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1장 34~36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것이요
만일나쁘면 네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잠언 4:23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남이니라
안경
우리는 외부의 모든 것을 눈을 통해서 보는데, 눈이 나쁘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면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이 눈 비유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눈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무엇을 보면 보이는 것을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이런 판단은 생각의 눈, 마음의 눈이 하는데, 그런데 이 눈이 성치 않으면 보이는 사물의 의미를, 잘못 판단하여 잘못 행하게 되어 삶이 바로 세워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한 마디로 ‘보는 것이 사는 것을 결정한다’라는 뜻입니다.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란 책을 보면, 동서양의 세상을 바라보는 두 다른 시선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서양은 자신을 소개할 때 개인의 성격 중심으로,
동양은 개인이 속한 집단 중심으로 소개한다고 합니다.
동서양의 어린이들에게 ‘소, 닭, 풀’ 그림 3개를 두고 셋 중 연관된 2개를 하나로 묶으라고 했더니,
서양 아이들은 ‘소와 닭’을 하나로 묶고,
동양 아이는 ‘소와 풀’을 하나로 묶었다고 합니다.
서양은 소와 닭이 속한 동물이란 범주의 틀로,
동양은 소와 풀이 가진 관계의 틀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무엇을 볼 때 다른 문화적 안경을 통해 보고 그 관점은 다른 삶을 만듭니다.
우리가 보는 지도도 세계를 보는 일종의 안경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이 좌우에 있고 태평양이 중앙에 있는 지도로 세계를 보지만,
유럽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럽과 아프리카가 중심에 있는 지도로 세계를 봅니다.
어떤 지도로 보느냐가 세계 이해에 영향을 미칩니다.
깨어진 안경
우리는 생각의 안경을 통해서 보는데, 그 안경이 세계의 다양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안경이 잘못되면 세계를 잘못 보게 만듭니다.
돌프 베론의 <200년 전 악녀의 일기가 발견되다>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한 백인 소녀가 14살 성년이 되는 해에 흑인 노예를 선물로 받고
노예에 관한 것들을 중심으로 기록한 소녀의 일기장인데
흑인 노예에 관해서 담담히 쓰고 있는 이 소녀는 자신이 쓰고 있는 백인의 관점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채
흑인 노예를 악녀처럼 보며 기록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보는 백인의 깨어진 안경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튀르키에 시리아 대지진을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할까요?
재난 현장을 방문한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재난을 국가도 어쩔수없는 천재라고 말했습니다. 지진을 천재지변으로 본 것입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지진으로 인한 피해조차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에르도안은 이 재난을 천재로 돌리면서 정부의 책임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것이 재난을 보는 바른 관점입니까?
이번 피해는 지진 자체보다 지진 지역에 내진설계법을 어긴 부실 공사 때문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1999년 일어난 대지진의 피해가 부실 공사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그것을 문제 삼아 에르도안이 정권을 잡았고
지진세까지 거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재임 20년 동안 지어진 건물 상당 부분이 부실 공사여서 이 때문에 피해가 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진 피해를 보는 바른 관점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어쩔 수 없는 천재인지?, 인간이 만든 인재인지?
바른 안경을 통해 봐야 재난의 진실이 보이고 책임 소재와 앞으로의 대책이 보이는 것입니다.
망대 사건
예수님 당시 실로암 망대 공사 중에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누가복음 13:4-5)
당시로는 대형 사고였는데, 그 시대 사람들은 이 사건을 , 죽은 이들은 죄가 더 많아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을 죽은 자 개인의 죄와 운명의 문제로 본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하시면서
죄를 회개할 자들은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망대가 무너진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망대 공사와 관련된 부패한 사람들의 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그런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눈을 점검하라.
우리는 우리의 생각의 안경을 점검해야 합니다.
이 안경은 문화에 의해 습득된 것도 있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로 씌워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국이 위드코로나로 전환하면서, 이번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겨우 8만명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이 세계 최고 방역의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이런 통계는 공산당이 국민 전체에게 진실을 보지 못하는 안경을 강제로 끼우려고 한 것입니다.
