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들음,맡김,동행 성령님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하는가

왕언니 2022. 11. 28. 17:50

(로마서 10:6-15)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 가겠느냐 하지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자는 부끄 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지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지금은 어느 때보다 힘든 때입니다. 코로나가 일상을 흔들고,

전쟁이 평화를 흔들고,

기후위기가 미래를 흔들고, 경제가 일상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믿고 의지해 왔던 기반이 흔들리면,

우리는 그 기반이 정말 믿을만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그동안 의지했던 질서, 평화, 번영이란 것이 정말 믿을만한 것인지,

우리가 믿고 있는 재물, 건강, 명예가 어느 정도 우리를 지켜주며,

붙들어줄 것인지를 질문하게 합니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되 잘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여기에 있고,

또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새생명 축제를 가집니다.

 

 

주 예수

 

누구를 믿으려면 먼저 그에 대해서 들어야 하기에 

두 주에 걸쳐서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들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구원의 역사 속에서, 종교문화사와 인물사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초대교회부터 예수님에 대한 가장 간결하고 분명한 호칭은 “주 예수”였습니다.

큐리오스 예수스입니다.

로마 치하에서는 로마 황제만이 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33년의 생애를 살았고 로마의 십자가 형을 당했지만

사실은 그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참된 주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로마 황제는 주로서 제국의 사람들을 다스렸지만,

몸만 다스렸지 마음까지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시진핑이 당대회를 통해 3연임을 하려 하자 ,

베이징에 시진핑의 연임을 비판하는 플랭카드가  걸렸습니다.

시진핑은 중국인민의 몸은 지배하지만 마음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중국 밖에서는 그는 다수에게 비난의 대상일 뿐입니다.

누가 몸만이 아닌 마음까지 다스리는 주가 되십니까?

 

아무리 자신이 주라고 해도 살아 있는 자들을 다스릴 뿐,

죽은 자까지 다스리는 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산 자만이 아닌 죽은 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주가 되신 분이 있을까요?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또 주로서 땅의 사람들의 무릎을 꿇게 하는 이는 있지만,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무릎까지 꿇게 하는 주가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 앞에는 천사도 무릎을 꿇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9-11)

 

이렇게 볼 때 누가 참으로 주이십니까? 예수님이 주이십니다.

그래서 “주 예수, ‘큐리오스 예수스’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 예수

 

또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리스도란 구원자란 의미입니다.

구원이 되려면 타락된 상태로부터, 죄와 저주로부터 구원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구원자에 대한 기다림과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을 누가 실제 이루셨습니까?

 

누가 죄와 타락이란 근본문제를 해결하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 구원을 가져오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크리스토스 예수스이십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

 

또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호칭은 사람의 아들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또 성경은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말합니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3,15-16)

 

독생자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구분되는,

유일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즉 사람이 사람을 낳는 방식이 아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자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두고 독생자라고 합니다.

 

독생자가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 독생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달리

하늘에서 내려오사 하늘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대표자로서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인 인류 구원을 이루신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종교문화사 속의 모든 인류가 가진 공통된 갈망인

어떤 신적 존재가 이 땅에 와서 모종의 과정을 거쳐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내용을

역사 속에서 현실로 이루신 분입니다.

 

 

 

로마서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하늘을 두루 다닐 필요도 없고 도움을 청하려고 그분을 모셔 내려올 필요도 없습니다.

그분을 부활시키려고 죽은 자 가운데 갈 필요도 없습니다.”(로마서 10:6-7, 현대어)

 

그리스도 즉 구원자를 찾으려고 하늘 위에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없고, 

또 그를 찾았다고 해도 그를 구원을 이루게 하도록 땅으로 내려오게 할 필요도 없다.

그분이 살아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이루어지기에

그를 부활시키려고 죽은 자에게 갈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이미 이 땅에 내려왔고, 이미 십자가를 지셨고,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듣게 함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들어야 하는데

바르게 들어야 하고 계속 들어야 하고,믿는 대상이 누구신지 들어서 알아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냥 믿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깨닫고 바로 아는 바탕 위에서 믿음의 대상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는 것을 꾸준히 하십시오.

예수님의 생애와 같은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분명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들어야 하는 사람은 우리들만이 아니라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야 합니다.

먼저 들었던 자가 듣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그것이 전도입니다.

좋은 글이나 사진이나 영상이 있으면 공유하듯이, 예수님에 관해서 듣도록 해줘야 합니다.

