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동행

왕언니 2021. 1. 13. 15:10

 

 

출 34: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산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코로나로 달라진 새해

 

작년 일 년 동안 코로나가 온 세상을 엄청나게 바꿔 놓았습니다.

나비효과란 말처럼 우한의 한 사람의 재채기가 온 세상에 부는 태풍이 되었습니다.

 

이어령 교수의 신년대담이 신문에 났는데,

그는 코로나 상황을 “탄타로스의 형벌”로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탄타로스가 받는 형벌은 자기 눈앞에 물이 넘실거리는데

마시려고 하면 물이 물러나버린다는 그런 형벌입니다.

 

지금 우리가 바로 눈앞에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두고도,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려도,. 접속은 되지만 ‘접촉’은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온라인상의 만남이 꼭 탄타로스 형벌과 같다고 했습니다.

 

<코로나 사피엔스>란 말이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사람으로 나눠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이전까지 당연했던 아날로그적 인간관계를 완전히 회복하기는 어렵고,

디지털과 아날로그 중의 택일이 아닌 둘을 상호 보완하는

‘디지로그’적 관계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달라진 신인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심히 달라진 새해를 맞이하다 보니 그냥 ‘희망찬 새해’라고만 말하기가 좀 힘듭니다.

오히려 매우 불확실하고 매우 불안한 새해라고 해야 맞을 겁니다.

게다가 코로나가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세계화, 도시화, 소비화로 인해 필연적으로 온 것이라고 하니,

코로나가 다시 재현되지 않으려면, 코로나 이전의 삶을 바꿔야만 하는

과제까지 안게 되었으니, 이전보다 더욱 힘들어진 새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달라지다 보니 코로나 이전 삶의 지도가 이제는 이전 같지 못합니다.

그 지도를 따라가면 길을 찾기도 하지만 오히려 길을 잃는 경우도 생깁니다.

점점 이전 지도의 효용가치가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동행자입니다.

이것이 코로나 이후의 우리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과거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이랬습니다.

애굽을 나온 그들에게 이전의 애굽 지도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었기에 그들에게는 가나안이란 목적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더 중요했고,

그곳으로 인도해주는 동행자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역할을 맡기시면서 동시에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소이지만 이동 가능한 천막입니다.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뜻은 그들이 가나안으로 갈 때, 보이는 모세만 보지 말고,

보이지는 않지만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향한 나그네들입니다.

새해란 땅을 향해 갈 때 가족들, 교우들, 친구들이란 동행자들과 함께 걷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동행자들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동행자 하나님을 보면서 가야 합니다.

다른 이들과의  동행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동행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 하나님과의 동행을 의식하며 가야만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이끌며 동행하실까요?

 

첫째 하나님은 깨닫게 하시며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후 성막을 마련하라고 하셨는데,

이 성막의 자세한 지침과 설계도를 주시기 위해서,

또 언약궤 안에 넣을 언약 문서 십계명 두 돌판을 주시기 위해 시내산 위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 위에 있는 동안 땅 아래서 큰 문제가 생깁니다.

백성들이 그 사이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들이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요?

눈 앞에 아무 신상도 없는데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 것이 어려워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형상으로 신을 만드는데 그 형상이 송아지 모양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애굽에 황소 형상의 신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든다면 결국 자기가 신이라고 여기는 이미지,

즉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욕망을 형상화하는 것이고

그 신을 섬기면 결국 하나님이 아닌 자기 생각을 숭배하고, 그 생각의 지배를 받고,

욕망을 숭배하고 , 욕망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 우상에 포박당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여러 문화들은 미신을 포함한 그릇된 가치에 포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은

그 이름을 여호와, 야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있는 자’란 뜻입니다.

이 이름은 영어로 말하자면 그냥 I AM입니다. 보어가 없습니다.

 

즉 피조물을 지칭하는 어떤 이름으로 붙일 수 없고,

피조물의 어떤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란 뜻입니다.

