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사명을 위한 선택 ...이스라엘과 교회의 의미

왕언니 2021. 6. 3. 22:17

사도행전 1:12~15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사도행전 2장 1~3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성령강림과 교회

 

교회절기중에  성탄절, 부활절 ,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령강림절이 있습니다.

그중에 이번 주는 오순절 성령님이 강림하심을 기념하는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유월절) 50일째 되는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함으로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예수님의 생일이라면,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생일에 해당됩니다.

 

물론 성령님이 그때 오순절에 비로소 처음으로 임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님이 계셨고 역사하셨지만

이때부터   성부 하나님이, 또 성자 하나님이 하셨던 사역을 이루시는 

본격적 성령의 사역이  시작되셨다는 의미로 성령강림절이라 부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신일이 많지만,

가장 핵심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그 교회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힘을 주시고,

마지막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고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알려면,  먼저 ,

왜 성령님이 임하여 교회 공동체를 세웠는지...

왜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임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도시에서 교회가 되게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에 관한 성경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서 교회의 의미와 목적과 사명을 볼 수 있는데

성경의 이야기 흐름 속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은, 어느 날 단독으로 이일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 일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사역의 연장선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신약시대의 교회를 알려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을  먼저 알아야 하는데

창세기 12장부터 말라기까지 보면

성령님이 오셔서 교회를 시작하신 이유와

구약시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한 이유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의 거의 대부분이 바로 이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는지를 알기 위해  먼저 아담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알려면 성경 속의 이스라엘을 알아야 하고, 그 이스라엘을 알려면 아담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시작하신 이유가 아담을 창조한 이유와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교회,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큰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함께 봐야 서로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성령님이 오셔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교회인데, 교회인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란 의미는,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뗄 수 없는 특별한 관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내적 모습과 외적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적 모습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로서 서로 사랑하듯이,

인간도 서로 간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를 닮아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됨으로,

이타적 헌신과 섬김과 같은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되도록,

그래서 그 안에서 참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외적 모습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듯이,

인간이 그 세상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스림으로 ,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닮아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배함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은혜와 사랑과 은사를 받아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그 은혜를 흘러 보내고,

세상을 공의롭게 다스림으로 세상 속에 그것을 흘려보냄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특권이면서 사명인 것입니다.

 

 

이를 거울에 비유하자면...

거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으면, 거울은 자기 속에 그 사람을 담고 그 사람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거울은 그 사람을 반사하여 보여줍니다.

사람은 안으로 하나님을 닮고 반영하고 밖으로 하나님을 반사하여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청지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요즘의 전문 경영인)

그는 내적으로 주인의 마음과 가치관을 자기가 가지고, 외적으로 주인의 회사를 맡아 경영하고 다스립니다.

 

또 총리에 비유하자면

그는 왕과 같은 통치 철학을 가지고 왕의 나라를 맡아 신실하게 다스립니다.

 

이렇게 하면 청지기는 주인을 닮아 성숙하여 가고 ,

주인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면서 주인과 동역하는 영광을 얻습니다. 총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이 부릴 종으로 창조하지 않았고

많은 창조물 중에  하나님의 세상을 함께 다스릴 사명을 받은 자로 ,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존재로,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동역자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무엇입니까?

거울이 반사해야 할 형상을 향해야지 다른 것을 향하면 안 되고,

청지기는 주인을 대리하지만 주인을 대신하지는 않아야 하고,

총리도 왕을 대리하지만 왕을 대신하면 안 됩니다.

 

은행의 대리는 지점장을 대리하는 권한이 있지만, 지점장을 대신하면 안 됩니다.

이처럼 인간도 하나님을 대리하여 일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하면 안 됩니다.

왕 같은 존재이지만 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리할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자기 위에 왕으로 두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왕이 됩니다.

이것이 타락의 핵심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될까요?

 

마치 청지기가 주인의 회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가 주인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세상을 자기의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청지기는 자기의 제한된 정보와 지식을 따라 회사를 경영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의 유한한 자원과 능력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마치 저수지와 연결이 끊어진 수도처럼 되고 맙니다.

