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언니의 살아가는 이야기

도토리 버리고 가을 하늘 보기.

왕언니 2003. 9. 21. 23:52

9월20일 토요일 맑음.


평균 이틀에 한번꼴로 내리는 비탓으로 산에 가지 못하다가
모처럼 삽상하게 개인 하늘과, 여유로운 시간이 맞아떨어져 오랫만에 앞산에 올랐다.
미안하게도 사는 동네가 태풍의 축에서 멀리있는 행운으로
바람이나 비의 피해가 없어뵈는 이곳이지만
엊그제 집중호우로 산길은 많이 흐트러져 있다.

비탈진 길에는 급류로 골이 깊게 패이고 흙탕물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여기저기 웅덩이가 생겼던 곳에는 앞서 간 부지런하고 엽엽한 손길들이
뒷사람을 위해 삭은 나무가지며 솔가지들을 깔아놓아
정상으로 가는길이 그런대로 불편하지는 않다.


여름내내 모자가 필요없이 녹음이 빽빽히 우거진 산길이었는데
태풍때문인지,가을이 오는때문인지
오늘은 꼭 늙어가는 ,내 속알머리없이 성글어진 정수리처럼
나무마다 이파리들을 떨어내어 헤성헤성...하늘이 보인다.
그 조각하늘 사이사이로 따가운 햇빛이 비집고 쏟아진다.

남녘 그 참혹한 태풍과 호우로 채 여물지도 못하고 쓰러진 벼포기들에게
하나님이 마지막 수확의 말미를 주시려는 은총인가보다.
제법 따가운 이볕에 고추도 말리고, 벼포기도 힘을 얻고 ,
갈갈이 찢긴 수재민들의 젖은 마음도 말릴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아직 단풍이 든것같지는 않은데 아까시아잎이 영양실조에 걸린듯 누렇게 떨어진다.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 사이사이로 풀벌레소리가 제법 목청을 돋구는데
무언가 뚝하고 내발밑으로 떨어져 구르는게 있다.
주워보니 깨끗하게 닦은듯이 매끈하고 예쁜 도토리 알이다.

그러고 보니 이산에는 도토리나무 천지다.
그동안 바람에 시달려선지 떨어질때가 되어선지
잠깐 둘러본 내 발밑에 도토리들이 많이 떨어져있다.
앞서가는 일가족인듯한 식구들도 비닐봉지까지 들고 도토리를 줍고있다.

도토리묵도 좋아하고 메밀묵도 좋아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나이만 먹었지 아직까지 도토리를 주워다가 가루내어 묵을 쑤어 먹어본 일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껏 산에 다니면서도 무엇이든 눈으로 즐기기만 했지
약초나 산나물을 뜯는다든지,산밤이나 도토리를 줍는다든지 할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무슨 대단한 모범학생이라 자연보호를 하려는게 아니라
도토리를 주워다 말려서 껍질을 까고,물에 우려 가루를 내어 묵을 쑤는
그 과정이 내게는 너무 거창한 프로젝트 같아서 한번도 엄두를 내보지 못한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나는,무심코 남들처럼 허리를 굽혀 도토리들을 줍고 있었다.
그냥 발밑에 구르는것은 아까 그것으로 끝이었고
오솔길 양옆으로 수북히 쌓인 낙엽더미를 찬찬히 뒤져야했는데도 말이다.

쉬지않고 걸으면 정상까지 50분쯤 걸리고 되돌아서 좀빨리 내려오면
왕복 1시간 반이면 충분하리라고 내딴엔 핸드폰의 시계를 보며
집에 도착할시간을 가늠하며 출발한 등산인데...
한알 두알 도토리 줍기에 재미를 붙인 나는
계속 땅만 바라보며 걷느라 지나치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도 잊어버렸다.


