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선악과 사건과 변함없는 하나님의 긍휼 (창 6:1~8)
(올해는 산타가 올까?)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 탄 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우리는 지금 코로나로 온세계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전대미문의 재난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런 재난을 당할 때 우리는 그 원인을 다각도에서 분석하게 되어
이것을 자연재해로 ,환경문제로 볼 수 있지만 결국 인간문제라는 것을...
인간이 행한 잘못된 삶의 문제라는 것을 , 알게 됩니다.
그런 해석이 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게 해 줍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큰 세계적 재난은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그 당시엔 그 재난에 대한 원인 분석이 오늘 같은 환경적, 과학적으로 분석할 눈이 없었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 원인을 그 시대의 사람과 사회에서 찾습니다.
자연재난이 아닌 인간과 사회의 심판 (人災)으로 본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당시 홍수 심판의 본질을 꿰뚫는 것입니다.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 은 , 그래도 경건하게 살려했던 아벨을 이은, 셋의 후손들로 보고
사람의 딸들이란 , 아마도 하나님을 떠난 , 가인의 후손들로 해석됩니다.
그들의 결혼 조건이 믿음이나 신앙과는 거리가 먼 외모와 소유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어지는 세상을 말합니다.
이제 소위 경건한 사람들(하나님의 아들들) 마저도 그 신앙을 버리면서 ,
이제 경건한 사람들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1절~13절을 보면 그들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같은 단어를 두 번씩 사용합니다.
" 11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창 6:11~13)
포악함은 , 폭력, 잔인함, 의롭지 못함이란 의미이고
부패함은 무질서, 하나님의 법을 떠남, 경건치 못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의 관계 안에 거하는 것인데 ,
사랑의 관계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려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반드시 주인의 포도원을 맡은 청지기나 오너의 회사를 맡은 경영가가 다스릴 때
반드시 주인의 뜻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 당연히 자기가 주인이 아님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폭력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경건의 모습도 사라져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창조 본래 모습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 (창 6:3)
그리고 이어"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수명이 120년이 아니라 120년 후에 심판이 있으리란 말씀입니다.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삶, 폭력과 지배의 법으로 살아가는 삶은 유한하고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120년 후에, 그들의 삶에 대한 심판으로 노아의 홍수가 임합니다.
온 땅을 물이 덮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사건 이후에도 노아의 후손들에 의해 바벨탑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도시를 세우는 목적과 방향은...
"서로 말하되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 11:4)
그들이 탑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는 목적이 ,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그들의 이름을 내자입니다.
그리고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것은 , 흩어져 온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방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목적과 방법을 한 언어로 공유했고 자기들의 그 행위가 옳다고 믿으며 도시와 탑을 쌓았지만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추구하며 쌓아 올리는 인간의 노력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어
노아 시대 사람들이 혼돈의 바다에 빠진 것처럼 언어가 흩어짐으로 다른 종류의 혼돈의 바다에 빠집니다.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 이후로 11장까지 여러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카인의 아벨 살인사건, 카인이 도시를 건설하는 일, 노아 홍수 사건, 바벨탑 사건 등...
이런 사건들의 흐름을 보면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곧 물이 끓는데도 따뜻한 온도에 익숙해진 개구리가 위험을 못 느끼고 있다가 삶겨 죽는 것처럼...
심판의 경고가 120년 동안 있었지만, 심판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것을 귓등으로 흘리다가 뜬금없이 심판이 임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미 환경파괴의 위험이 경고되었지만 무심하다 보니 코로나 사태도 갑자기 임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태복음 24:37~39 에서는 예수님의 재림 때의 심판을...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통한 심판을 예고하시지만, 우리는 알지 못하고 무감각합니다.
비가 쏟아져도 그것이 심판의 홍수인지 모르는 당시의 사람들처럼 ,
심판의 징조가 곳곳에 보여도, 하나님을 떠난 삶에 대한 심판이 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문제들을 보면서도 이것은 그들의 문제요, 제도의 문제요, 환경문제라고만 생각할 뿐
그것을 통해서 나의 도덕적 영적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가던, 같은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 무감각, 그런 무지, 그런 영적 어두움이 가장 무서운데
그것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과 , 예수님 당시 사람들과, 우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인간의 생각과 이성에 판단의 기준을 두고 ,
이성을 신의 자리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여기면서 맘몬을 하나님 자리에 두고 숭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공을 최고에 두고 그것을 숭배하고
성적 쾌락을 신의 자리에 두고 가정을 깨는 일을 합니다.
번영을 신의 자리에 두고 환경도 정의도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부터 지금까지
시대마다 상황마다 다르지만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을 보면 그 속에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이렇게 몇 줄로 요약합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 1:23)
여기서 바꿈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피조물을 조물주처럼 섬기고, 사탄의 거짓을 진리처럼 믿습니다.
이것이 선악과 사건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악과 사건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뒤바꿈을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우상숭배를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됩니까?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바꾸면, 우리는 그 피조물이 우리에게 하나님 행세를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거짓을 진리로 바꾸면 그 거짓을 진리처럼 믿고 살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유한한 능력의 한계 안에서 갇혀서 살아가야 하고
피조물의 상대적 지혜의 한계 안에서 갇혀 살아야 합니다.
결국 강물과 연결이 끊어진 호수처럼 점점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문제를 만드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문제를 만드는 선악과의 방식 ,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방식으로는 문제만 만들 뿐입니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올라앉으면
그 무능함과 부패와 한계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듯이 ,
나란 존재, 그 무능하고 한계 있는 존재가 내 삶의 주인이 될 때 내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건짐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길이 필요합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사는 길인 줄 알았지만 죽는 길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길에서는 생명나무를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을 거짓으로 속인 사탄의 간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아담과 그 후손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탄의 머리를 부술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에덴동산의 아담 이야기, 노아 시대의 사람 이야기,
바벨탑 시대의 사람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이어 써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이 시대가 주는 무감각 무지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수많은 우상들을 간파하고 주님을 온전히 붙들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신 그 여자의 후손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노아의 방주가 되신 구원자가 오셔야 합니다.
그 여자의 후손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미 오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도 오셨습니까?
그런데 그 주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그 주님이 오셨지만... 그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영적 무감각에서 갇혀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계속 다른 형태의 선악과를 따먹는 길로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 지식, 이성, 기술을 믿고 인간의 지혜를 믿고 삽니다.
그것이 사는 길로 여기며 더욱 무신론적으로 살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세상이 다 그런 무지 속에 있을수록 더욱 깨어서 주님을 붙잡읍시다
더욱더 영의 눈을 열어 참 소망이 예수님께 있음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을 제대로 붙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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