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8:1~3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하심이니라
마태복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말씀을 먹으라”
– 말씀훈련과 영적성장 –
만고불변의 진리 하나, 매일 실천하는 진리 하나는 “먹어야 산다!”입니다
이보다 확실하고, 이보다 매일 실천하는 진리가 있을까요?
이렇게 매일 삼시 세끼 우리는 먹고 또 먹습니다.
한국 사람은 워낙 ‘먹는다’는 것을 좋아해서, 밥도 먹고, 나이도 먹고, 골도 먹고,
일등도 먹고, 챔피언도 먹고, 마음도 먹는다고 이어령교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땅에 속한 것을 먹어야만 사는데,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 하고, 골고루 먹되 꼭꼭 씹어서 먹어야 합니다.
정신적 허기
그런데 음식을 먹어야만 살지만, 우리는 음식을 먹고 배가 불러도,
마음은 배고파서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싶어 합니다.
이런 정신적 문화적 식욕은 우리가 땅만 딛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사이의 존재’이기에, 땅에 속한 것을 먹어도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해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맛있는 것도 찾지만 멋있는 것도 찾습니다. 먹는 밥과 다른 밥에 대한 식욕이 늘 있어서 이것을 여러 정신적 문화적 음식으로 채웁니다. 시도 읽고 음악도 듣고 철학도 하고 영화도 보지만 이것들로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더 깊은 배고픔을 느낍니다.
어떤 이는 정신적 음식을 명상을 통해 자기 안에서 찾고, 자기 안에서 어떤 신성과 빛이 있다고 여기고 수행도 하지만 여전히 다시 허기를 느끼고 다른 문화를 소비하거나 긴 수행의 길을 갑니다.
말씀의 생수와 양식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때
그녀는 육체적 갈증을 채우기 위해 우물에 물을 길어 왔지만
우물물로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 갈증이 있었고 나아가 영적 갈증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목말랐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
우리는 육체적 갈증을 해결하는 물을 마시고,
정신적 갈증을 채워주는 문화적 대체물이나 종교적 명상도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님과 연결시켜주지는 못합니다.
문화와 종교들은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인간의 이야기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로 이루어진 정신적 문화적 음식이 아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란 생명의 음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4)
우리가 참으로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영적 음식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인데, 이 말씀은 지적 교양을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반드시 먹어야 하듯이, 참 살기 위해서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동물로 살기 위해서라면 음식만 먹으면 되지만, 사람으로 살려면,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으로 살려면, 하늘양식을 먹고 소화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요?
소리 내어 천천히 읽으라
음식을 어떻게 먹습니까? 음식 종류가 정말 많은데, 어떻게 먹습니까?
그냥 입으로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온몸으로 먹습니다.
먼저 눈으로 먹고, 젓가락을 잡기 전에 스마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코가 구수한, 달콤한, 시큼한 냄새를 맡고,
귀는 국물이 끓고 물을 따르고 후루룩 부는 소리를 듣고,
손이 수저를 들고 그리고 음식이 입으로 들어갑니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면 이로 꼭꼭 씹습니다. 그러면 음식의 맛을 혀가 느낍니다.
달콤 얼큰 쌉쌀 매콤한 맛을 느낍니다.
음식은 입만이 아닌 눈, 귀, 코, 손, 이, 혀를 통해 먹습니다.
급하게 꿀꺽 삼키면 안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천천히 먹어야
비로소 음식이 나를 살게 하는 양분이 됩니다.
말씀이란 영적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말씀은 성경책이란 단품요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영적 음식이 들어 있는 메뉴판과 같아서
그 속에 수천 년의 역사,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사건들,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런 사건들 속에 개입하시고,
그런 이야기 속에 등장하셔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의 이야기와 말씀이 있습니다.
장르도 율법, 스토리, 역사, 시, 드라마, 편지, 산문 등 다양하고,
그런 수많은 장면들, 인물들, 이야기들이란 다양한 메뉴가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읽는데, 그냥 눈으로 쓱 읽고 성경을 읽었다고 말하지만
읽기는 읽었는데 남는 것이 거의 없어서, 눈으로만 읽은 성경이 내 안으로 들어온 음식은 되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은 천천히 꼭꼭 씹어 먹은 음식이 소화되고 양분이 되듯이,
말씀도 역시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야,
묵독이 아닌 음독일 때 말씀 읽기가 말씀 먹기가 됩니다.
시편 1편에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조용히 생각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가 '하가’(hagah)인데, 입으로 '중얼거리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시편은 읊조리다고 번역했습니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시편 71:24).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편 119:97).
말씀을 그냥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고,
귀로 듣고 몸을 움직이면서 읽으면,
이렇게 말씀을 입으로 조용히 소리 내어 읽으면,
온 감각이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말씀이 내 안으로 제대로 들어옵니다.
