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전 엄마의 회갑사진]
엄마... 이제 육신은 다만 한줌 흙으로 누워 계시는 엄마...
돌아가실 때 까지 어머니라고 불러본일이 없어
손자가 셋하고도 반이나 되는 오늘에도 당신은 여전히 엄마이십니다.
엄마!
엄마가 이세상에 나를 떨궈놓으신지 거짓말같이 60년이 흘러
엊그제 광복절날 저도, 드디어,마침내 , 회갑을 맞고야 말았답니다.
40살 이후의 삶을 한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사춘기쩍의 기억이 엄청 부끄럽지만
뻔뻔하게도 40년 하고도 20년이나 더 지나도록 살아 있습니다.
하룻밤 꿈같은 ,쏜 살같은 세월들을 보내고 어느덧 耳順을 맞고보니
80년 광주사태가 있기 한달전에 회갑이던 엄마생각이 제일 먼저 났습니다.
엄마 회갑날 , 아빠보다 한살 더먹은게 무슨 죄라고 ,
엄마는 아빠 회갑앞에 잔치를 할수없다고
진북동 집에서 그냥 우리끼리 밥만 해먹고 말자고 하셨지요.
[80년 4월, 진북동 집 거실에서 찍은 가족사진]
음력 삼월 그믐인데도 날은 어찌 그리 더웠는지
밤내 힘들게 만든 잡채가 다음날 아침에 보니 쉬어버렸잖아요.
그래도 우리딸들과 며느리들은 파란 고사치마에 연하늘 회장저고리를 똑같이 맞춰입고
[어차피 후년에 아버지때 쓸거니까] 절을 올렸지요.
엄마 말대로 일곱 새끼들이 또 새끼를 까?서 스무명이나 되는 자손들이 고물고물 절을 올릴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아버지의 쉴새없는 잔소리속에서 일곱쌍들의 獻壽가 끝나고 사진을 찍을때
엄마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요.
그때 서른 다섯이던 저도 ,25년이 지난 제 회갑날 , 엄마와 똑같이 땀을 줄줄 흘렸습니다.
그래도 그날 진북동 집 정원에는 엄마가 틈틈이 심은 색색의 철쭉들이 다투어 피어 꽃대궐같았고
딸과 손녀들의 삼색 색동저고리로 더욱 아름다웠지요.
[엄마의 손녀들 . 지금은 다 서른살이 넘은 애엄마들이지요.우측 두번째가 우리 딸]
엄마 ,만일 재작년 연말의 계획대로라면
저도 온나라가 광복60주년이라고 떠들석한 잔치를 벌이는 8.15일,
숨막히게 더웠던 그저께 이땅 어느한구석에서
남편도 대대적으로 하지못했던 회갑잔치를
출판 기념회를 핑계삼아, 적어도 어디 조촐한 음식점에서
억지춘향하듯, 못이긴척,은근슬쩍 회갑연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저께 저는 최근 몇년동안의 생일보다 오히려 제일 조용한 회갑을 보냈습니다.
칼럼독자들에게 책을 내면 보내드린다고 주소까지 받아놓고도 책을 만들지못해
요즘세상에 예순살 나이는 자랑꺼리 축에도 들지않아 위세떨며 잔치 할수도 없고
출판기념회로 얼버무리려 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간것이지요.
물론 제일 큰 이유는 아들딸에게 부담을 주지않고 내손으로 만들려했던것이
3천만원 사건으로 원칙수정이 불가피해진것도 있었지만
첫번째 독자가 되어야할 우리손자들이
활자화된 책을 읽고 감상을 말 할 만한 나이가,지금은 아직,결코, 아니라는 자각과
그렇다고 공인된 文人도 아닌것이,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도 아닌것이,
격변하는 한시대를 풍미하던 정치가도 결코 아닌것이
그냥 자연인으로 두루뭉실 나이만 먹은 한 여자가
단지 회갑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도 궁금하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잡문을 모아
또 한무더기의 값비싼 휴지를 만들 자격이 과연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모락모락 피어나서였습니다.
죄송해요.약속 안지키는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저 답지 않지요?
그래도 옛날 칼럼 닫기전 365명의 독자에게 한 약속이니
언젠가는,가까운 장래에 꼭 지킬거예요.
엄마도 지켜 봐주세요.
애들 후원으로 7월말에 금강산에 다녀왔으니 무슨 염치로 또 잔치를 해요.
그래도 주환이가 밥은 먹어야한대서 나리스시에서 애들식구와 삼촌네 식구만 모여 저녁먹었어요.