 

그렇게 정말 꼭 들어야 할 분에 대해 듣게 해주려고 한다면,

또 그것을 위해 그에게 찾아간다면 그런 발걸음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그를 살리는 발걸음이고 그를 구원하는 발걸음이 됩니다.

 

 

 

로마서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4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0:14-15)

 

믿는 우리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에 관해 들어야 하고 그들도 듣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SNS 시대, 듣고 듣도록 만드는 시대인데, 정말 누구에 대해서 들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들어야 하고 들려줘야 합니다. 

사람들은 들어야 할 것은 잘 듣지 않고 그렇지 않은, 이상한 뉴스, 가짜 뉴스에 귀가 솔깃합니다.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또 흘려 듣지 않고 집중해어 듣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탄이 좋아하는 것을 듣게 되고,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화에서도 경청이 가장 중요하듯이 우리는 들어야 할 것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평소 예수님에 대해서 잘 들어야 하고, 새 생명 축제에 모시고 와서 잘 듣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잘 듣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에 대해 듣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듣고 듣도록 합시다.

 

맡김

 

예수님을 믿으려면 먼저 들어야 합니다.

들으면 역사 속에서, 구원역사 속에서, 문화사 속에서, 인물사 속에서 그분이 누구신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왜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잘 들어서 예수님이 대단한 분이고,

위대한 분으로 알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으로 그치면 그분이 아무리 좋은 분이라도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보고 안전하다는 것을 들어 알았다고 해도, 비행기에 타지 않는다면 나와 상관이 없고,

좋은 약이 있음을 들어서 알았다고 해도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들음을 통해 예수님을 지적으로 수긍해도 지적 동의로만 그치면 그분과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으로 믿음

 

어떻게 해야 주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나와 상관이 있게 됩니까?

그분과 상관이 있어야 내가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믿는데 마음으로 믿어야 의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마음’이란 단어는 매우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한글성경에 ‘마음’이라고 번역된 구절이 많습니다.

그 중에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란 구절의 마음은

원어가 ‘누스’인데 의미는 이성, 생각이란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마음으로 믿어’의 마음은 원어가 ‘카르디아’인데,

그 의미는 ‘지,정,의’가 포함된 인격 전체, 존재의 중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는다’고 할 때 그 말은 지.정.의를 통한 인격으로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에 대해 듣고 먼저 생각해 보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집니다. 그런데 아직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대상에 대한 신뢰가 생긴 다음에는 그 대상에 자신을 맡길 때

지.정.의가 포함된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안전하다고 알고 느낀 다음에 타는 의지적 행동이 있어야,

약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먹어야, 비행기와 약이 나와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함

 

믿음의 대상이 나와 상관이 있으려면, 의지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비행기나 약과 같은 사물과 달리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와 내가 상관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도 내 의지가 필요한데, 이때는 내가 내 의사를 말이나 글로 표현해야 합니다.

결혼식장에 선 신랑과 신부가 있습니다. 서로 잘 알고 있고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합니다.

공중 앞에서 자기 의사를 입으로 시인해야 두 사람은 서로에게 특별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어떤 계약에서도 좋은 생각을 가져도 마지막에는 내가 싸인을 해야 고용관계 거래 관계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흡사합니다.

예수님이란 분과 내가 개인적 관계가 있으려면 지적으로 좋은 분으로 알고

감정으로 좋게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내 입으로 내 의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

 

이 구절을 보면 마음으로 믿어야 하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고 합니다.

같은 것을 순서를 바꿔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이 나와 무관하지 않고 상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하는데 믿고 시인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고 감정으로 느끼고 의지로 내 의사를 밝히는 세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자기의 의사를 자기 입으로 표하는 의지가 중요하기에,

‘입으로 시인하여’를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가 생겨납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애굽을 나온 다음에 시내산에서 모여 하나님의 율법을 들은 후에

그들의 입으로 ‘당신은 우리의 왕이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의지적 표현을 하자,

하나님의 백성이란 특별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입으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두고 영접한다고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향한 뜻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사랑의 프로포즈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그 프로포즈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프로포즈를 받는 것, 이것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권세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권세가 있고 축복입니까?

