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먹고 산다.
출 13:3~1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급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
아빕월 이 날에 너희가 나왔으니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달에 이 예식을 지켜
이레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
이레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
너는 그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눅 24:13 ~27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 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남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설날은 추석과 함께 우리 민족 최대 명절인데
이번 명절은 주말 연휴와 연결되면 거의 일주일 정도 쉬게 되니
이전 같으면 해외여행을 가는 이들로 인천공항이 북새통을 이뤘겠지만,
코로나 인해 , 줌으로 세배를 드리고 인터넷으로 세뱃돈을 보내는 진풍경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긴 명절인데도 , 우리의 이 명절은 이야기가 없는,
그냥 반복되는 농업과 월력과 관련된 농업 절기로
한 민족 공동체가 공유하고 전승하는 어떤 스토리가 없는 명절입니다.
그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그동안 우리는, 서로 얼굴 보고 밥을 먹으면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살았던 이야기를 듣고,
자녀들이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서로는 밥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배불리 먹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먹었던 이야기를 누가 어땠데, 저랬데 그렇게 소화하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명절이 아니라도 늘 누군가를 만나고 만나기 위해 가끔은 커피숖으로 갑니다.
커피가 씁쓸 달콤하듯이, 우리들은 씁쓸 달콤한 그런 이야기를 커피와 함께 마시며 삽니다.
상품을 구매를 할 때도 그냥 제품만 사지 않고 ,
그 속에 담겨있는 스토리를 함께 구매하여. 우리는 상품만이 아닌 이야기를 소비하며 삽니다.
요즘은 취업 면접을 볼 때도 면접관이 이력서 상의 스펙만 보지 않고 스토리를 듣고자 합니다.
이력서 상의 화려한 스펙보다 실패의 경험이 담긴 스토리를 듣고,
그 스토리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판단하고 그를 채용한다고 합니다.
이래 저래 우리는 이야기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서 『스토리 텔링 애니멀』이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야기를 먹고 마시고 소비하면서 살아가기에,
어떤 이야기는 우리를 자라게 하고 어떤 형태의 사람이 되게 만드는 양식이 됩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엄마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고, 이야기를 듣다가 이야기에 배가 불러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이야기를 고파하며, 맛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 좋게 배부릅니다.
최근 씽어 게인에서 우승한 이승윤, 정홍일 씨 두 가수의, 노래도 들었지만
무명으로 지냈던 시절, 힘들게 살아왔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이야기에 배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매일 유튜브를 통해 그런 맛있는 이야기를 찾아다니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은 어떤 이야기가 때로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어릴 적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 이야기가 노예 해방을 결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 이야기가 링컨으로 하여금 노예 해방의 이야기를 역사 속에 실제로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히틀러는 , 게르만 민족 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많이 봤고, 또 반유대주의적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그의 생각을 만들었고, 결국 잔혹한 스토리를 만드는 인물이 되게 했습니다.
오래전 북한의 한 유치원을 방문했을 때,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김일성의 은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한 후에야 밥을 먹게 하는 것을 봤습니다.
어릴 적 매일 밥과 함께 김일성 찬양을 먹이며 키우니 어떤 생각이 형성되겠습니까?
이렇게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사는가, 어떤 이야기를 매일 먹고 사느냐가 우리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듣는다고 할 때 달랑 그 이야기만 하나만 듣는 것은 아니라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더 큰 이야기를 함께 듣습니다.
어떤 이야기이든지 그 이야기는, 그 이야기와 연결된 다른 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큰 이야기가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마치 한 문장을 이해하려면 때 그 문장이 위치한 맥락을 알아야 하듯, 어떤 그림을 보면 그 배경이 있듯이,
어떤 이야기든지 그 이야기를 감싸는 더 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가족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사회의 이야기, 시대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살고, 또 내 이야기를 쓰면서 살아가는데
그 이야기의 의미가 옳으냐 그르냐는, 이야기 자체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와 연결된 큰 이야기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우리들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연결되는 이야기들 중에는,
이 세상은 그냥 존재하고 물질적 법칙을 따라 굴러간다는 무신론적 진화론 이야기이거나,
모든 것이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라 움직인다고 하는 이야기이거나,
창조와 타락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같은 죽음도 어떤 큰 이야기와 연결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죽음이 소멸과 망각이 될 수 있고, 윤회의 과정의 일부일 수도 있고,
삶의 완성과 부활을 향한 여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보듯이,
두 사람의 죽음은 천국 지옥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땅의 평가와 완전히 다른 평가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푸틴처럼 권력을 쥐락펴락하며 정적을 은밀히 살해하며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를 무신론적 진화론 이야기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라 사는 영악한 존재이지만,
다음 세상이 있다는 큰 이야기에 연결하면 , 그는 자기 위에 심판을 계속 쌓아가는 어리석은 존재가 됩니다.