참 며느리 입덧 때문에 지난 수요일에는 유찬이를 데려왔는데
하룻밤 자더니 얼마나 엄마를 애절하게 부르는지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엄마는 그런꼴을 여섯번이나 보고도 씩씩하게 사셨는데....
나중에는 열이 나고 막 토하는 유찬이가 겁이나서 밤늦게 에미애비를 불러올렸지 뭐예요.
그래서 삼복더위속에서 사흘을 복닥거리다 그날 한차로 같이 갔었어요.
25년전 우리들은 일곱남매나 되었어도 , 그때 엄마아빠의 재력이 그 일곱남매를 모두 합한것보다 막강하실때라
제각기 회갑잔치에 바친 물질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요즘엔 어디 그래요?단 둘밖에 안되는 남매의 등골이 휘는것 같아
여행비 추렴말고도 명품핸드백을 주는 보화나 ,물경 50만원이나 저녁값으로 쓰는 주환이가 미안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더 놀란건 동서가 옷한벌 사입으라고 준 봉투였답니다.
식사 기도때 동서가
<지난 60년 세월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가정을 이끌어 오시고
또 믿음의 본을 보여주신 형님께 감사하며. 앞으로 남은 시간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도하는 제목들이 응답되고 형통케 되시기를 ...>하는 바람에 뭉클했는데
주일 아침에야 봉투를 열어보니 글쎄 백만원이 들어있지 뭐예요.
자식도 아닌 동서가,지금 약국 이전으로 목돈이 필요한 시점인데 그런 큰돈을 주다니...
전 뭔가 착각이지 싶어서 바로 전화하려 했지만 교회에 있을 시간이라 참고 참았다가
저녁때 집으로 오면서야 전화했어요.
그런데 그때 동서가 하는 말이 삼촌이 [시동생]이 <형수님은 그 돈 받을 자격 충분하다>고 드리라고 했대요.
전 그말을 듣고 그만 목이 메었어요.
삼촌이 열세살 되던 봄에 가난한 그집의 며느리가 되어, 위로 누나들 셋까지 가르치고 시집보내고,
삼촌의 운동화 빨고 도시락 싸주면서 18년간
서울대학에 대학원까지 가르치고 먹이고 입히고 용돈주어가며
어머님 대신 장가 보내어 지금은 어엿한 큰제약회사 이사까지 되었으니
최소한 제 식구만 아는 쌀쌀맞은 신식형수였다는 소리는 면할수 있겠지만
무심하고 비정한 요즘 세상에 옛날 은혜 돌에 새기는 사람들 어디 그리 흔한가요?
전 주일날 교회 가서 생일 감사헌금을 좀 많이 바치면서
비록 예수 몰랐던 새색씨 시절이었어도 제게 주어진 무거운 짐이던 여덟식구를 끌어안고
잘 참고 이겨낸것을 감사했어요.
엄마가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친정식구들 하나둘씩 끌어다 자립시키신것처럼
스스로 보람까지 느끼면서 말이에요.
지금은 저를 낳아준 친부모를, 잔소리한다고 때려죽이는 자식도 있는 무서운 세상이예요.
지루하고 질긴 삶을 이어갈지라도
최소한 행길에 몰래 내다 버리지 않는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할 지도 모르는데
누구에겐가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며 산것만도 감사해야 할 일 아니겠어요?
[88년 봄 시동생의 약혼식에 시어머니 역할을 했습니다.]
토요일밤에 거한 만찬을 먹었으니 주일 지나고 애들은 저희 집으로 가야했는데
굳이 진짜 생일 광복절 아침에 미역국 끓여드린다고 집에 와서 같이 잤습니다.
월요일 아침엔 5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가려는데 절반 못가서 비가 쏟아졌어요.
우산 없이 나섰던 우리부부는 할수없이 집으로 되돌아와 일찍 큐티를 했어요.
남편이 지금까지 자기집안을 위해 고생하며 건강하게 살아준게 고맙다고 기도하더군요.
회갑이라해도 싸구려 은반지 하나, 장미꽃한송이 사줄줄 모르고 지나가는 뻔뻔하고? 멋없는 남편이지만
그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더라구요.
하긴 스물 일곱에 시집와서 34년 동안
성글어진 흰머리,이마의 주름살,배꼽위의 삼겹살,굳은살 박힌 뒤꿈치까지...
보일것 안보일것 다 보이면서도 딴주머니 하나 차지 못하고 미련하게 뒤엉켜 살아버렸으니
이세상에서 이젠 나를 낳아주신 엄마보다도 나를 더 속속들이 아는 유일한 사람이 그사람 아니겠어요?
