 나보다 낫지...니 남편이 번돈이니 니가 살림해라>
그렇게 해서 옥신 각신 봉투가 왔다갔다 했지만 결국 봉투는 내손에 남겨졌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내리사랑이지 치 사랑은 없다,
윗사람이 먼저 덮어주지 않으면 고부간의 화목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 시어머님의 그 지혜로운 결단이 날 더욱 헌신적인 며느리가 되게 했다.
<그집에 새사람 잘들어와 갈수록 집이 훤해지네>
시부모님은 은근히 그런 소문이 나길 바라셨고 ,눈치빠른 내가 그 심중을 모를리 없다.

우선 코앞에 피할 수 없는 압력으로 다가온 집들이를 위해,
시내의 요리학원[요리기구를 사면 공짜]에 나가
초 스피드로 잔치용 음식 몇가지를 배운후,
집에서 놀고 있는 시뉘 둘을 용돈주어 도우미시켜 멋지게 잔치를 끝냈다.
지점에선 대체방부부1호[사내 커플을 은행에선 그렇게 부른다...
금액변동없이 다른 계정으로 이동하는 전표끼리 나란히 붙여 對替榜을 찍는다.]인 우리가 ,
아니 부잣집딸 멋쟁이 미쓰리가 시골집 같은 그 집에서 어떻게 사나 왕 궁금이었던 것이었다.

지점 식구들에 이어 이튿날은 조금 남은 재료를 밑받침 삼아 친정식구들도 치뤘는데 ,
연거푸 치르면서도 지치지 않고
홈드레스 예쁘게 입고,좁고 불편한 집이지만 밝은 얼굴로 ,
조금도 기죽지 않고 잘 지내는것 같아 모두들 의외지만 안심했다 했다.

엄마를 닮아 음식엔 소질이 있는지 ,처음 만든,탕수육,잡채,샐러드,모듬전,새우튀김,깐풍기들이 알뜰하게 다 팔렸다.
<아이구 아까운 따님 잘 키워 우리집에 주셔서 고맙습니다>
<복뎅이예요. 복뎅이>
우리 시부모님의 극찬에 엄마 아빠도 입이 함박만 해지셨다.
<일이라곤 하나도 안하고 큰것이...어떻게 실수는 안하는지 모르겠읍니다>
아이구 듣기만 해도 교양이 철철 넘치고 화기애애한 인사들이 오고가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래서 잘한다 잘한다 하면 행주에 풀먹이고,
행주로 소망간[전라도 농가에서 거름용으로 소변만 따로 받아두는 커다란 항아리]닦는다 하나보다.

그다음 이벤트는 식구들 생일챙기기.
친정에선 누구의 생일이 됐건 ,
며칠전부터 선물을 사고,팥시루떡은 물론 여러가지 별식을 해서
당사자뿐 아니라 식구들 모두 흐믓하게 지내는 생일이,
시집에선 고기도 안 넣은 미역국 한사발로
겨우 아,누구 생일인가보다 하며 지내는거였다.

나는 시아버님생신까지 설 밑이라고
적당히 떡도 안하고 지나가는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요리학원에서 배운솜씨로
무지개떡에 불고기에 조기 굽고 동태전 부치고,
한겨울에 겉절이까지 하여 예쁘게 포장한 선물 얹어 드리니...모두들 감격 감격.

그동안 딸년들이라고 푸대접받던
시뉘,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된 시동생 생일까지,
친구들을 불러 먹이니 어찌 내편이 안되고 배기랴.

그 다음 사업은 그때 한창 전국을 휩쓸고 있던< 새마을 사업>?
길보다 마당이 낮아 항상 지나가는 사람의 눈요기가 되는게 너무 싫어,
나는 구멍 숭숭 뚫린 싸리울타리를 시멘벽돌담으로 좀 높여 바꾸고,
비만 오면 질척거리는 마당을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시어머님은< 세멘공구리>하면
여름엔 더웁다고 좀 못마땅하신 표정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셨다.
내친김에 장독대자리에 목욕탕을 만들고
그 슬라브지붕위에 장독대를 만들었고,
부엌 아궁이도 한쪽은 연탄을 땔 수 있게 하고
허리가 덜 아프게 높이도 좀 높여 ,반 입식으로 만들었고,
공사장에서 아버님이 주워온 타일조각까지 이리저리 땜질을 해 놓으니 정말 그럴듯한 부엌이 되었다.