모세 시대 애굽 사람들은 애굽 종교와 파라오가 만든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그 안경을 통해 보면 세계는 해와 강과 동물들과 곤충들이란 각 영역을 담당한 신들이 통치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파라오가 그 신의 아들로서 통치하기에, 파라오 외의 모든 사람은 그를 위한 노예로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곳입니다. 이런 애굽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몸은 나왔지만 마음의 눈에 애굽의 안경을 끼고 있다면 그들이 애굽을 나온 다음, 애굽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까요?
그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중의 창세기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애굽의 안경과 다른 안경으로 세계와 인간을 보게 해줍니다. 이 안경을 통해서 보니, 세계는 달리 보였습니다. 애굽의 신들은 다 피조물이고, 왕만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심지어 종들도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세계의 실상이 비로소 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안경을 바꾸어 보게 함으로 삶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그 시대를 네 가지 안경 중의 하나를 통해서 봤습니다.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통해 새 시대가 온다는 바리새인의 안경,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이며 지내야 한다는 사두개인의 안경,
혁명적 저항을 통해 새 시대가 가져와야 한다는 열심당원의 안경,
광야에서 순수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 메시아를 기다려야 한다는 엣세네파의 안경입니다.
대부분 넷 중의 하나의 안경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고 있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바른 안경을 끼워 주셨습니다.
바울도 로마 제국 치하에 살아가던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의 내용이 당시 제국의 관점과 다른 안경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를 향하여 ‘피차 복종하라’라고 하면서 가정을 보는 새로운 안경을,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골로새서 3:23)이라고 하면서
직업을 보는 새로운 안경을 끼워줍니다.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라고 하면서 리더십에 관한 새로운 안경을 끼게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바울 사도는 로마 제국의 문화의 안경을 통해 보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합니다. 즉 생각의 안경을 끼고 삶의 여러 영역을 새롭게 보라고 합니다.
보는 것이 사는 것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눈의 변화, 세계관의 회심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안경
우리도 그냥 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어떤 안경을 끼고 보고 있습니다.
스티브 윌킨스의 <은밀한 세계관>이란 책을 보면
우리 시대 사람들이 끼고 보는 안경들이 소개됩니다.
“개인주의, 소비주의, 국가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과학적 자연주의, 뉴에이지,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종교가 된 심리치료”(스티브 윌킨스, <은밀한 세계관>)
개인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는 개인주의의 안경,
모든 것을 상품으로 보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보는 소비주의 안경,
심지어 인간도 물질로 환원시켜 보는 과학적 자연주의 안경,
국가 유지를 위한 국민의 충성심 확보를 위해 국가를 신격화 시키는 국가주의 안경,
인간의 모든 어려움을 심리적 문제로 보게 만드는 종교화된 심리주의 안경 등입니다.
이런 안경들을 통해서 보지만 우리는 그런 안경을 끼고 보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안경들을 통해서 보고, 그렇게 보인 세계를 참된 모습으로 여기며 삽니다.
이런 마음의 안경들인 세계관들은 우리의 의식의 레이더망을 피해 은밀하게 스텔스기처럼 날아 들어와 우리 마음에 침투하기에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볼 때 그것을 그렇게 보게 만든 마음의 안경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된 것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마음은 남이 들어오지 못하는 내 사적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면 그 장면이 내 마음에 슬며시 들어와서 내 마음의 땅에 텐트 치고 아예 말뚝을 박습니다. 어떤 말을 들으면 불편한 말을 들으면 그것이 마음의 땅에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보는 마음의 안경 일부가 되고, 그 안경으로 보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이 눈이 성하지 못하면 결국 온몸이 어둡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영적 성장과 눈의 회심
영적으로 거듭났다면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그 성장 속에는 말씀을 듣는 귀의 훈련, 기도로 말하는 입의 훈련, 바른 관점으로 보는 눈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느냐, 내 관점이 건강한가, 성경적인가를 검토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늘 생각하며 사는데 그 생각을 생각해야 합니다.