34년전 가짜 다이야몬드반지끼고 용감하게 결혼식 해주었던 이 평강공주가 또 한번 봐줘야지 어쩌겠어요.
회갑날 아침 입덧하는 며느리 대신 아들이 끓여준 조개미역국을 먹으면서
잘 걷지못한다고 다섯살 나를 큰집에 떨궈놓고 피난가시던 6.25때 말고는
결혼전까지 언제나 칠월 칠석 제생일 아침이면 항상 웃목에 星主床을 차려놓으시던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생일 아침 눈을 뜨면, 어김없이 제 머리맡에는 속미역국과,검은 돔부찰밥과 한되짜리 떡시루와,
반으로 자른 빨간수박과 참외,하얀 분이나는 검은 포도 한송이가
정화수 한 사발과 같이 놓여있던 둥근 칠기상이 있었지요.
그리고 비록 전쟁 직후였지만 생일날 하루만큼은 공주처럼 꾸며주시고 위해 주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엄마가 나에게
<네가 이세상에 내딸로 와준것이 소중하고 기쁜일>이라고 표현하신걸로 믿고 싶어요.
엄마는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 생일을 잊지 않으시고 그렇게 매번 살뜰하게 챙겨주셨건만
우리 일곱남매는 엄마 생신이 아빠생신 아흐레 앞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항상 아빠생신에 얹어 한날 우루루 몰려가 합동생신을 치뤄드리고는 했지요.
아니 돌아가시던 전해 마지막으로 딱 한번 엄마 생신날 전주 관광호텔에 모두 모인적이있었지요.
칵테일 잔으로 건배를 해드리니
일흔두살의 엄마가 어린애처럼 좋아하시던 생각이 나네요.
또 생일상을 물리고는 모두들 차를 몰고,나 시집가고 처음으로, 벚꽃이 눈처럼 휘날리던 全郡道路를 달렸는데
평생 꽃을 좋아하시던 엄마는 함박웃음을 웃으며 소녀처럼 좋아하셨지요.
생각 해보면 효도라는것이 거창한게 아니고 그런 조그만 정성으로 해결되는것을...
제 아이들이 철이들어 제맘을 헤아려주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이제서야 뒤늦게 깨달았답니다.
엄마 ,
지난주에 무려 98세를 살고 가신 어떤 권사의 시모님 장례식에 가서
정말 끝이 좋아야 다좋다는걸 실감했어요.
마지막에는 낡고 때묻고 비틀어진 족자처럼 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산 여생일지라도
잘 참고 봐준 가족들도 감사하고 ,죽을때 까지 노망나지 않고,
하나님 부인하지 않고 살아내신 그분도 감사했어요.
사람들이 다들 인생은 60부터라면서 회갑은 이제 새로 한살을 먹는거라 말하대요
지나간 60년이 비록 지워 버리고픈 잘못그린 그림이었다해도
이제 새로 그리며 시작할수 있는 뻔뻔한 구실이 생겼으니 얼마나 다행이예요?
엄마
60년전 제게 생명을 주신것을 감사합니다. 어른이 되도록 가르치고 시집보내주신것 고맙습니다.
그리고 짧지 않은 60년동안 비뚤어진 길로 가지 않고 ,
허망한것들에 목숨걸지않고 살아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4년전 가난한 시부모를 섬기도록 결국은 허락해 주신것도 감사하고
그 가난을 미워하지않고 시누이 시동생이 일가를 이루도록 도와가며 애쓰며 보람을 느끼게 해주신것도 감사하고
손발가락 온전하고 건강한 영육 가진 딸 아들주셔서
건강하고 평범하게 키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대한민국의 소시민을 만들어내게 해주신것도 감사합니다.
[93년 설날 세배를 드리고 나서 시아버님을 모시고 찍은 사진]
무엇보다 뒤늦게나마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섬기며
부족한것에서라도 감사꺼리를 찾아내는 지혜와 용기?와 기회를 주신것을 감사합니다.
엄마 ,제가 엄마옆으로 갈날이 언제일까요?
지나간 60년이 꿈같듯이 또 그렇게 꿈같은 몇해가 지나가겠지요?
저도 언제일지 모를 그날까지 어느 누구에겐가 희망과 기쁨을 주며
찬송부르고 하늘나라에 갈 그날까지
아름다운 끝을 준비하며 살도록 기도하고 싶습니다.
엄마 ,제가 마침내
60년을 살아냈어요.
[교회 유아부에서 공부중인 우리 유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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