유튜브에 타 큐멘 터리 영화로 나와 있는 <아픈 만큼 사랑한다>가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선교하신 박 누가 의료선교사의 이야기인데. 저는 참 매우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필리핀에서 선교하다가 풍토병도 앓았고, 나중에는 암도 앓았지만 끝까지 의료선교사의 길을 갑니다.
그 이유는 그가 아파보니 더 아픈 환자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아파보니 아픈 만큼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무신론적 진화론 이야기에 연결하면, 그는 생을 낭비하며 산 허무한 삶이란 느낌이 오지만,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 연결하면 그는 가장 값진 생을 창조하며 산 존재가 됩니다.
어떤 이야기가 참인가?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의 의미가 큰 이야기와 연결되어 결정된다면,
나는 어떤 큰 이야기와 연결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큰 이야기를 인생관,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그런 큰 이야기들 중에 대체 어떤 것이 정말 참된 이야기입니까?
사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어떤 하나의 이야기를 전제로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상반된 두 이야기를 동시에 택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어떤 큰 이야기를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창문으로 삼고,
그것을 따라 내 이야기를 써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체 어떤 이야기가 참된 이야기인가?
이런 고민을 먼저 했던 사람이 C.S. 루이스입니다.
처음 그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종교가 말하는 이야기는 다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인 톨킨과의 만남과 대화를 가집니다.
수많은 나라의 신화와 종교의 이야기를 잘 알았던 그는 많은 종교나 나라들이 다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는 공통점도 있고, 또 나름의 진리의 씨앗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형태이지만 권선징악과 같은 진리도 있고 신이 인간이 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단군신화도 그런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교훈을 담고 있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것이 현실과 사실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예수님 안에서 많은 곳에 흩어져 있었던 이야기들이
비로소 사실과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왜 다른 종교는 거짓이고 기독교만 참인가,
이런 각도로 생각하지 않고, 대부분의 종교와 나라들이 가진 신화와 이야기들이
비로소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고 성숙과 완성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삶의 이야기로 삼고,
그 창문으로 세상을 보고 글을 써가고 삶을 살아갑니다.
실로 그러합니다. 여러 이야기, 신화들에도 나름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명한 이야기는 오직 복음 이야기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가 우리가 붙들어야 할 참된 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 이야기가 참된 이야기임을 믿고,
그 이야기란 창문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가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도 사실 그냥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 이야기 안에서 보고 느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일은 주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부활하셨다는 것은 십자가가 곧 죄를 이긴 승리요,
부활하신 주님이, 주가 되어 통치하고 다시 세상을 회복하는 재창조가 온다는 뜻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쓰인 하나님의 이야기, 또 쓰실 하나님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그 이야기를 통해서 이 세상을 소망으로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 회복의 이야기의 한 인물로서 산다고 생각하고
주중의 삶의 이야기를 써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 이야기 안에서 내 역할을 찾고 삶의 이야기를 써가다가
그 나라의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생명 책에 내 이름이 기록된다는 의미입니다.
절기 이야기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여러 이야기들을 듣고 그것을 따라 이야기를 쓰면서 살기 때문에,
계속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듣고 또 들려주라고 하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400여년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애굽 왕들의 이야기, 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았고
그것을 통해서 삶과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굽 땅에서 그들은 그런 이야기만 듣지 않고
아브라함이란 조상의 이야기,
그를 부르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들의 마음속에 담긴 그 이야기의 장작에 모세가 점화를 시켰고,
결국 출애굽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곳에서도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계속 듣게 하십니다.
가나안 땅에서 우리의 설날 추석과 같은 명절이 있었습니다.
그 절기는 다 농업 절기였고 그 절기에 담기는 어떤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농업절기 속에 출애굽 이야기를 담습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리고 그 절기를 지킴으로, 그 이야기를 계속 먹고 마시게 하시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보고 생각하고 살게 합니다.
애굽에서 벗어났던 사건을 기억하는, 광복절과 같은 유월절 명절을 지킬 때
그들은 그냥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양고기와, 누룩이 없는 빵을 먹으면서 온 몸으로 출애굽 이야기를 체험하고 먹고 마십니다.