이런 인간의 상태를 두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 악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과 연결을 끊고 자기가 웅덩이를 팠는데

그 웅덩이는 물이 나왔다가 말랐다가 하고 맑은 물이 아닌 흙탕물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의 뜻을 따라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고,

자기의 능력이란 유한한 자원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설계도 속에 있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세상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 결과는 인간 자신에게 큰 문제가 생겨 인간관계에 수많은 고통과 갈등이 생깁니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맡겨진 창조세계가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설계와 다르게 계속 작동하는 기계가 문제가 생기듯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악한 청지기처럼 된 인간으로 인해서,

인간 세계와 창조 세계에 문제와 큰 고통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인간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어떻게 세계는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이런 세상의 문제를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문제를 해결할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어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5)

 

이 말은 인간이 만든 문제를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어떤 인간을 통해서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을 통해, 죄로 인해 타락한 역사(세상)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일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는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브라함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를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바벨의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을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 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준 이 복은 원래 아담에게 주어진 복과 같습니다.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는데,

그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을 내적으로 닮고 외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다스림, 그 사랑과 돌봄을 베푸는 사명을 주신 것인데,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비가 위에서 내리면 그 비를 받은 모든 생명체가 살고

그 생명체들이 서로 각각의 생명을 살면서 또 다른 생명체를 살립니다.

즉 각 생명체들은 위로 하늘의 은혜를 받고, 그들은 다른 생명체를 살리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을 불러서 복의 통로로 삼겠다고 하신 것은,

죄를 지은 인간이 위로 내리는 비를 받지 않은 사막 같은 땅이 되어 버린 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다시 아담에게 주었던 그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과 사명을 회복시키시려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그런데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지 않고 아브라함의 후손에게서 계속 이어져야 되기에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을 복의 통로로 삼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삭이고, 야곱이고 그의 후손들이고 또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생기게 됩니다.

 

자녀가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기적적으로 자녀를 주시고 그의 후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인간이 생산하는 육신의 자녀와 달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또 이들을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이후 요셉을 모르는 바로의 등장으로 다시 노예가 된 그들,

장자를 죽이게 하는 정책으로 죽음의 위험에 빠진 그들을 건져내어 출애굽 시킵니다.

 

애굽으로 상징되는 세상, 하나님이 아닌 죄와 인간의 다스림이 만드는 세상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그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형성되는 인간사회를 만들고,

그 은혜가 흘러 내림으로 삶의 터전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이끄시고,

그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 회복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은 종교와 관련된 법이나 개인의 수행과 관련된 규칙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관련된 법을 주십니다.

정치, 경제, 사회, 가정, 환경 등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법을 주십니다.

 

이는 그들이 이 세상을 벗어나는 그런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인간 모습이 본래의 의도대로 전 영역에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게 하려 함입니다.

 

예를 들어 두드러진 것이  주인도 쉬고 종도 쉬는 안식일 제도이고 또 희년 제도입니다.

이 법을 따라 살았다면 그들은 온 세상에게 환경문제, 전쟁 문제, 빈부 문제 등으로 고통하는 세상과 다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복의 통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명을 받았던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사시대를 거치고 왕정 시대를 거치고 수많은 왕들이 통치했습니다.

다윗 시대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그런 왕의 모습, 그런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이후 열방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이 그들을 책망하지만,

결국 그들은 돌이키지 못하고 지내다가, 가나안 땅에서 다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즉 바벨론 나라가 세워진 곳에서 나오게 하셨는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다시 그곳으로 끌려가고 만 것입니다.

즉 열방에게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불러냄을 받았던 그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실패의 핵심적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한 것으로

맡겨진 세상과 땅을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여  돌보고 회복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접속과 연결이 끊어지니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흘러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이,

위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면서 아래로 하나님을 대리하여 세상을 다스려야 할 소명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다스림 (접속)을 거부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의 통로가 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자,

결국 그들은 그들이 서로 살아감이 서로를 살리는 그런 다스림을 경험하지 못했고,

그들이 사는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지 않고 죄와 고통이 흐르는 곳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로 끝나 버렸고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 가운데 일하셨던 하나님의 일하심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여자의 후손을 보냄으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참 메시아를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더 깊고 본질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교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실패했는데, 그 이스라엘 속에서 참 아브라함의 후손이 탄생하십니다.

