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신명기 8장 1-20),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세상 광야
코로나가 온 세상을 광야로 만들었습니다.
커피향 가득한 커피점도 화려한 쇼핑몰도, 잘 조성된 공원도,
모여 얼굴을 보며 웃음꽃을 피울 수 없는 광야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세상을 이러한 광야로 만들었습니까?
코로나입니까? 아니면 그동안 자연에 대해 보여준 광야 같은 사람의 마음입니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이지만, 코로나 위험이 가장 높은 광야가 되었고,
여전히 흑인들과 유색인종들이 차별을 받는 광야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일부 백인들의 유색인종 차별이란 광야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정인이 사건으로 슬퍼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겨우 472일을 살다 간 정인이에게 세상은 너무나 차가운 광야였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말도 못하는 아이를 함부로 대하고 자기 아이와 같은 생명으로 보지 않는 양부모의 싸늘한 광야 같은 마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애급은 나일강이란 풍요의 젖줄이 흐르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땅이 많은 이들에게 죽음의 거친 광야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갑자기 찾아온 흉년 때문입니까?
바로의 폭력이란 광야 마음, 애굽인들의 타국민을 학대하는 광야같은 마음 때문입니까?
‘옥시모론’(Oxymoron)이란 어법이 있습니다.
옥시는 총명하다는 뜻이고, 모론은 바보 같다는 뜻인데,
두 모순된 단어를 결합하여 역설적 의미를 전달하는 어법입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 ‘똑똑한 바보’가 그런 예인데, 애굽을 ‘풍요의 광야’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풍요의 땅’이지만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광야가 되어 버린 애굽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게될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부르십니다.
그곳을 애굽 광야와 다른 참 사랑과 행복의 꽃이 피는 동산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바로 가게 하지 않으시고
시내산에서 머물며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그리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한 목적은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려고,
즉 그들의 마음이 광야인지 아닌지 보게 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광야 마음을 고치려고 하신 이유는
광야 마음 그대로 가나안으로 가면,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또 다른 애굽이란 광야로 만들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비가 자녀를 훈련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광야를 그들을 고치는 훈련장으로 삼으십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신 8:5).
그러면 광야 마음을 고치는 훈련을 위해 어떻게 하셨을까요?
알다시피 오래 형성된 습관들은 몇 번의 지식 교육으로 바뀔 수 없고,습관은 습관으로만 바꿀 수 있기에
하나님은 애굽에서 400년간 형성된 습관을 ,광야에서의 40년간의 훈련을 통해 바꾸시려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나름의 생각의 방식, 말하는 방식, 감정의 습관이 있어서, 이것을 바꾸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지식이나 생각이나 각오만으로 결코 되지 않고, 대안적 습관을 꾸준히 반복하는 것만이 답입니다.
매일 성경 읽기, 매일 기도하기, 매일 감사제목 쓰기와 같은 반복되는 습관만이 오래된 습관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매일 매주 반복되는 훈련을 하시는데, 그것이 만나 훈련과 안식일 훈련입니다.
광야의 만나
먼저 만나 훈련입니다. 즉 매일 먹는 것을 통한 훈련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후 얼마되지 않아 애굽에서 가져 나온 음식이 떨어지자
그들은 즉각 애굽에서 나온 사실 자체를 원망하고 후회합니다.
조금 전까지 주어진 꿈과 비전에 흥분했던 그들이었는데, 잠시 배고픈 것 앞에서
꿈도 비전도 자유도 다 버리고, 배만 부르면 된다는 반응이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옵니다.
마음 속의 광야가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슬이 하늘에서 내리듯이 양식(만나)을 베풉니다.(출 16:12~)
그 양식이 땅에 쫙 깔리자 그들은 즉각 달려가서 그 만나를 정신없이 주워 담았습니다.
내일 것까지, 일주일 것까지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자기 광주리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힘있는 사람은 많이 거두고 힘없는 사람은 적게 거두어
많은 거둔 이는 창고를 만들어 저장하고, 그렇지 않는 이들은 굶거나 빌리거나 그들의 종이 됩니다.
다시 마음의 광야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마음의 광야가 제도화된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애굽입니다.
풍요의 땅 애굽이 광야가 된 것은 바로 이런 광야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되, 이틀 치를 거두지 못하게 하십니다.
더 거둔 것도 소용이 없게 하십니다.
이렇게 매일 일용할 만나를 거두고 먹으면서 광야 40년을 지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 8:4).
즉 애굽의 방식대로 살았다면 광야에서 다수가 굶어 죽었겠지만,
만나의 방식으로 살아갔더니 다 살았고, 광야도 광야가 아닌 것처럼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반복되는 매일의 만나 훈련을 통해 마음 광야를 바꾸신 것입니다.
만나 훈련은 매일 일용할 분량을 거두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훈련의 내용은 그 이름에 잘 담겨 있습니다.
그 이름이 만나인데 그렇게 불려진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고 그후에 그 이슬이 걷히면 작고 둥근 서리 모양의 음식이 땅에 깔리자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출 16:15)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 그 질문이 곧 만나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란 질문이 곧 음식 이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모세가 답합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출 16:15)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음식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성경은 계속 만나란 질문을 이름으로 끝까지 사용했을까요?