<많이 줏으셨어요?>
뒤돌아보니 검은배낭을 매고 등산모자를 쓴 웬 늙은 남자가 필시 도토리가 담긴듯한,
한주먹만큼 불룩히 쳐져있는 검은 비닐주머니를 들고 뒤따라오다가 말을 걸어온다.
부부동반도 아니고 이시간에 혼자서 산에 오는 이남자는
마누라에게 왕따를 당했거나,같이 오고 싶어도 손주에게 마누라를 뺏겨서일까?

<예?...예에..>
나는 그의 질문이 길을 비껴달라는 신호같이 여겨져서
긍정도 부정도아닌 어정쩡한 대답을 하며 앞서 올라가도록 진로를 피해주었다.
남자는 막대기로 낙엽을 뒤적이기도하고 나무등걸을 툭툭건드리기도 하며
열심히 도토리를 주우며 올라간다.


정상 가까이 갔을때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가게에서 남편이 걸은것 같은데
배터리도 약하고 산속이어선지 받으면 끊어지고 이어져도 통화감이 영 좋지가 않다.
무언가 부탁을 하려는것같은데 뚝뚝 끊어져 내용을 짐작할길이 없다.
남편은 자세한 얘기가 힘든것을 알고 집에 내려가서 전화를 해달라는것 같았다.

이젠 서둘러 내려가야할 이유가 분명해졌는데도
나는 도토리줍는 재미가 쏠쏠하여 계속 엎드린채 나뭇잎을 뒤적이며 뭉기적거리고있었다.



손댈필요도없이 알이 쏙 빠져 딩구는놈,
아직 파란 빵떡모자같은 껍질에 고스란히 싸여서 엎어져있는놈,
제대로 익어 세개씩 머리를 맞대고 붙은채 가지째 떨어진놈,
비올때 떨어졌는지 그새 성급하게 뿌리가 돋은놈도 있다.

무심히 지나칠때는 잘 안보이더니 일단 관심을 갖고 쳐다보니 맨 도토리다.
미처 껍질을 못벗은 놈은 발로 비벼까고
매끈한놈은 그냥 주머니에 집어넣고 하다보니 어느새 바지주머니가 불룩해졌다.
어림잡아 삼사십알은 될것 같다.
雜技에 빠져 정신못차리는 사람들이 이런 재미에서 일까...?
앞을 보고 부지런히 걸어 내려가야하는데도 자꾸만 발밑을 보게된다.



지난주 이종시동생네 결혼식에서 오랫만에 이종시숙을 만났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 한 그는 어찌나 요령이 좋은지
80년초까지 학벌을 속이고 보험회사를 다니다가
너무 실적이 좋아 상도받고 진급을 하게되었을때 ,들통이 날까 전전긍긍하다 자퇴를 하고
그후로도 창업과 전업을 수시로 하더니
최근엔 아파트 재개발 하는데서 간부를 맡아 재미를 보았다고 했다.

그는 전에부터 남편이 그 좋은 ?<제1회 부동산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장농속에 썩히고 있는게 너무 아까워 계속 추근거리고 있었다.

<부동산업계에 들어와서 보니 조금만 신경쓰면 널린게 돈이드라고...
서너명이 푼돈으로 여기저기 조금씩 사둬도 금방 값이 뛰어,땅짚고 헤엄치기랑게..?
땅값은 절대로 오르지 내리지는 않더라고... 두서너명이 작업해서 뙤작뙤작하면
큰돈 되는건 시간문제드라고 ...맘먹고 찾아보니 돈 될것이 시글시글 굴러다니드랑게?>

요는 남편의 자격증을 걸어놓고,자기는 영업을 맡고 같이 사무실차려
똘망똘망한 젊은애들 한두명 접객?을 맡게하면
금방 가마니로 돈을 긁어담는것은 시간문제라는것이었다.