또한 보어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양하게 자기를 계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이름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믿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기 민족만 챙겨주는 그런 민족 신의 이미지로 생각했고,

우리도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틀 안에 가두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상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고 있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금송아지 제작이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단순한 신상 제작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 마음 깊은 죄성과 마음의 깊은 어둠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정말 그들이 믿는 신이 무엇인지를 폭로하는 사건인 셈입니다.

그런 숨겨진 깊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없고,

간다고 해도 그 땅에서 또 다른 애굽을 만들고 말 것입니다.

 

실제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을 만드는

가장 깊은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면 여전히 바른 답과 해결에서 멉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깊은 문제는 무엇입니까?

 

올해가 소띠 해이지만, 월가에 세워진 그런 황금소를 신처럼 섬기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우상숭배가 우리 시대의 가장 근원적 문제라는 것은 거의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만 이런저런 편한 이야기만 하면서 동행하시는 게 아니라

동행하며 대화하실 때 우리 안의 금송아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예리한 말씀의 수술칼로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시고,

환한 빛으로 우리 안의 깊은 어둠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그 동행이 힘들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동행이 나를 살립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큐티를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듣고 끝나면 나의 깊은 문제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듣고 읽어야 합니다.

질문하면서 듣는 것이 능동적 듣기를 만듭니다.

하나님은 보시지만 제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제 안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고 동행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런 동행함이 없으면

한 해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남도 다 아는 내 문제를 자기만 여전히 모릅니다.

하지만 동행이 있으면 하나님이 아시는 깊은 나의 진짜 문제까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참으로 달라지고 참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 복된 동행의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동행은 회복시키는 동행입니다.

 

하나님은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 드러난 깊은 문제를 치료하고 회복시키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십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섬기고,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은 노예였던 그들을 최고의 나라 백성으로 격상시킨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무리의 왕으로 격하된 언약, 백성들을 위한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언약을 백성들이 파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하지만 진노하시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노는 하시지만 언약 자체는 아직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깨뜨린 언약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도 그 언약을 파기하신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백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게 된다면, 하나님과 그들은 상관이 없어진다면,...

이것이 가장 큰 심판입니다.

 

우리도 계속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리 편에서 언약을 파기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강압적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 밖에서 두드리시지만 우리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계속 우리 안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면

결국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게 됩니다.

계속 언약을 파기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존재로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진노이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지옥인 것입니다.

이런 심판의 상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도록,

이 백성들이 하나님이 없이 사는 백성이 되는 그런 심판에서 건짐을 받도록 기도합니다.

백성들이 비록 언약을 깨뜨리고 우상을 신처럼 섬겼지만,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셔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어,

그들과 다시 동행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하십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시고 그 언약을 깨지 않으시고 유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을 자신의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 마음을 돌이키고 언약을 유지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일까요?

하나님 편에서 아무런 감정의 고통도 없이 마음을 그냥 돌이키셨을까요?

금송아지 사건이 은혜에 대한 극심한 배신인데, 이런 백성을 용납하려고 할 때

감정이 없다면 몰라도 인간보다 더 순수한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에

분명히 매우 아픈 감정의 고통을 가졌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이어령 신년 대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모두 울었다. 그 사랑과 참회의 눈물이 메마른 사막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코로나 주술을 이길 유일한 길은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뿐이다”.(이어령 신년대담)

 

이어지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땀’은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을 이룬 산업화의 뜻이고,

‘피’는 억압에서 풀려난 민주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면, 눈물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쳐 인간관계가 더욱 악화되고 있는

이 현실을 치유하는 상징이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속담도 있고 회초리보다 무서운 것이

엄마의 눈물이라는 말도 있고, 사랑의 눈물 한 방울이 마법에 걸린 왕자를 주술에서 풀려나게 한다는 서양 동화도 있지만,

지금 코로나 19라는 주술에 걸린 인류를 풀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코로나 백신은 과학기술과 기업이 만들어내겠지만

코로나로 상처 난 마음과 영혼을 정화할 백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을 위해서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이다.

