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신부전증을 잃고 있는 어떤 분의 기도부탁 메일을 받았다.
아직 젊은데 얼마나 힘이 들까?
오늘 아침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하면서도
그병으로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서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젊고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있으니
하나님이 꼭 고쳐주시리라 믿는다.
나야 천해서 ? 그런지 자궁에 난소에 쓸개까지 떼어내고도
다행히 아직까지 파출부 한번 써보지 않고도 태권 V처럼 건강하지만
내나이때 우리 엄마는 참 오만가지 병을 다 앓았다.
신석증,담석증,당뇨,고혈압...
돌아가실때는 뜬금없이 낙상으로 입원하셨다가
필시 오랜 한약치료때문일것 같은 [중금속오염?]
신부전증이 되어, 배설이 잘 안되어 풍선처럼 부풀어 돌아가셨다.
얼마나 부었는지 입관할때 관 뚜겅이 잘 안닫혀 우리를 더욱 통곡하게 했다.
사람이 잘 먹는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잘 싸는것도 중요한데...
먹기는 하고 신장에 문제가 생겨 배설이 잘 안되면
그렇게 온몸에 독소가 퍼져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1983년 8월에 우리 시동생이 또 신부전증 이었었다.
시집오던 해에 막 중학교에 입학한 하나뿐인 시동생은
연로하신 부모님 대신 온가족의 실질적인 가장노릇을 하던 우리 내외에게는
17살에 낳은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 약대에 합격하여 상경한 후로
결혼시키던 88년까지 줄곧 우리가 보살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도시락을 두개씩 싸고, 입히고, 재우고, 학비에 용돈까지 주어 대학원까지 졸업시켰는데
대학원 졸업하고 군대에 가게되어,
그해에 6개월만 복무하는 학사장교를 뽑는
[대학원졸업생들만 혜택이 있었다] 영천 훈련소에 입소를 했는데
하필 그때가 7월 말로,해마다 여름엔 전국에서 제일 더운
대구 영천지방의 낮최고 온도가 38도가 되던 때였다.
우리는 7월31일 그날 전주 어머님을 만나서 무주 구천동으로 휴가를 가기로 하고
마악 출발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시동생이 훈련하는 부대의 위생병으로 있는 서울대 약대 후배인데
시동생이 훈련받다 연병장에서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건 단순히 쓰러진정도가 아니라 일사병인데
영천에서 치료를 할 수 없을정도로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더 기가 막힌것은,
원래 훈련중에 그런일이 생겨도 집에 알리지 않는것이 군법인데
후배인 자기가 딱해서 몰래 전화하는거라는 것이었다.
모르긴해도 그 무렵엔 그런식으로 ,<멋모르고 죽은>군인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우리집은 순식간에 초상집이 되어 당장에 휴가를 취소하고
[시어머님께는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은행에 갑작스런 일이생겨
휴가가 취소되었다고 전화했다.]
[사실 그 날은 이웅평씨가 군용기를 몰고 남하한 날이어서 하마터면 진짜 이산가족이 될뻔했다.]
남편은 영천 군병원으로 달려갔다.
운동이라고는 겨우 숨쉬기 운동이나하고 책상에서 공부만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지
그때 같이 쓰러진 훈련병은 시동생 말고도 네명이 더 있었는데
그중 시동생이 제일 위중한 상태였다.
일사병이 신부전증으로 발전하여
사흘동안 소변이 나오지 않아 온몸이 풍선처럼 부풀고 요독이 퍼져
그곳에서는 치료할 수 없어 서울 통합병원으로 옮겨야 하는데...
얼마나 부었는지 시동생에게 맞는 환자복이 없어 씨트로 둘둘말아 헬기로 이송하고
남편은 고속버스로 뒤따라 가는[군인이 아니라]헤프닝이 벌어졌다.
여름휴가 사흘을 그렇게 도둑맞고 서울로 온 이튿날
남편은 은행으로 출근해야했고
버스를 세번씩 갈아타고 등촌동 통합병원까지의 출근은 당연히 내몫이 되었다.
아침설거지를 마치자 마자 번동에서 버스를 타고
수유리로 나와 다시 광화문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내려서는
지금은 없어진 국제극장앞에서 공항가는 버스를 타고
등촌동 육군통합병원정문에 도착하면 얼추 12시가 되는데
면회가 어찌나 까다로운지 시시콜콜 적고 가족 한사람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처음 시동생을 보니 그건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단 사흘의 뙤약볕 훈련으로 검게 그을고 수염은 자랐는데
얼마나 퉁퉁 부었는지 침대에 붙은 명찰만 아니면 못알아볼 지경이었다.
