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길을 사랑해야 목적지에 이른다

왕언니 2021. 3. 10. 23:10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살전 5장 16~18절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나의 길

 

사람마다 가는 길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길을 걷고 어떤 사람은 저런 길을 걷습니다.

직업과 환경에 따라 , 국적이나 체재에 따라 다  다르고

다른 사람이 내 길을 대신 갈 수 없고 , 내가 다른 사람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각자 내게 주어진 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격도 다르고 길의 난이도도 다 달라서

어떤사람의 길은 수월한데 어떤 사람의 길은 힘들고,

어떤 사람은 꽃 길이고 어떤 사람은 가시밭 길이고,

어떤 사람은 올라가는 길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길이 다양하여

한 사람에게 힘든 길, 좋은 길이 같이 있고

길을 가면서도 입학, 취업, 결혼, 가정, 성공, 이런  중간목표를 향해 가는데,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이 이전보다 더 힘들어졌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중간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마지막 하나님 나라란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합니다.

 

등반하는 분들에게  

“목적지에 이르고자 하면 목적지를 잊으라.”는 충고가있습니다.

길을 사랑하며 걸어야 목적지에  쉽게 이른다는 것입니다.

고지가 높을수록 더욱 더 길을 즐기면서, 천천히 쉬어가면서

길 가에 핀 꽃도 보고 기묘하게 굽어진 나무들도 보고 걸어가야

정상에  쉽게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최근 씽어게인에서 우승한 이승윤 씨도 인터뷰에서

음악을 즐기면서, 가는 길을 즐기면서 갔더니  자기도 모르게 일등이란 목표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술가들이나 선수들도 대부분 연주나 운동 자체를 즐기면 목표에 쉬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걷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나는 사람 위에 노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삶도 마찬가지로, 인생의 단계에 따른 목표가 있고,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인데

그 목표를 향해 갈 때 ,그곳으로 향해 가는 길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쉬이 목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평생 길을 가는데, 어떻게  잘 감으로 목적지에  무사히 이를 수 있을까요?

 

 창조와 일상의 길 가에 핀 꽃을 사랑하며 걷는 것입니다.

 

계절 중에 4월이 가장 찬란한 계절인데,

4월의 봄은 온 세상을 수많은 꽃들로 수를 놓을 것입니다.

꽃들과 나비만 봐도 정말 자연은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여기서 두 시간만 달려가면 눈 앞에 펼쳐지는 탁 트인 동해바다가 있고,

서울 주변의 산에 오르기만 해도 다양한 나무들이 만드는 숲길과 숲향기가 있습니다.

 

또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운 2차 창조물도 있습니다.

고흐의 미술, 모짜르트의 음악, 윤동주의 시, 향긋한 커피 향...

이런 것들 역시 길 가의 핀 꽃들입니다.

이런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손을 흔들고 향기를 발하며 소리를 내며 응원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창조물들을 그저 물체로만 보는 경우도 많지만

범신론자들 중에는 그것을 신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아름다운 창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주는 창문들입니다.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하늘과 넓은 바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창문이 됩니다.

목자와 양들의 모습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는 창문으로 삼고 쓴 시가 시편 23입니다.

 

예수님도 들에 핀 백합화와 공중에 나는 새를 통해서

보살피시는 아버지를 보여주는 창문으로 삼았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이나 헨델의 음악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창조물이나 작품들은 우리가 가는 길 가에 핀 꽃들인데

이런 것들을 보면서 길을 걸으면 이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충만한 곳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도 ,그저 큰 뜻이 없이 계속되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런 일상의 길도 자세히 보면 곳곳에 무수히 많은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다들,

사람을 만나는 일,

매주 교회에 오는 일상이 특별한 은혜였다고 합니다.

그것들이 일상의 길에 핀 꽃들이었는데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입니까?

일상의 길가에 핀 꽃에서 은혜를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우리들의 일상이 꼭 풀꽃과 같이 작기도 하고 여기 저기 피어 있다 보니 그냥 지나치기 쉬워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오래 볼 때 보이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 그 앙증스러운 예쁨,

그 속에 든 하나님의 솜씨와 은혜를 보지 못하고 그 길을 삭막하게 여기며 가는 것입니다.

 

저 멀리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가지 않아도 잘 살펴보면

내 평범한 삶속에 아름답고 감사할 것들이 많은데도 잘 살피지 않고 스쳐갑니다.

우리가 자연과 일상의 길 가를 자세히 보면서 걸으면

우리가 가는 길을 사랑하면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미 임한 나라

 

우리가 창조와 일상의 길가에 핀 꽃들을 보면서 길을 걷지만.

이렇게 길을 걷다 보면 그 길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름다운 해변길 걷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플라스틱과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것을 보는 것처럼

우리의 길가에는 예쁜 꽃들도 있지만

인간의 타락과 부패가 만든 죄의 쓰레기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

 

가정도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원래 선하고 아름답지만,

그 모든 곳이 다 죄로 오염되고 파괴되어 썩은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풀꽃 하나도 ‘자세히 보면 볼수록 예쁘고 오래 보면 볼수록 아름답지만,

죄로 타락한 이 세상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더 추하고, 오래 볼수록 더 냄새가 납니다.