눈이 성하지 않으면 온몸이 어둡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강한 눈을 가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C.S.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해가 떠오르는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는다.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나머지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I believe in Christianity as I believe that the Sun has risen, not only because I see it, but because by it, I see everything else).” -C. S. 루이스
성경은 그 속에서 교훈도 찾고 위로도 받는 책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통해서 세계를 보게 해주는 안경과 창문과 같은 책입니다.
인생관 죽음관 노동관 인간관과 같은 세계관을 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 인간, 가정, 사랑, 자유, 노동, 젊음, 나이듦, 죽음, 고통, 성공, 재물, 이런 필수적인 주제들과 씨름하며 삽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삶도 죽음도 성공도 인생도 의미가 다릅니다. 우리 시대는 자기식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여기지만, 관점이 건강하지 못하면 삶이 건강할 수 없습니다. 삶의 중요한 주제들을 보는 내 안경이 어떤지를 성경을 통해서 검토해야 합니다.
모세 시대 창세기란 말씀을 통해서 애굽의 안경을 바꾸고 바로 볼 수 있게 했듯이,
예수님과 바울 시대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편지를 통해
유대주의의 안경, 로마 제국의 안경을 벗고 바른 안경으로 바로 보게 했듯이,
우리 시대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눈을 건강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훈 모음집이 아니라, 세계관, 인생관의 큰 그림을 일관성 있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기독교는 “세계 해석적 종교”입니다. 나아가 그 해석에 기초해서 세상을 바르게 바꾸는...
월터 스토프란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 형성적 종교’입니다.
눈을 점검하자
우리는 관점의 문제, 눈의 문제를 말했는데 이 문제가 정말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내 눈으로 비췬 사건이나 사람을 두고 문제 삼지만, 종종 더 깊은 문제는 그 사건이나 사람을 그렇게 보는 내 눈이고 내 관점입니다.
<200년 전 악녀의 일기가 발견되다>는 책의 내용처럼
진짜 문제는 흑인 노예가 아니라, 그 노예를 보는 백인 관점입니다.
우리도 비장애인의 관점, 남성의 관점, 일정한 이념의 관점, 기득권의 관점,
다수자의 관점으로 보고 있으면서 그 관점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정치와 인간관계를 포함한 수많은 문제도 들어가 보면 결국 눈이 문제입니다.
상대를 그렇게 보는 고착된 관점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숨기고 자기의 관점을 프레임 씌우려고 합니다.
우리는 여러 직업을 가지고 삽니다.
기독교인인데 세계와 직업을 보는 안경은 기독교적이지는 않습니다.
국회의원이지만 교회에 다닐 뿐, 정치를 보는 안경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교육, 경제, 노동, 가정을 성경적으로 보는 관점은 없습니다.
관점이 바뀌지 않으면 삶의 이해도 바뀌지 않고 삶도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도 마음을 위로하는 부드러운 내용만 구하는 경향이 있지만, 내 안의 박힌 말뚝과 같은 굳은 생각을 깨뜨리는 망치 같은 말씀, 그것을 다시 형성하는 딱딱한 음식과 같은 말씀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보는 공부도 필요합니다. 찬양 예배를 통한 뜨거운 마음과 함께 말씀 공부를 통해 냉철한 생각을 함께 가진 균형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눈의 문제, 관점의 문제를 떠날 수 없는데,
우리는 갈수록 하나님 나 인간 세상에 대한 내 생각이 성경적으로 바뀌고 있는지요?
여전히 과거의 안경을 그대로 끼고 있는지요?
우리는 계속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매일 조금씩 성경을 통해서 눈을 바꾸어 가는 과정입니다.
영적 눈의 시력이 좋아져서, 인생과 역사를 보는 일관된 관점이 생겨,
소위 말해서 성경적 인생관이 정립되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의 눈이 점점 성해지고 좋아짐으로
우리의 삶의 이해도 깊어지고 타인에 대한 이해도 성숙해지고 삶이 더 풍성해지길 바랍니다.
2023년 2월 19일 설교 (정현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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