이것은 그들은 매일 땅 위에 내린 음식을 먹으며 이것은 무엇인가 물었고
또 매일 이것은 하늘이 주신 양식이라는 답을 들어야 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40년을 산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사는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음식부터 생활용품 각종 소비재들을 가지고 우리는 삽니다.
이것들이 광야 세상을 살게 하는 각종 만나들입니다.
그 각종 물품들은 각각의 이름이 있지만, 사실 공통의 이름은 ‘만나’입니다.
다양한 음식을 먹고 다양한 것들을 사용할 때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무엇을 위해 주어진 것인가?” 이렇게 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로 어떻게 답합니까?
이것은 땅에서 나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상품이다. 내가 번 내 것이다, 이렇게 대부분 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고 사용하도록 주신 양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 8:17-18)
만약 우리가 땅이 나는 모든 식량들은, 인간이 만든 다양한 상품들을 향하여 이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묻는다면,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만나를 먹을 때 이틀 치를 거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축적해 놓은 것으로 살지 않고 매일 베푸시는 은총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준비해 두어도 하나님이 오늘 불러가시면 나는 가야 합니다.
또 이틀치를 거두지 못하게 한 것은, 만나는 너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매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독점을 금지함으로 이웃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나 정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땅의 모든 만나들은 궁극적으로 하늘이 주신 양식이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즉 나는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만나들은 모두를 위한 것이니,
만나를 내가 먹을 때마다 그 만나를 먹어야 할 남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래 하나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말도 있지만, 밥 한 톨 속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진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만나를 먹는다면 그는 육의 만나만 먹지 않고 정신의 만나도 함께 먹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소유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그는 소유만으로 살지 않고 소유의 바른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의 만나만 먹으면 육체만 자라지만, 정신의 만나를 함께 먹으면 영혼도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3). 이 말씀을 예수님도 인용하셨는데, 이 말씀은 떡은 필요 없고 오직 말씀만 읽고 묵상하고 살라는 뜻입니까?
그 모든 만나들을 먹고 입고 사용할 때, 그 만나의 의미를 말씀을 통해 바로 깨닫고 그 정신으로 산다면,
그는 만나를 먹으면서 동시에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적 생명만이 아닌 영적 생명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게 합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나 삶의 관계를 에덴이 되게 합니다.
안식일 정신
하나님께서는 만나 훈련을 안식일 훈련과 같이 하셨습니다.
만나를 거둘 때 안식일에는 거두지 못하게 하시고 ,대신 엿 셋째 날은 이틀 치를 거둘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거둔 것은 다음 날에도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안식일 하루 일하지 않았는데도 살 수 있다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내 힘, 내가 축적한 것으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매주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년을 위해 잘 준비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내 생명을 거둬 가시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또 안식일을 지키면서 매주 엿새 창조 후에 쉬신 하나님의 쉼을 기념합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만들어진 창조물의 크기나 수량의 확장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목적은 창조된 모든 것들의 조화와 그로 인한 행복과 안식이었습니다.
즉 쉼이, 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쉼과 평화와 샬롬을 위해 있는 것임을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매주 삶의 중심이 바른지 그른지를 점검하고 다시 회복합니다.
그래서 엿새 간의 삶이 그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들고,
그 목적과 상관이 없는 낭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부유층, 엘리트 층은 중산층이 일하게 만들고 자기는 쉬었는데,
이제는 엘리트 층도 자기가 자기를 쉬지 못하도록 계속 성취 자체를 향하여 달려가도록 자기가 자기를 착취해야 한답니다.
이에 따라 중산층도 역시 쉼과 행복이 사라지고 있어서, 이 사회는 모든 이에게서 샬롬과 안식을 앗아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근로시간이 많이 줄어 육체는 더 쉬게 되었지만, 정신은 더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의 중심이 바르게 되지 못하여 참된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매주 안식이란 중심으로 삶이 돌아오는 훈련을 하지 않고,
일 자체, 성취 자체, 소유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면,
샬롬, 평화, 안식이 우선순위가 되지 않으면, 이 땅은 안식이 없는 애굽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드 코로나 시대, 비대면으로 집에서 주일을 지키는데,
이 주일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주일을 붙들어 한 해의 시간이 허무로 떠내려가지 않게 하십시오.
예배하는 가정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가 되게 하시고,
예배하는 두 세 사람의 가족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십시오.
주일이란 시간의 중심을 붙듦으로 한 해를 낭비하지 말게 하십시오.
우리는 광야를 만드느냐 바꾸느냐?
우리가 앞서 정인이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만,
이 세상은 정인이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정인이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정인이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자신이 정인이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자기를 죽이는 자살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너무나 안타까운 정인이 사건입니다.
통계를 보니까 지금도 하루 평균 38명 정도가 자살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의 경우는 20-30대 자살율이 60%가 더 늘었다고 합니다. 여전히 우리 나라는 자살률이 세계 1위입니다.
