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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도 재난은 아날로그로 온다

왕언니 2024. 1. 6. 12:41

 

[광화문·뷰] 디지털 시대에도 재난은 아날로그로 온다

 

 

인공지능(AI)이 불러올 미래와 함께 ‘나쁜 AI’가 인류에게 불러올 재난을 걱정하는 이가 요즘 많다. 연초 세계 곳곳에서 잇따라 발생한 지진·전쟁·테러 같은 재난을 보면서, 인간을 다치고 죽게 하는 재앙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날로그 방식으로 온다는 생각을 했다.

1월 4일 강진이 발생한 일본 와지마에서 한 남성이 지진에 따른 화재로 불탄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디지털 기기에 중독된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같은 첨단 기술이 언제든지 우리를 도와주리라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재난 현장 모습을 보면 볼수록 이 기기들이 때로는 허무할 정도로 취약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디지털 기술에 치명적인 정전과 통신 장애는 자연·인공을 불문한 재해 현장에서 매우 흔히 벌어지기 때문이다.

 

경기도에 사는 한 지인이 재작년 여름 겪은 일이라며 들려준 얘기다.

홍수가 나고 마을 전체 전기가 끊기는 바람에 휴대폰 배터리는 곧 다 닳았다.

이런 상황이 오자 쓸모없어 보이던 유선 전화를 설치해둔 집이 ‘갑 중의 갑’이 되더란다(유선 전화는 정전일 때도 작동한다).

 

집 전화가 있는 한국 가구는 셋 중 하나(갤럽 2021년 조사)에 못 미친다.

요즘 늘어나는 젊은 1인 가구는 열에 한 명꼴로만 집에 전화가 있다고 한다.

대다수가 재해 때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먹통이 되면 가족에게 안부를 알릴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얼마 전에 집에서 TV로 넷플릭스를 보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인터넷 공유기가 고장으로 갑자기 꺼지고 동시에 (인터넷으로 작동하던) ‘스마트 TV’도 먹통이 됐다.

 

지상파 방송 전파를 잡는 방법을 모르니 TV는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재난이 일어나 정전이 되고 휴대폰에 이어 TV까지 꺼지면,

생존에 필수적인 정보는 어디서 얻어야 할까.

 

일본 정부의 재난 대비 지침은 이런 비상사태를 대비해 ,

건전지로 작동하는 아날로그 라디오를 갖춰두라고 조언한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2만~3만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제품이 언젠가 생명줄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집에 라디오를 보유한 한국 가구 비율은 11%에 불과하다.

음악과 뉴스를 소비하기 편한 스마트폰에 밀려 멸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전력망을 가장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디지털 시대에 전기와 통신망을 끊으면 사회를 얼마나 큰 혼란에 몰아넣을 수 있는지 알고 벌이는 일이다.

러시아는 같은 목적으로 미국 전력망에 대한 사이버 공격도 종종 벌인다.

한 우크라이나 기자는 “가방에 휴대용 배터리를 대여섯 개씩 넣어 다니는 게 일상이 됐다”고 했다.

 

“전기 끊긴 상태로 며칠 지내 보세요. 세상이 1차 대전 때와 뭐가 달라졌나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휴대폰 지도를 못 보니 동서남북도 잘 모르겠더군요.”

재난 상황엔 근사한 자율주행 전기차보다 자전거와 지도 쪼가리가 유용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미국 IT 매체 ‘와이어드’는 태풍 등으로 전기·통신이 끊길 때를 대비해

“주변의 ‘러다이트’를 파악해 두어라”고 조언한다.

 

18~19세기 공장 기계를 파괴한 영국 노동자들에게서 유래한 ‘러다이트’는

최근 신기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로 쓴다.

큰 재난이 터지면 평소엔 고지식해 보이던 아날로그적 생활 방식이 오히려 유용하니,

이런 사람을 찾아가 도움이라도 구하라고 필자는 설명했다.

 

여러 정부가 재난 대처 가이드에 ‘평소 준비해두라’고 권고하는 비상 대비 용품은 다음과 같다.

 

물, 통조림 등 썩지 않는 비상식량, 손전등, 건전지로 작동하는 라디오,

응급 약품, 호루라기(갇혔을 때 도움 요청용), 성냥·라이터, 얇은 담요 등등이다.

 

돈과 시간을 약간만 투자하면 어렵지 않게 갖출 수 있는데도 대부분 흘려듣고 만다.

 

“당신의 과도한 자신감이 당신의 약점입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공습경보에서 나오는 문구다.

영화 ‘스타워즈’ 대사이기도 한데, IT 초강국 한국에 하는 소리처럼도 들린다.

 

 

<조선일보 국제부장 김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