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님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가? –
요한복음 15:26;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게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16:13-15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것은 다 내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하였노라
신앙이 흔들릴 때
주로 어떨 때 신앙이 흔들릴까요?
핍박이 올 때 ,신앙이 흔들리고, 어려움이 생길 때 신앙이 흔들립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핍박과 로마의 박해 때문에 흔들렸는데
그럴 때 그들은 어떻게 흔들리는 신앙을 붙들었을까요?
반대로 핍박이 없을 때는 신앙이 희미해지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때 신앙에 관한 관심이 식어집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렇게 미지근해졌듯이,
우리 시대는 너무 편안하기 때문에 신앙이 희미해지고 약해집니다.
이럴 때 어떻게 약해지는 신앙을 다시 붙들 수 있을까요?
신앙이 약해지면 예수님에 관한 관심보다 다른 것들에 관한 관심이 더 많아지고 커지고.
다른 것들을 너무 많이 보고, 예수님을 전하려는 마음도 식습니다.
사실 지금은 핍박을 견디는 시대가 아니라 잠자지 않도록 깨어 있기를 힘써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우리가 믿는 주님이 누구인지를 더 아는 것에 깨어 있어야 하고
대체 내가 믿는 대상이 누구신지, 어떻게 그분을 만나야 하고 믿어야 하는지,
이것을 더 잘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떻게 더 잘 알 수 있을까요?
그중의 하나가 비교의 방법인데, 비교를 통해서 믿는 대상이신 예수님이
얼마나 탁월한지, 얼마나 우월한지, 얼마나 다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의 평판이 좋지 않아 믿는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것이 만약 우리가 믿는 내용이 부족해서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대상이 부족해서라면
우리가 그런 평판에 대해 움츠러들 수 있지만
그러나 오히려 믿는 내용과 대상이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고 놀랍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잘 몰랐음을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
그분을 지혜롭게 전하지 못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믿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고,
그분에 합당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다시 믿고 붙잡고, 또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네다섯 가지 비교를 통해서 바로 알기를 원합니다.
이 천년 역사
먼저 이 천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과 인물들과 예수님을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출생과 성장과 죽음에 있어서는 평범한 사람의 수준에도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아기 때 헤롯의 살해 위협을 받았고,
매우 낙후한 지역인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노동자로 살았고,
끝내는 유대교와 로마의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런 짧은 33년의 생애만 가지고 2천 년 역사 속에 살았던 많은 사람과 비교하면
예수님은 존재와 삶이 너무 초라하고 너무 비천하고 또 비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과연 그런 분이십니까?
그분의 그 33년의 생애를 2천 년이란 긴 역사 속에 두고 다시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는 ,역사를 AD와 BC로, 예수님의 생애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있습니다.
2천 년 역사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기준으로 삼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분이 누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분의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그분은 영토를 넓히거나 땅을 정복하고 많은 이들을 지배하는 식으로
일정한 지역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소프트웨어와 같습니다.
윈도우, IOS, 구글 안드로이드와 같은 운영체제가 수많은 디바이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러 지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내적 구조에 들어가서,
그 시대의 구조를 바꾸게 했고, 자유, 정의, 평등, 해방, 사랑 등의 사상이
사회 구조 속에 스며들어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영향력은 단지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줌으로 사람을 바꾸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 속에 변화가 있었고 달라졌습니다.
<예수의 역사 2000년>이란 책을 썼던 예일대 야로스라브 펠리칸 교수는,
각 시대마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가를 설명하는 그 책의 서문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믿는가에 상관없이
예수님은 2,000년 역사에 우뚝 솟아 있는 분이다.
만일 거대한 자석을 가지고 역사로부터 예수라는 이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쇳조각들을 모아서 제거해 버린다면 도대체 거기에는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그분의 말처럼 2천 년 역사 속에서 예수님과 관련된 것을 다 제거한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누리는 자유, 민주, 평등, 해방, 복지 등은
예수님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기에,
믿든 믿지 않든지 간에 예수님과 전적으로 무관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천년의 역사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님과 비교할수 없습니다.
당대에 대단한 태양과 같았던 이들도 이제는 다 꺼진 불과 같게 되었지만
33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던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빛나는 태양처럼
역사의 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과 같은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예수님에 대한 얼마나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나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그분답게 대하고 있는지요?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가 믿는 그분에 대해서 다시 깨어나게 도우십니다.
죄란 적
우리는 예수님을 주후 2천 년의 시간 속의 다른 존재와 비교할 뿐 아니라,
주전 2천 년 속에서 살았던 이들과,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그 이전의 역사까지 확장해서 예수님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그러나 아주 긴 역사가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각 지역에서 문명과 문화가 생겨나고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문명과 문화는
하나님이 창조 시에 두신 기본적인 질서가 있었기에 세워진 것입니다.