이는 고아가 입양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새로운 현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축복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의지를 표하는 영접으로 입으로 시인하는 의지로,

우리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상관이 있게 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믿음이 지적 동의나 감정적 호감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의지적 맡김, 영접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맡기는 믿음을 통해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 놀라운 관계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동행

 

믿음은 들음으로 시작합니다. 들음으로 대상을 지적으로 알고 난 다음

신뢰를 갖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영접함으로 개인적인 관계가 생겨납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라디아서 3:26)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두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관계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 관계가 주어졌다면 그 관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제자가 되었다면 스승의 제자됨의 축복을 체험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 새로운 관계, 새로운 영적 현실은 우리 감각으로는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 새 관계를 잘 모르고 이전처럼 지낸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감각적으로 잘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또 믿음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관계가 비록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아직 낯설다고 해도,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기에 사실임을 믿고 행동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이 아직 경험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사실로 믿고 하나님 아버지, 이러게 부르며 기도해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상현실이 있는데 스마트 폰이란 기구를 사용하다 보면 그 현실에 대해서 체험하게 되는 것처럼,

기도와 말씀과 고백이란 영적 도구를 사용함으로 영적 새 현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자녀가 된 새 현실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었다면 이제 아버지로 체험하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비록 이 영적 현실은 낯설고 새 관계는 어색하지만,

일상 속에서 아버지,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부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 진심으로 그렇게 하면 조금씩 하나님의 아버지되신 그 현실과 관계가 체험되고 경험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 동행하시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믿음으로 주어진 새로운 관계요 현실이지만, 육체의 감각으로 잘 느끼지 못하기에

예수님이 동행하지만 아닌 것처럼,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지만 아닌 것처럼 삽니다.

 

그러면 그 영적 현실이 체험되지 않고 점점 없는 것처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행과 성령의 내주란 영적 현실이 사실임을 믿고 그렇게 행동하다 보면

그 현실이 비로소 체험됩니다. 머리로 아는 믿음이 체험되는 믿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유기성 목사님이 오실 것인데, 이분이 늘 강조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이 나와 동행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모르니, 그것을 아는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이미 주어진 새 관계를 사실로 믿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심이 사실이니 그렇게 믿고 길을 가면서

아버지, 이렇게 부르고, 평소 내 안에 계신 성령님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묻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분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았던 하루 하루를 일기로 기록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주어진 새로운 현실이 하나님의 자녀됨이 실제 체험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머리로만 아는 앎이 아니라 체험으로 아는 앎이 됩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님과의 동행이 믿는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성경은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적으로 대상을 아는 know about가 아닙니다.

그냥 머리로 그런 분이지 이렇게 아는 것은 영생과 구원이 아닙니다.

알지만 그분은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영접하여 개인적인 관계가 되고,

그 관계 안에서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나아가고,

매순간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이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분투가 있습니다.

먼저 믿음의 대상을 바로 알려는 노력입니다.

설교 한번으로 조각 그림 하나를 들고 안다고 하지 말고

퍼즐 전체의 그림을 제대로 아는 그런 앎에 이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그 앎이 머리의 앎이 아닌 체험의 앎이 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영적 현실을 믿고 실제 예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동행을 의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기도하고 저녁에 잘 때 기도하고 성령님을 부르고,

또 일기를 쓰고 큐티를 하는 과정은 체험적 믿음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듣고 아는 믿음에서 맡기고 영접하는 믿음으로 동행함으로 체험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들음, 맡김, 동행, 이 세 과정이 믿음인데, 이렇게 하다 보면 더 알고 되고, 더 신뢰하게 되고 더 체험하게 됩니다. 믿음의 선순환이 일어납니다. 믿음이 견고하게 된다고 합니다. 영적 현실을 믿고

실제 예수님과 함께 걷기,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의식하기, 그분을 붙들기,

이런 믿음이 이 시대 우리가 분투해야 하는 믿음입니다. 그럴 때 그 믿음이 견고해지고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믿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시대입니다.

정말 누구를 무엇인가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치하에서 예수님은 주 예수이시고, 그리스도 예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임을 알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참 믿음의 대상이 예수님임을 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확신하기를 바랍니다. 의지적으로 붙잡야 합니다.

 

우리의 이전에 믿는 그런 믿음도 약해지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듣고 지적으로 수긍하는 정도에 그치기도 하고,

영접했다는 것,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로 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정도로 그친다면 이 믿음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정도라면 점점 약해지거나 습관적이 될 뿐입니다,

그것에 그치지 말고, 영적 현실을 믿고 행함으로 체험하는 믿음으로까지 나아갑시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동행하는 매일의 신앙의 기본을 더욱 견고하게 합시다.

우리가 믿음의 대상을 더욱 깊게 바로 알기를,

그리고 믿음의 주를 믿는 우리의 믿음도 더욱 깊어지고 견고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질 뿐 아니라, 오늘 새생명축제를 통해 이런 믿음을 갖도록 돕기를 원합니다.

 

 

 

2022년 10월16일 설교 (정현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