반드시 줄을 치고 싶은 구절이 생기고,
그 옆에 내 느낌을 쓸 수 있는 내용이 생깁니다.
동양의 명상은 가부좌를 틀거나 무릎 꿇고 조용히 앉아서 침묵하는데,
그 명상의 목적은 자기 안에 숨겨져 있는 신성이나 지혜나 빛을 찾고 이끌어 내어,
그것을 양식으로 빛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 안에서 빛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영적 허기를 채우기 위해 하늘 양식인 말씀을 내 안으로 넣고,
내 안의 영적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말씀이란 빛을 넣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말씀이 내 안에 소화된 음식이 되느냐?
어떻게 말씀이, 내 밖의 빛이 내 안을 밝히는 빛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읽는 말씀이 먹는 말씀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밖의 영적 음식과 내 밖의 빛인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오려면,
그것은 그냥 말씀을 눈으로 쓱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말씀을 천천히 읽고 때로는 소리를 내며 읽어야,
그 말씀이 음식이 되고 빛이 됩니다. 말씀 읽기가 말씀 먹기가 됩니다.
우리는 정보시대를 살면서 빨리 정보를 얻으려고 눈으로 빨리 읽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런 묵독과 속독은 정보를 빨리 찾는 데는 좋고,
그런 정보는 달리는 말처럼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천천히 걷는 낙타처럼,
정보적 읽기가 아니라 묵상적 읽기가 되어야 합니다.
음식을 꼭꼭 씹어 먹어야 음식이 몸을 살리는 양분이 되듯이,
말씀도 그렇게 읽어야 영혼을 살리는 음식이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 성경 읽기로 들을 때 집중해서 들으시되, 가능하면 그 본문을 천천히 읽으면 더 좋습니다.
큐티 본문은 더욱 그렇습니다.
내게 주는 말씀으로 읽으라
성경을 읽거나 듣거나, 혹은 설교를 듣거나 설교문을 읽거나 할 때,
내가 혼자 읽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혼자 읽지 않습니다. 그 곁에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음식을 꼭꼭 씹어서 먹으면 입에서 타액이 나오고 위에서 산이 나오듯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깨닫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중학생이 어려운 영어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 선생님이 해석하도록 돕듯이 돕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의 성경 읽기를 도우십니까?
구약은 주로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신 말씀이고,
신약은 주로 과거 교회 역사 속에서 하신 말씀인데,
성령님은 그 시대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과거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읽는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과거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 다윗에게 이사야에게 바울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읽는 지금의 나에게 과거의 말씀이 현재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준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읽는 말씀이 먹는 양식이 되게 하십니다.
물체가 있을 때 빛이 있어야 그 물체를 보게 되고, 음식을 먹을 때 효소가 있어야 소화가 되듯이,
성령님은 말씀을 보게 해 주시는 빛이 되시고, 말씀을 깨닫고 소화하게 해주는 영적 효소와 같이 일하십니다.
이처럼 성경과 성령님은 늘 함께 일하시는데,
성경 곁에 성령님이 계시고, 성령님은 성경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성령이 없는 성경 읽기나, 성경이 없는 성령의 역사는 다 잘못입니다.
말씀이 없는 감정적 열광주의나, 성령이 빠진 메마른 지성주의도 역시 잘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성령님, 성경을 읽을 때, 들을 때, 설교를 듣고 설교문을 읽을 때, 그 말씀을 읽고 듣는 나에게 말씀을 주옵소서. 기록된 말씀이 들리는 말씀이 되게 하소서, 그때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성령님은 내가 읽는 성경을 통해서 그때마다 필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어떤 때는 위로를 어떤 때는 격려를, 돌이킴을 소망을 주십니다.
성경 말씀은 변하지 않는 한 말씀인데, 그 말씀을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다양한 상황에서 읽으면,
마치 어떤 물체도 어떤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기록된 말씀은 변함이 없지만,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메시지가 다릅니다.
말씀이 각각의 상황에 적절한 메시지가 됩니다.
같은 말씀이지만 청년 때 중년 때 노년 때 읽으면 메시지가 다른데,
말씀이 변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적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말씀과 지금 나의 상황을 연결하기 때문에, 그 상황에 적절하게 주어지는 메시지가 있고,
그 말씀이 먹는 말씀이 되고 음식이 되는데, 이렇게 말씀을 통해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자기를 고쳐가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고,
그가 자기의 변화를 통해 주위를 변화시키는 사람, 즉 땅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기록하며 읽으라.
이렇게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으면
마음에 감동이 되는 구절이 있고, 은혜가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매일 내게 은혜된 구절을 기록해 보십시오.