장막절의 경우는, 땅에서 난 곡식이 하늘이 내려 준 것임을 감사하게 하며
또한 집 안의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면서 ,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쓰였던 이야기를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큰 이야기인 하나님의 이야기를 늘 기억하게 함으로,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바른 창문을 갖게 하셨고, 그들의 바른 이야기를 써가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도 그들은 나라의 멸망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때 그들의 가나안 땅에서 살았던 역사를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보면서,
아담 이야기와 연결시켜 생각하며, 비로소 자신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포로생활 70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그동안 정착하여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게 됩니다.
성 만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이야기를 기억하는 절기인데,
이때 주님은 양고기 대신 빵을 떼어주시면서 빵을 자신의 몸이라고,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유월절 이야기 속의 어린양이 사실 자기 자신이며,
앞으로 자신을 통해서 영적 출애굽이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와 연결시켜 바로 이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로마의 이야기로 보면 , 로마에 반역한 한 반역자의 죽음이고.
발리새 유대인의 이야기로 보면, 성전 모독 죄로 나무에 달려 죽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이야기와 연결시키면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세상을 구원하신 영적 출애굽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은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행하게 하십니다.
즉 십자가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큰 이야기를 계속 듣고
그것을 먹고 마시고 그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보고,
그 이야기를 이어 써가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야기 분별자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먹고 소비하며 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는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큰 이야기를 함께 듣고 먹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세계관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습득하듯이,
이 세상이 영웅으로 만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의 관점을 자연스럽게 마시듯이
그렇게 우리는 큰 이야기 속에 흡수되어 갑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그 이야기와 연결된 큰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통해서 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의 이야기도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사태를 생각할 때도
이것이 2019년에 우연히 발생한 전염병 이야기로 볼 수 있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창 조세 게를 파괴하면서 살아왔던 자원수탈적인 문명,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떠난 인간의 삶에 대해,
그런 이야기가 계속 써지지 않도록 진행을 멈추게 만든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바른 의미를 안다면, 우리는 코로나의 대안도 바로 알게 됩니다.
그 대답은 단지 백신과 사람 간 거리두기를 넘어,
생태파괴적 삶의 방식으로부터의 거리두기와 , 복음이란 백신을 맞는 것입니다.
이야기 생산자
우리는 수많은 남의 이야기들을 듣고 먹고 소비하고 살아갑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찾고 소비합니다. 우리가 소비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의 영향을 받을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된 좋은 이야기를 생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요셉이 17세에 애급에 종으로 팔려가서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가 110세에 애굽에서 죽을 때 자신의 시신을 애굽에서 옮겨가 달라고 유언을 합니다.
창세기는 천지를 창조하는 장엄한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요셉의 유언이란 감동적 이야기로 막을 내립니다.
그의 이야기가 감동적인 것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어떤 이야기와 연결해서 봤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애굽에서 최고 인물이었고 최고의 대우를 받고 애굽의 역사에서 영웅으로 기록될 사람입니다.
만약 자신을 그런 애굽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생각했다면 그는 자신을 높이고 스스로를 주인공처럼 여겨,
유골을 애굽 밖으로 가져가라고 유언하지 않고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생각했고,
자신은 하나님이 주인공이 된 이야기 속에서 한 등장인물이었음을,
그 이야기를 써가는 한 역할을 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 죽어서도 동참하겠다고,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다고 하여 자기 유골을 애굽에서 가져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겸손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 자기가 주인공과 영웅이 되는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이들을 세우는
그런 향기로운 이야기를 교회와 성도들이 생산해야 합니다.
세상이 만든 이야기를 소비만 하지 말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의 큰 이야기 속에 흡수되지 말고,
나는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일 뿐임을 고백하는 이야기들,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한 후에도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야기들,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생산하는 성도들, 교회들이 되어야 합니다.
큰 고난 중에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 나라로 인하여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가고 유통해야 합니다.
신촌 세브란스에 김선은 집사님을 심방했을 때 들었던,
항암 투병 중에도 전도하는 이야기, 그 상황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이야기,
매우 힘들지만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공유되고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려면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우리들은 예수님 이야기, 예수님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더욱 붙들고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쓰인 하나님의 이야기,
또 앞으로 완성될 그 이야기를 잘 듣고 감동하며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주로 듣고 계십니까? 또 어떤 이야기를 써가고 계십니까?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나를 그 이야기 안의 한 등장인물로 생각하면서
가정과 교회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써가며
주위에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2021년 2월 14일 설교말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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