도덕적 양심이란 질서, 사람 간의 윤리적 질서,
사회의 법적 질서와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통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를 이루어 왔고
그들 중에 수많은 영웅도 있고, 거대한 제국을 이루는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삶의 이런 기본적 질서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영역이 세워졌고 돌아가지만
그 모든 영역은 늘 문제가 있어 왔습니다.
사랑을 깨는 미움, 선을 파괴하는 악, 진실을 감추는 거짓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소프트웨어 오작동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죄가 인간의 마음과 삶의 구조에 침투한 타락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의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모두가 병이 든 환자가 된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자기 속의 자연치유력으로 싸우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기본적 삶을 살아가기는 하지만, 갈수록 바이러스의 힘이 강해져서
점점 몸의 여러 부분이 제 기능을 못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후 2천 년, 주전 2천 년, 그 이전에 살았던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입니다.
서로가 선과 악을 나누고 내 편 네 편을 가르며 살지만,
악이란 강은 너와 나 사이를 흐르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를 관통해서 흐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와 악이란 영향력 아래 있는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모두가 다 죄란 애굽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너와 내 속에 있는 이 죄란 적이 있기에,
만약 이것을 모르면 진짜 문제를 모르는 것이고
또 어떤 대단한 일들을 한다고 해도,
죄란 문제를 그대로 두고 있다면 여전히 진짜 중요한 일은 아직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가 죄란 병을 낫게 하는 치료 약을 만들었다면,
누가 사탄이란 우리 모두의 적을 이기고, 죄란 문제를 푼다면,
그는 역사상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가 구원자입니다.
메시아
성경은 그 문제를 푸신 분, 그 적을 이긴 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바로 참 메시아이고, 구원주입니다.
그러면 그는 누구이고 또 어떻게 이 문제를 풉니까?
성경에서 이 구원자는 두 종류의 모습을 가진 자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는 왕의 모습인데, 사자와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왕입니다.
강력한 왕의 모습이 성경의 여러 곳에 나오지만, 대표적 구절이 다니엘서에 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다니엘 7:13-14)
여기서 ‘인자 같은 이’가 나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과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자입니다.
말 그대로 메시아는 무서운 사자와 같은 왕입니다.
또 하나의 모습은 종의 모습으로, 양과 같이 죽임과 고난을 당하는 종입니다.
고난 당하는 종이 모습의 대표적 구절이 이사야서에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4-6)
왜 구원자가 두 모순된 모습을 같이 가지고 있을까요?
적을 이기는 왕과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종은 서로 모순되는데,
어떻게 한 인격이 이 두 모습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지? 또 그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그럴 때만 죄라는 진짜 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왕의 모습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적은 오직 보이는 로마였고,
그 적을 이기는 메시아는 강력한 파워를 가진 왕과 같은 분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그런 왕의 모습을 한 메시아이기를 기대했습니다.
또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로마란 적을 물리쳐주는 강력한 왕이길 기대했습니다.
베드로만 해도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복음 16:16)라고 고백한 직후,
주님이 인자는 고난을 받게 된다고 말하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16:22)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과 베드로는 왕이면 왕이지만, 왕인데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문제는 로마란 적일 뿐이었고 진짜 문제인 죄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누가복음 9:22)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마가복음 9:31)
누구도 왕과 종의 모습이 한 메시아 속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곧 왕과 종의 두 모습을 동시에 가진 존재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메시아는 왕이면서 종이어야 합니까?
왜 사자 같으면서 죽임을 당하는 양이어야 합니까?
또 어떻게 죄란 적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까?
‘나니아 연대기,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란 루이스의 책과 영화 내용입니다.
에드먼드란 아이가 죄를 짓습니다.
나니아 나라에서는 죄를 지은 반역자는 겨울 마녀의 합법적 포로가 되고,
겨울 마녀는 그를 죽일 권리도 가집니다.
그래서 겨울 마녀가 에드먼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겨울 마녀가 아슬란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 적어도 당신은 황제께서 태초에 나니아에 내리신 마법쯤은 알고 있겠지.
모든 반역자는 나의 합법적인 포로로서 나한테 속하며, 죽일 권리도 내게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러니 저 인간은 내 것이오. 그의 목숨은 내가 몰수하겠어. 그의 피 역시 내 소유지.
’"(C.S.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나니아 나라의 법을 따라 에드먼드는 겨울 마녀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자 아슬란이 강력한 힘으로 겨울 마녀를 쳐부수면 됩니까?
하지만 그것은 ‘죄는 벌을 받는다’라는 나니아 나라의 법칙 자체를 어기는 것입니다.
법을 어기는 죄를 통해서 법을 어긴 죄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겨울 마녀가 이렇게 말합니다.
" 네 주인이 단순히 힘으로 내 권리를 뺏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 주인은 심오한 마법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어. 내가 법대로 피를 거두지 않는다면
온 나니아가 발칵 뒤집혀 불과 물로 멸망하리란 것도 알고 있지."(C.S.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에드먼드의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죄는 벌을 받는다는 법을 지키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아슬란이 이런 말을 합니다.