내가 하도 기가막혀 우니까 말못하는 시동생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처음엔 소변이 나오지 않으니 먹을 수가 없어 음식을 해 갈 일도 없고
간호도 병실의 좀 가벼운 다른 군인환자들이 돌아가며 하는 군규?여서
머리맡에서 기도를 하거나 시트를 가는것을 돕거나하지 않으면
대부분 침대밑에 놓인 오줌병에
행여 오줌이 고여있지 않나 눈이 빠지게 바라보다 오는것이 일이었다.
전주의 시부모님께는 계속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좀 아파서 입원했는데 대단치 않으니 오실필요는 없다, 내가 다니겠다하고
단 손에 두아이 학교 보내고 석달동안 거의 매일 병원출근을 하는 일은 ...
맞며느리의 사명감만 가지고는 사실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병원에 안가는 날은 새벽에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구역식구와 목사님을 초청하여 집에서도 여러번 기도회를 가져선지
좀 차도가 있어 위험한 고비는 넘겼는데
역시 자연배설은 안되어 손목의 동맥과 정맥을 절개하여 혈관을 넓히고 튜브를 꽂고
혈액을 걸러내는 투석을 시작했다.
그것도 3개월까지는 통합병원에서 공짜로 치료받지만
3개월이 넘으면 의병 제대?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가
[사실 훈련 사흘만에 쓰러져 입대자체가 무효되어이듬해에 다시 훈련받았다]
공짜 투석 치료가 안된다는데...
공짜고 아니고간에 만일 신장기능이 회복이 안되면
신장이식을 하지 않는한, 2,3일에 한번씩 평생을 그 비싼 혈액투석을 해야 한다니 기가막혔다.
그래도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3개월안에 신장기능이 회복이되어 평생 투석해야하는 사태는 막아주셨지만
회복기에 접어들자
시동생은 입덧하는 사람처럼 어떤날은 곰탕이 먹고 싶다,냉면이 먹고 싶다.
온갖 별식을 주문해와서 면회가는 내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사이에 삼복더위가 다 지나고 초가을 바람이 불때라
음식준비할때 땀은 좀 덜 흘리게 되었지만
나트륨을 억제해야하는 탓으로 반찬준비가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날이면 양손에 도시락과 보온병을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어깨와 턱으로 우산을 끼운채
드문 드문 오던 김포공항가는 버스를 한없이 기다리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렇게 수발들은 시동생이 건강해져서 KAL기 피격사건이 있던 한달후에 퇴원하고
이듬해에 다시 훈련받아 6개월 학사장교 노릇하고 제대한다고 면회 오라하여
또 나혼자[아직 애인이 없어서] 새벽차를 타고 불고기며 찰밥싸들고
3군사관학교로 갔었다.
정작 나중에 우리 아들은 훈련끝나도 면회가본적도 없이
[디스크로 공익근무요원이라 4주단축 훈련 받고 면회도 없었다]
군생활?을 마쳐버려
그때 일요일이면 시도 때도 없이 엄마들의 눈물을 짜내던
뽀빠이 이상룡의 <엄~마가 보고플땐 엄마사진 꺼내들고....>를
그런식으로 경험해본 셈이었다.
그렇게 내 애간장을 태웠던 시동생이 88년에 결혼하여 아들 딸이 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이제 마흔네살이나 먹은 중년이 되었다.
시동생에게는 오로지 나혼자서 감당해야했던 그때의 내 간호가 큰 은혜로 느껴졌는지
역시 나보다 열일곱살 어린 동서에게 항상 잘하라고 다짐 한단다.
그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참 힘이들었을테지만
20년이나 지난 지금은 옛날얘기처럼 희미하게 느껴진다.
다만 그때 내짐이 너무 무겁고 억울하여 전주의 시어머님께 사실대로 알리고
모든짐을 시어머님께 짊어지라 했다면....?
몸 약하신 우리 시어머님은 그때 바로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평강공주과인 내가 뜨거운 사명감으로 그때를 잘 참고 이겨내어
시어머님이 그나마 4년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다고
어머님 기일이 되면 나 스스에게 위로를 하곤 한다.
그나 저나 비가 너무 온다 .
엊그제 8월2일이 어머님의 진짜 기일이었는데...
돌아가시던 87년 8월처럼 무슨 비가 이렇게 끝도없이 내리는지...
이 비가 그치면 주말에 어머님 산소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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