 

이 세상에 코끼리나 낙타도 눈물을 흘린다고는 하지만 실제 이 지상에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고,

지능이나 체력이 인간보다 월등한 AI 슈퍼 로봇도 눈물만은 흘릴 줄 모르지만, 오직 영혼을 지닌 인간만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그 눈물이 자기만을 위한 눈물이라면 무력하고 부끄러운 것이지만, 만약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라면

그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다. 지금 바로 그런 눈물이 필요하다.”

 

눈물 한 방울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힘이요 가장 효과적인 백신이다, 참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합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정말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 늘 쓰러집니다.

그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를 끝까지 자녀로 삼으시고 언약을 깨지 않으십니다.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탄식한다는 것은 우신다는 뜻입니다.

배반하는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눈물 방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신약’은 새 언약이란 의미입니다.

우리 편에서 파기한 언약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다시 언약을 갱신해서

유효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성령의 눈물방울만이 아닌 성자의 핏방울도 흘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나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나를 회복하시면서 동행하십니다.

새해지만 여전히 힘들어서 일어나지 못하겠다는 분이 있습니까?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 방울이 있다는 것을,

아니 나를 위해 흘리는 핏방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일어날 힘이 생길 것입니다.

 

이 한 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

오히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다고 고백하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깊은 문제를 드러내신 후, 문제를 고치시고 상처를 치유하시면서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성막을 다시 짓게 하십니다.

언약 문서인 십계명 두 돌판을 다시 만들게 하십니다.

가나안으로 향해 다시 걷게 합니다.

 

새해라고 작년과 다른 특별한 새로운 목적과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과 일을 새로운 각오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시작하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며칠을 가겠습니까?

새해가 되면 그제야 새로운 각오를 갖지만, 어떻게 우리의 각오의 효력이 일 년을 가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쓰러지기에 매일 각오해야 합니다.

아니 매일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힘을 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면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잘 믿지 못하고,

잘 깨닫지 못하고, 말은 동행한다고 하지만, 실제 그분과 대화하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세상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과는 대화하며 가고, 주위 사람과는 대화하며 가고,

또 자기와 독백하면서 가지만, 동행하는 하나님께 묻고 교제하며 가지 않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작년 하나님의 동행을 의식하지 않고 걸었던 것 같습니다.

함께 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섭섭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세상의 소리만 듣고, 사람들의 소리만 듣고,

내 상처 난 감정의 독백 소리만 듣고 지내오면서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추억이나 경험을 말할 것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해를 보냈지만 전혀 내가 자라지 못했고

오히려 지성과 인격과 의지의 키는 줄어든 것 같기도 합니다.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여행이 달라집니다.

좋고 훌륭한 분과 일주일만 여행해도, 참 많이 배우고 내가 훌쩍 자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새해, 미지의 땅을 누구와 동행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특권을 가졌습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시신다면 그분의 계심을 더 많이 기억하고 묻고 들으면서 걸어가십시오.

금년도 여러 목표가 있겠지만 우리 모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동행입니다.

이 목표는 가장 쉬운 것이지만 가장 어렵고,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 곁에 함께 걷는 분이 좋은 분이라면, 그분이 함께 걷고 있음을 믿고 수시로 의식할 수 있다면

함께 걷는 것만큼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이 동행이 , 새해가 하나님과의 동행이 된다면, 새해의 여행은 힘들지만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이 된다면 전혀 자라지 않은 것 같지만 매우 자라게 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진다면, 하루하루 걷는 것이 매일 같은 것 같지만

한 해가 지나고 나면 내가 많이 바뀐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새해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최고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과의 동행이 주는 행복을 풍성히 경험하는,

때로 손을 잡고 때로 나를 업고 걸으시는 것을 경험하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1년 1월3일 주일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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