“ 마녀는 심오한 마법을 알긴 하지만 그보다 더 심오한 마법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지.
마녀는 태초 이후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마녀가 태초 이전의 고요와 어둠이 존재하던 때를 조금이라도 더 내다볼 수 있었다면
다른 마법이 있었다는 것도 알았을 게다.
결백한 자가 반역자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치면
돌 탁자는 깨지고 죽음 그 자체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지.” ."(C.S.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그 방법은 죄는 심판을 받는다는 법보다 더 높은 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양력이란 법으로 중력을 이겨서 하늘을 나는 것처럼,
죄인이 벌을 받는다는 심오한 마법보다 더 심오한 마법,
즉 한 의로운 자가 죄인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면
죄인에 대한 죽음이 힘을 잃어버린다는 법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자 아슬란이 죄인 에드먼드를 대신하여 심판의 돌 탁자에 올라갑니다.
사자가 온몸이 다 묶이고 겨울 마녀가 사자의 심장에 칼을 찌르자 사자가 죽습니다.
왕인 사자가 죽임을 당하는 양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흘째 돌 탁자가 깨지고 에드먼드가 죄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런데 나니아 연대기에서 나온 것처럼 겨울 마녀를 이기고
에드먼드를 죄에서 구출하는 그런 일이
동화에서나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났습니까?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자 아스란이 나니아 백성을 대표하는 자로서 어린 양처럼 죽어 에드먼드를 대신했듯이,
사람의 아들 인자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왕이지만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는 종이 되심으로 우리를 대신한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한 죄수가 억울하게 죽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이것은 왕이 종이 됨으로
모든 시대를 통틀어 모든 사람을 붙잡고 있는 죄라는 가장 큰 문제를 푼, 역사적 사건이요,
악이신 사탄을 결정적으로 이긴 승리의 사건이요,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죽임으로 죄인을 살리신 위대한 사랑의 사건이며,
창조 이래의 가장 큰 타락이란 문제를 풀어낸 우주적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세상에 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수없이 많은데,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합니까?
만약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죄의 문제를 풀지 못하면 아직 다 이룬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크라이나 안에서 여러 일을 해도
러시아 공격의 문제를 풀지 않으면 다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러시아의 침공이란 문제를 풀었다면 다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죄의 문제를 풀었다면 가장 중요한 일을 했기에 다 이룬 것이 됩니다.
십자가는 이런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좀 과장된 것 같습니까?
그저 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인데, 어떻게 그 속에 그런 놀라운 의미가 있는지,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 드십니까?
만약 사람들이 말하면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이후 일어난 부활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죽은 분이 부활한 경우는 역사상 예수님이 유일합니다.
다른 분은 없습니다.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분이 부활하신 겁니까?
그 특별한 일은 그분이 분명히 누구와도 다르고
그 십자가 사건도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그 부활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이란 기적이 있음을 보여주자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십자가의 죽음은 자기 죄로 죽은 사건이나 정치적 희생 사건이 아니라,
왕이 백성을 대표하여 종으로 죽음으로 죄의 문제를 풀었고,
사탄을 결정적으로 이긴 것임을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장을 찍으면서 보증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예수님은
타락 이후,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 그러나 반드시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모두의 문제인 죄를 풀고, 모두의 적인 사탄을 결정적으로 이기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과 감히 누구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
무엇이 예수님이 하신 일과 비교될 수 있습니까 ?
누가 사탄의 머리를 부순다는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
십자가의 모양처럼 하늘의 수직선과 땅의 수평선이 만나게 했습니까 ?
누가 예수님과 같습니까 ?
신앙이 흔들릴 때, 열정이 식어갈 때, 우리가 믿는 대상이 누구신지를 다시 알아야 합니다.
이번 주는 두 가지 비교를 통해서 살펴봤지만,
예수님이 왜 우월하고 왜 다르고, 왜 유일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관심이 식은 것은 예수님의 가치가 이전보다 떨어졌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영광이 이전보다 덜해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고, 그분을 보는 눈이 희미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세상에 알려주지 못한 것입니다.
'차선은 최선의 최대의 적'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편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선, 차차선과 같은 좋은 것들 때문에 최선을 놓치고,
비교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 때문에 비교할 수 없는 한 분을 놓치고,
상대적인 것들 때문에 절대적인 한 분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는 것이 맞을까요? 이렇게 신앙이 서서히 식어가도록 내버려 두면 될까요?
핍박의 시대는 견뎌야 하지만, 편안의 시대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마음의 눈을 노크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신앙의 열정이 식어갈 때, 우리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누구신지 다시 깨달읍시다.
그래서 최선이신 주님을, 절대이신 주님을, 비교를 불허하는 예수님을 다시 깨닫고 붙듭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깊게 깨닫게 되므로
이번 새생명축제를 통해 예수님을 다시 널리 전합시다. 이런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2년 10월2일 설교 (정현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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