이에 사람의 마음 속을 본다면 , 예레미야가

“만물 보더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이라고 했던 탄식을 더 실감 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널려진 이런 더러운 것들을 보게 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한 분노, 사람에 대한 실망, 자기에 대한 좌절을 갖게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만약 이런 타락된 세상과 악이 결코 바뀌지도 않고 심판을 받지도 이렇게 지속될 것이라면

우리는 낙담이 되고 실망이 되어 길을 제대로 걷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길을 걸어가다가 앙상한 겨울 나무의 가지 끝에서 작은 순이 돋는 것을 본다면,

가지 끝에 찾아온 작은 봄을 보고, 우리는 봄이 올 것을 기다리면서

겨울의 거리를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이 세상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오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오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즉 아직 이 세상은 겨울인데 그 겨울 속으로 봄이 조그맣게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겨울의 가지 끝에 새 순처럼 봄이 돋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겨울이란 현실만 보지 말고, 가지 끝에 찾아온 봄을 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은, 지금까지 죄의 세상인 겨울이 영원할 것처럼 살았다면...

이제는 겨울의 삶이 물러가고 봄이 온다고 믿는, 봄의 사람으로 새롭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아직 겨울이지만 봄이 온 것처럼 여기고

먼저 들어온 미래를 붙잡고 현실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나무가 아닌 씨앗의 형태로 와서 이 땅에 심겨 자라고 있고,

구워진 빵이 아닌, 그 속에 숨겨진 누룩의 형태로 와서,

지금 빵을 부풀리고 있기 때문에, 사라질 겨울과 다가올 봄이 서로 교차하고 있으니,

겨울 속에서 봄을 보고, 봄을 붙잡고 겨울의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마치 아날로그가 대세일 때 디지털 시대가 작게 들어왔고,

두 시대가 교차하고 있다가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밀어내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란 미래가 세상 나라 속으로 들어와서

점점 옛 시대를 밀어내고 마침내 새 시대를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더 추운 세상이 되어 가는 것 같고 사람들은 더 비정해지고

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을 때,

겨울 같은 현실을 느끼고 한탄하면서 살아가게 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면서 걸어가야 합니다.

 

미얀마 군부의 악함이 있지만, 그러나 그런 죽음의 위협 앞에서 세 손가락을 들면서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는 정신의 살아 숨 쉼을 보고,

그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더 많은 이들의 존재를 보고,

이미 복음을 통해서 일어난 자유와 정의의 진작과 인권의 모습을 보면서,

또 교회 안에 일어난 성도들의 변화를 보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미’ 들어온 봄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아직’의 겨울 현실만 보면, 비관주의자가 되지만...

우리는 천국에 갈 때까지 ‘아직’과 ‘이미’ 사이를 걷게 됩니다.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세상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이미 얻었다고 생각될 때 아직 잡은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또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될 때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아직과 이미의 왼발 오른발을 번갈아 내디디면서 푯대를 향하여 계속 가는 것입니다.

 

동행자들

 

우리는 창조와 일상의 길가에 핀 꽃들을 보면서,

타락한 세상의 길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면서 걸어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갈 때 봐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걷는 동행자입니다.

 

창조와 일상의 길 가의 꽃들을 보는 것,

이미 임한 봄을 보면서 걷는다고 해도, 혼자서 걸으면 우리는 제대로 걸을 수 없고

반드시 함께 걸어야 합니다.그렇지 못하면 매우 힘이 듭니다.

 

신앙의 길은 누구도 혼자 갈 수 없습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저 혼자 못 갑니다.

여러분이 저와 같이, 저도 여러분과 같이 가야 갈 수 있습니다.

교회란 영적 가족은 너무나 중요한 동행자이기에

코로나 상황에서 만나기 힘들수록

비대면 방식으로라도 더 자주 만나서 함께 동행하며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동행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야 할 진리란 목적지를 알려주시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되시며, 같이 걷는 동행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란 길을 통해서만 목적지에 이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고는 목적지로 갈 수 없습니다.

 

웨스터민스터 문답서 1문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존재 목적이 나옵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이 두가지인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더 고행하고 더 수행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종종 그런 높은 기준에 도달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적은 그렇게 이룰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님 자신을 기뻐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기뻐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는 의무감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벌을 무서워해서,

혹은 받을 유산 때문에 억지로 순종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음악을 잘 하려면 음악 연주 자체를 좋아해야 하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서 존 파이퍼 목사는 이렇게 고쳐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by)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존 파이퍼)

 

여기서 영화롭게 한다는 목적은 오직 그분을 즐거워함으로 가능합니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영어로 enjoy 하는 것입니다.

좀 불경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을 엔조이해야 하나님을 글로리 파이(glorify)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길을 가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지에 이릅니다.