한국은 이제 부러움을 받는 풍요의 나라가 되었고, 서울은 없는 것이 없는 세계적으로 화려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은 이들이 죽는 너무나 거친 광야입니다.
이 나라와 이 도시는 “풍요란 이름을 가진 거친 광야”입니다.
왜 광야가 되었습니까?
한강이란 젖줄이 말라서입니까? 서울이란 땅이 갑자기 척박해져서입니까?
광야 마음이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심리학에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의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소한 것에는 큰 관심을 갖지만 정작 큰 것에 대해서는 사소한 관심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웃 집과의 소소한 문제에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만, 한 해 만4천명이 자살로 목숨을 잃는다는 큰 것에 대해서는 무덤덤합니다.
한 명의 죽음은 큰 비극으로 보지만 ,십만 명의 죽음은 그저 통계 숫자로만 보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엄청난 관심을 쏟지만, 남의 큰 일에 대해서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면,
그런 광야 마음은 광야 세상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정인이 사건을 두고 정인아,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라고 하면서 정인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마음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책임감을 느낀다면, 우리는 내가 있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사회의 각 영역에서
나는 매일 그곳을 조금씩 광야로 만드는 점은 없는지,
매일 조금씩 그 광야 세상은 바꾸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내 광야 마음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이것이 매우 힘듭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 광야 세상을 살면서 매일 만나 훈련, 매주 안식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
매일 여러 음식을 먹을 때마다, 매일 다양한 제품을 사용할 때마다, 매일 돈을 벌면서 살 때마다,
‘이것이 무엇인가’ 물어야 합니다. ‘이것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이 사라지면 우리 마음은 굳어지고 점점 광야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본질을 계속 상기시키는 이 질문이 우리의 마음을 기경하는 써레질이 됩니다.
이 질문이 우리가 떡만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합니다.
십일조는, 내 소유라는 만나에 대해 ‘이것이 무엇이뇨?’라고 매번 질문하는 것이고,
그 질문에 대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매번 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식사기도를 합니다.
음식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나만이 아닌 남들을 위해서도 주신 것이다.이것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이렇게 만나훈련이 만든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나는 육체만 살지 않고 영혼도 사는 것이고,
나는 광야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광야 세상을 바꾸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만나사건을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다시 재현하십니다.
한 소년이 내어 놓은 일 인분 도시락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면 그 오천명이 먹은 음식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한 아이에게서 온 것입니까? 예수님에게서 온 것입니까 ?땅에서 온 것입니까? 하늘에서 내리신 것입니까?
한 아이에게서 온 것이지만 사실 예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한 아이의 도시락이란 ,땅에서 온 것이지만, 사실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번 것, 소유한 것,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청지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오병이어를 주셨습니까?
나를 살게 하려고 주신 것이지만, 그것은 나만이 아닌 오천 명을 먹이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만나는 나를 살게 하면서 너를 살리라고 주어진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우리가 가진 다양한 만나로 사는데, 만나의 의미가 ,내가 살고 남을 살리는 하나님의 것임을 안다면,
그 마음은 먹을 것 없던 광야를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만나 사건을 오병이어 사건과 연결하시고 또 자신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하십니다.
우리는 이 죄악 세상을 내 힘으로 내 공로로 내 도덕으로 내 소유로 살고 구원을 얻는다고 여기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란 하늘 만나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또 구원 얻은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살리는 만나로 주셨듯이,
우리도 남을 살리는 만나로 내어주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이란 만나를 먹고살고, 남을 위한 만나가 되어 남을 살리며 사는 것을,
매번 성만찬을 통해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광야 세상을 걸어갈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을 가지고,
밥 한 톨 속에 숨겨진 깊은 뜻을 가지고 우리의 광야 마음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 마음을 바꾸면 우리 가정도 바뀝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주신 참된 만나라고 믿고
또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살리는 만나를 되려고 한다면,
광야 같은 가정도 장미꽃 피는 꽃동산이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면 우리 교회도 바뀝니다.
서로가,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구역장님, 집사님, 성도 여러분, 당신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신 만나입니다.
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섬기면서 당신을 힘나게 하는 만나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면, 아무리 세상이 거친 광야라도
우리는 교회를 감사와 행복의 꽃들이 피는 이 땅의 작은 천국 동산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매일 주일을 지키면서 안식을 중심에 둔다면, 주님을 중심에 둔다면,
그것을 중심으로 삶이 움직이게 한다면, 우리가 참된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한 해 광야 세상을 지나가지만...
불평만 하며 좌절만 하며 가지 마십시오.
광야 세상을 통과하면서 내 마음마저 더 광야가 된다면, 이것은 이중적 실패요 KO패입니다.
광야세상을 광야 마음을 바꾸는 기회로 삼는다면, 그 바뀐 마음으로 광야를 바꾸며 살 수 있다면
이것은 이중적 승리요, KO 승리입니다.
이 한 해 여전히 광야의 세상을 가지만, 내 광야 마음을 더 많이 바꾸십시오.
그리고 그 어느 광야 세상이던 그곳을 조금씩 바꾸며 사는
그런 승리, 은혜, 감사가 이 한 해 넘치시길 바랍니다.
2021.1.10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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