기록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간 말씀이 내 안에서 양분이 되어 힘이 된 결과입니다.
천천히 읽다 보면 반드시 은혜가 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면 밑줄을 치시고 꼭 기록하십시오.
이렇게 구절을 기록하는데, 그냥 구절만 기록해도 되지만 그 구절에 이런 내용을 추가하면 더 좋습니다.
어떤 말씀이 은혜가 되었는가? , 또 왜 은혜가 되었는가?
Why를 기록하고,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How를 써봅니다.
이렇게 하면 그 기록은 하나님과 함께 나눈 대화의 기록이고 함께 찍은 사진과 같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구절만이라도 기록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지난주 공동체 성경 읽기의 본문이 창세기인데, 야곱, 라반,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은 라반을 피해 밤중에 도망했는데, 라반이 알고 쫓아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저녁 라반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기에 라반이 야곱을 해치지 않고 떠나가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일하신다. 하나님은 서프라이즈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서프라이즈가 있음을 믿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그 말씀이 지금 내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또 창세기 41:51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요셉은 맏아들의 이름을 ‘잊어버리다’라는 뜻으로 므낫세라 지어 불렀다.”(창세기 41:51) 이 구절을 보면서, “하나님, 저에게도 잊고 싶은 과거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을 후회만 하지 않도록, 과거를 바꾸는 일이 미래에 일어나게 하소서. 과거를 재창조하는 그 미래를 주소서.’ 이렇게 그 말씀을 통해 나에게 주시는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오늘 내게 주어진 음식이 됩니다. 읽은 말씀이 먹는 말씀이 됩니다.
이 한 해 하고 싶은 일, 올해의 버킷 리스트가 무엇입니까?하고 싶은 것들이 많겠지만,
내게 감동이 되는 말씀을 하나씩 기록해 365구절을 기록하다 보면,
그 구절은 그냥 구절이 아니라 내게 의미가 있는 소중한 구절이 됩니다.
가볼 장소가 많지만, 내가 가서 사진을 찍은 장소, 내 얼굴이 찍힌 장소는 의미가 다른 것처럼, 그런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소중한 나의 말씀이 됩니다.
말씀 읽기가 말씀 먹기가 됩니다.
그리고 내가 기록한 그 말씀을 구역에서 함께 모여서 나누십시오.
나도 말씀을 먹지만, 말씀을 서로 먹이십시오. 그곳은 풍성한 영적 식탁이 됩니다.
제대로 먹으면 변화가 생긴다
우리가 이렇게 꾸준히 말씀을 먹으면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말씀의 양식을 제대로 먹으면 그 변화를 주위가 반드시 알아봅니다.
“저분이 변했어. 이전과 달라”
말씀을 제대로 먹으면
영혼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다른 사람이 금방 알게 됩니다.
만약 영혼의 얼굴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주위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말씀을 제대로 먹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이 아닌 인스턴트만 먹었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읽을거리 볼거리에 시간을 쏟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데 시간을 쏟지 않은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에 꾸준히 시간을 투자한 사람과 아닌 사람은 반드시 차이가 납니다.
자기 성장, 자기 영적 성장에 꾸준히 시간을 투자한 사람과 아닌 사람은 영혼의 얼굴에 차이가 반드시 납니다.
변화는 말씀을 먹는 영적 식사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 변화가 내 안에서 일어나면 반드시 그것이 주위로 확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간단히 말하면 성경을 먹고사는 공동체입니다. 말씀을 우리 안으로 충만히 들어오게 함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온 말씀이 우리 밖으로 삶을 통해 드러나고 표현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밖으로 무엇을 행하기 전에 먼저 안으로 말씀을 제대로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먹은 말씀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 속에 성숙한 공동체, 수준이 다른 공동체가 되면 그것이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빛을 품어야 빛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자기 안에 충만히 담긴 말씀이 저절로 삶을 통해서 충만히 표현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혼자 겉을 바꾸려고 해도 안 되지만,
먼저 우리 안을 말씀으로 채우면, 말씀이 자연스레 밖으로 표현됩니다.
나무가 자기 힘으로 열매를 맺으려고 해도 안 됩니다. 오직 시냇가에 뿌리를 매일 내림으로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꾸준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 하늘과 연결된 존재이기에 꾸준히 말씀을 잘 챙겨 먹는 것입니다.
매일 말씀이란 하늘 양식을 먹기 위해 입을 크게 엽시다.
말씀이란 빛이 내 안을 비추도록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엽시다.
말씀이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듣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엽시다.
매일 말씀을 먹어 말씀이 만드는 영혼, 말씀이 만드는 변화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2023년 1월 15일 설교 (정현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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