즉 지금 여기서 내가 걷는 길에 함께 동행하는 그분의 동행을 즐기고

그분 자신을 앤 조이 해야 목적지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좋고, 그분과 함께 있음이 좋고 그분과 대화하는 것이 좋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사명이란 목적지를 향하여 갈 때

이를 악물고 무릎으로 돌계단을 기어오르는 각오만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기뻐하시는 성부 하나님과 매일 만나시고 동행하심으로

마침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에 이르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을 기뻐하려면 함께 걸으시는 예수님의 동행을 기뻐해야 하는데,

우리는 동행하시는 주님을 잘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풀꽃도 자세히 보면 아름답지만 풀꽃을 그냥 지나쳐 버리듯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도, 발견하면 큰 소망이 생기지만, 그냥 못 보고 지나치듯이,

동행하시는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 그분과의 동행이 가장 황홀하고 복될 것이 분명하지만

대부분, 못 보고,못 듣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스마트 폰은 이제 신체 일부가 되었습니다.

스마트 폰으로 우리는 실시간 세상과도, 타인과도 항상  접속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실시간 접속되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영혼이란 단말기가 심히 고장이 나서 하나님과는 거의 접속되어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영적 전파를 거의 수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영혼의 눈이 어두워졌고

우리가 영혼의 전파를 방해하는 사탄의 방해가 심한, 어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적 전파를 수신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보려고 힘써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는 시편 1편 구절이 있습니다.

말씀을 하루에 3장 정도 읽고 큐티를 하게 되면,

의식적으로라도 그분의 소리를 듣기 위해 안테나를 펴게 됩니다.

그런데 내 영혼의 라디오 성능도 좋지 않을뿐더러 사탄의 전파방해가 심하여

잡음도 들리지만 그러나 말씀의 소리가 약간씩 들립니다. 개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명령했습니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24시간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고..

길을 갈 때 주님이 내 곁에 함께 걸으신다고 생각하며 걷고,

운전을 할 때도  내 곁에 주님이 앉아계신다고 생각하고 운전한다면,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눈을 감는 이유는,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을 눈뜨고 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새벽기도 수요 기도, 어떤 기도회에서 기도하든지,

큰 소리로 기도하든, 침묵으로 기도하든, 특별한 장소에 가서 하든, 어느곳에서 기도하든지 간에

핵심은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핵심은 한두 번이 아니라 자주, 그리고 매일 보는 것입니다.

 

이슬람권에 가면 도전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공부를 하다가도, 멈춰서 기도합니다.

하루에 적어도 다섯 번은 신의 임재를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저 메카란 장소에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여기서 동행하신다는것을, 적어도 세 번만이라도 생각하려고 해야 합니다.

 

또 저 멀리 메카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과 대화하듯이 그렇게 걷고 살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명령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려면  항상 감사 제목을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 감사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다 보면 

결국 우리는 감사제목을 통해서 동행하셨던 주님을 ....

내가 보지 못했지만 실제로 함께 걸었던 주님의 발자국을 찾게 됩니다.

 

프랑크 루박이란  필리핀 선교사는

분명히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했는데,

왜 나는 그분의 동행을 실제로는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하고

한 달 간이라도 주님의 동행하심을 의식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바로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 기상 후, 주님, 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지금 주님이 곁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밥을 먹고,

그렇게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일기로 썼는데

처음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동행이 더 생생하게  체험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일기로 기록한 것이, 유명한 고전인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란 책입니다.

 

우리가 <3.3.1 운동>을 통해

매일 하루에 세 장씩 성경을 읽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고,

하루에 하나씩 감사 제목 쓰기를 하자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결국 동행자이신 예수님을 보는 영적 시력을 회복하고,

내 영혼의 안테나 감도를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소해 보이지만 가장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을 보려고 한다면, 풀꽃마저도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하물며 주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갈수록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보이는 어떤 거창한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매일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큰 일입니다.

 

 

길이 곧 목적이다.

 

우리는 모두  길을 갑니다.

그 걷는 길이 다 달라서

어떤 사람은 좀 더 편하고, 좀더 힘들고, 어떤 사람은 꽃 길이고, 어떤 이는 가시밭 길이고,

누구에게는 올라가는 길이고 누구에게는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가면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처럼

내 앞에 난 두 길 중에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고 후회할 때도 있어서

내 길을 다른 사람의 길과 비교하면,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후회하지 마시고

오히려 내가 가는 길 가에 핀 꽃들을 더 많이 찾으며 가십시오.

 

 

무엇보다 동행하시는 주님을 매일의 길에서 보려고 하시고

오직 내 가는 길에 함께 걷는 주님의 동행을 더 많이 보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가는 길을 어제보다 더 사랑하게 되고

더 감사하고 더 찬송하며 걷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이 비록 힘들다고 해도

주님 때문에 아름다운 이야기, 행복한 대화가 남는 길이 되고

동행하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걸음으로, 하늘나라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길을 사랑하면서 목적지에 이르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021 년    3월7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