그다음 사업은 시뉘 시동생 교육사업...
남편 위로 결혼한 누이 말고 시뉘가 셋 있었는데 ,
그중 둘이 가난한 집에서 장남 하나 <성공>시키려고 희생양이 되었다고
<오빠 때문에 제때 학교 못가서 좋은데 시집도 못가고 팔짜가 요모양 요꼴>이라는 넉두리를 두고 두고 하여 내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둘째 시뉘를 양재학원에 보냈다.
나이가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나이가 된데다 챙피해서 학교 가기 싫다기에
어쨌던 집에서 노는것보단 무언가 배워두는게 좋을것 같아서 였다.

세째시뉘는 그때 야간고등학교엘 다니고 있었는데.
[ 18살이나 되어 대낮에 다니긴 싫다했다.]
나중에 또고모란 별명으로 불린 이 시뉘는 여러모로 내 속을 썩였는데...
공부 열심히 해서 교육대학에 붙으면 끝까지 뒤를 봐주겠다 약속을 했다.
막내 시뉘는 중3이었는데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
그녀에게도 열심히만 하면 뒤를 봐주겠노라 했다.

다음은 막내 이자 하나밖에 없는 시동생,...
나는 우린 돈이 없으니 어떻게든 국립대학을 가라.
가기만하면 대학원까지라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
이 시동생만 약속대로 서울대 약대에 붙어 대학4년에 대학원2년을
아르바이트 한번 안하고 ,내가 다 먹이고 입히고 용돈주어 졸업을 시켰다.


솔직히 은행대리가,다른 직종에 비해 월급이 좀 많다고는해도,
여덟이나 되는 식구들이 오로지 남편 한사람의 수입으로
쌀을 제외한 모든것을 해결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시집에 살던 2년 반동안 정말 나를 위해선 양말 한켤레 사지않았고 피나게 모은 돈을 식구들 위해 썼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잘 사는 친정 도움을 좀 받지 않았나 오해 하기도 했는데 ,
나는 오히려 여봐란듯 잘 살고 싶어
꿈에라도 아쉰소리 안하고,
친정 갈 때면 예쁘게 화장하고
결혼할때 해왔던 비싼옷 입고 비싼 과일 사들고 갔었다.
우리 엄마는 가난한집에 갔어도
우리 시부모님 말씀대로 복뎅이라 살림 잘 일구고 대우받고 산다고 ,
우리 새언니께 은근히 뻐기셨다.

이 모든것들 위에 남편에 대한 사랑만 더해진다면
정말 나는 성공적인 결혼이었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서부개척자,혹은 평강공주,혹은 새마을 운동가같은 사명감만으로
이 모든 일에 열심이었지,남편에 대한 사랑은 그냥 그랬다.

아니 결혼전에 알지 못했던,
나와 너무도 다른 여러가지가 나를 괴롭게 했다.
문학의,문짜도 부르조아의 사치쯤으로 여긴다든지,
등산이나 낚시 같은 건전 스포츠대신,
당구나 고스톱치는걸 더 좋아한다든지,
일년동안 책한권도 안 읽는다든지...
통금시간이 다되도록 연락도 안하고 술이 떡이 되어 들어온다든지,
잡아논 고기에게 먹이줄까보냐 라고 생각하는지,
무슨 날이 되어도 선물이나 이벤트같은건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과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 잘나가던 미쓰리가 변두리 동네의 후줄근한 아줌마가 되어가는 꼴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저 나는 잘 얻은 며느리,잘 들어온 올케,형수로 만족하며 그렇게 나이먹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누군가의 충고를
너무 고지식하게 받아들인 결과였다.
겉으로야 무난해보이는 그속이
실은 끝없는 ,쉼없는 물갈퀴질로만 우아하게 떠있을 수 있는 백조와 같음을 누가 알았으랴.


산에 가보면,어쩌다 바위위에 뿌리박은 소나무를 본다.
물론 그자리에 떨어지고 싶은 씨가 어디 있으랴만,
오랜 세월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
해마다 굵어지는 나무를 본다.
비록 올곧게 쭉뻗은 몸매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운치와 멋이 있게 틀어져 올라간 가지를 보며...아아

,나는 서글픔과 자랑스러움을 동시에 맛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