우리는 그말을 듣고 그저 웃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가?
은마아파트,삼풍아파트,..손 안대고 코풀 수 있었던 그많은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전세금에 조금만 얹으면 살 수있었던 개포동 경남아파트도 놓아버리고
12년살던 옥수동아파트 헐값에 팔고 용인으로 이사와서
하필 5월말에 이전등기하여 생떼같이 양쪽집 재산세 다내고 돌아서니
옥수동집값은 오르고 용인은 그저 그타령인....
돈되는 길목만 까치발로 용케도 피해다니던 高手들이 아닌가? ㅎㅎㅎ

<빠듯한 돈 이리저리 짜맞추고 긁어모아 부동산 투기 했다면
그 모험 운좋게 맞아떨어지기 기다리며 얼마나 많은밤을 조바심 치고, 잠못자고, 애태우고...
가을이 오는지 봄이 오는지 아무것도 못보고 알탕글탕 했을것이여...>

<우리 주제에 넘치는 재물은 일만 惡의 뿌링게....
우리가 부동산으로 떼돈 벌었으면 누가 아파도 크게 아팠을거여
하나님이 우리 사랑하셔서 다 알아서 막아주신거지...>

우리는 우리를 끈질기게 다라다니던 머피의 법칙에 한동안 억울해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우 신포도 처럼 자위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욕심을 접고 하나님께 감사했었다.

<리 내려가야하는데 시선은 자꾸만 땅을 더듬고있다.
내가 이거 무슨짓인가 싶다.
이 도토리 한줌을 주워 그번거로운 과정 다 거치고 묵을 쑤어먹을 위인도 아니면서
무슨 생각으로 미련을 못버리고 제자리걸음을 하는걸까?

맨손으로 올라왔는지라 양쪽 바지주머니 불룩하게 채우고 나니 더 담을곳도 없다.
애초에 도토리를 줍자고 올라온길도 아니니 정말 묵을 쑤어먹을사람에게 선심이라도 쓰는것이
내 갈길도 재촉하고 남 좋은일도 하는게 아닐까...

마침 아까 내가 길을 비껴준 늙은 남자가
여나믄발짝 앞에서 여전히 도토리를 줍느라 얼찐거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주은 한웅큼의 도토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쓸 사람으로 그를 점찍었다.

<아저씨 그 도토리 갖다가 정말 묵 쑤실거예요?>
<쑤어 먹어야지요.>
<그럼 제가 줏은것 드릴께요.꼭 쑤어드세요?>

나는 양쪽 바지주머니를 가득채웠던 도토리를 네알만 남기고
그의 검은 비닐봉지에 모조리 털어넣었다.
<아이구 이거 고맙습니다. 이 사탕한개 녹이며 가세요.>
그는 졸지에 얻은 선심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무언가로 꼭 보답을 해야겠다는듯이
조끼주머니에서 부시럭대면 노란 사탕한알을 꺼내 내게 디밀었다.
<아이 괜찮아요. 저 사탕먹으면 안되는 당뇨 환자예요.>
나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질러 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호주머니를 비우자 비로소 발밑 두리번거릴일이 끝이나고 앞이 보이기시작했다.
아까는 보이지않던 까맣에 익은 열매도 보이고 분홍빛 여뀌도 아름다웠다.
바람도 향기롭고 산밑에는 해바라기,들깨꽃,메밀꽃도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꼭 쥐고 있던 네알의 도토리가 놓일곳을 물색했다.

쌍동이 삼형제처럼 모자를 쓴채 사이좋게 가지에 붙어있는놈들은 식탁위의 瓷器접시에...,
벌써 뿌리가 삼센티쯤 자라있는 놈은 생강싹을 틔우고있는 유리잔속에 ...
그리고 이제 막 뾰족하게 싹을 틔우고 있는 두놈은
흙만 담겨있던 베란다구석의 화분에 묻었다.


내가 욕심을 버리고 남겨온 이도토리들이
오며가며 물주고 공들이면 혹시나 내년봄에
거짓말같이 도토리나무 잎을 피울지 누가 알랴...?

베란다 밖 하늘이 새삼 파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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