마태복음은 그분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태복음 1:1)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신 그 역사가 이스라엘의 실패로 무의미하게 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민족과 그 역사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복의 통로가 되는 그분이 오십니다.

바로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되어 

하나님이 일찍이 약속하셨던 그 여자의 후손이 이 세상 속에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나심으로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되십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했지만, 그분은 순종하심으로 실패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또 그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태어나심으로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인간의 대표자가 되십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불순종했지만 예수님은 온전히 순종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흘러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세상 속에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12명 제자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많은 일을 하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을 치유하시는 일과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그  12명의 제자를 훈련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12명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시며, 자신이 보내실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에 성령님을 기다리면서 제자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12명의 핵심 제자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과, 광의의 제자들이 모였는데 그 숫자가 120명이었습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사도행전 1:13-15)

 

그리고 12명에서 빠진 유다의 빈자리에 한 명의 사도를 뽑아 사도를 12명으로 만듭니다.

 

왜 예수님은 하필 제자를 12명을 하셨을까요?

또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했던 무리들은 왜 120명이었으며,

왜 사도의 숫자를 다시 12명을 만들려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숫자 3과  인간을 말하는 숫자 4를 곱한 숫자이기도 하지만)

 

제자를 12명을 하신 것은 12지파로 구성되었던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하나님의 계획,

실패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복의 통로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어 가시려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이야기 속에 담긴 구원의 계획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성령님이 오셔서 120명 제자들에게 임하여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교회가 신약시대에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할을 이어가고 감당할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계획,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어난 역사가 교회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그러면 교회는 무엇이고 그 사명과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 구약의 백성들과 무관하게 새로 선택된 백성이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의 사명을 이어가는 공동체입니다.

더 멀리 보면 아담에게 주셨던 하나님 형상이 지닌 그 사명을 다시 회복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흘러가게 한 것처럼,

교회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말씀과 은혜의 다스림을 받아,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와 나라가 임하게 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의 나라가 당신의 통치가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의미

 

이번 주일은 교회가 탄생한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왜 성령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는 무엇을 이 땅에서 해야 합니까?

이 땅에 다양한 교회들이 있고 여러 형태로 존재합니다만. 그 내적 DNA는 바뀌면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 목적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붙들어야 할 것은.....

 

첫째 하나님과 연결되어 다스림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온몸이 머리와 연결되어 그 머리의 다스림을 받아 제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바르게 소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진리와 말씀에 접속되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거울이 반영하고 반사해야 할 대상을 향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지금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든 것이 예배입니다.

말씀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마음의 창문을 여는 기도, 찬양입니다.

 

이어령 교수가 예배는 하늘과의 접속이라고 말을 했지만

하나님과 접속되는 것,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을 바라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사이버 세계와 접속하지만,

그렇게 접속하면서 숨 쉬고 있는 이것은 이미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접속하여 우리를 살리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단비를 받아

우리의 심령이 매일 은혜에 흠뻑 젖어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예배를 통한 연결이 없다면 아무리 건물이 좋고 조직을 크다고 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는 예배를 중심에 둠으로

하나님 은혜의 비가 내리고 하나님을 담고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됨으로 주어진 그 은혜가 위에 은혜의 비처럼 우리에게 부어지면

그 그 은혜가 우리를 통해서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와 은사들이 각각 있고, 직업들이 있습니다. 그 은사와 직업을 통해서 서로가 삽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주신 은사를 통해서 서로가 살면서 서로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로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리하는 것이 되고, 서로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각 상황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때로는 감사, 때로는 힘든 상황 속의 눈물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은혜를 통해서 내가 삽니다.

그런데 이 은혜와 삶의 모습은 나에게 주신 것이지만, 나를 통해서 공동체에게 주신 것입니다.

서로는 자기가 받은 은혜를 서로에게 나눔으로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른 성도들에게 흘러 보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코이노니아이고,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다스림과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 없으면,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역 모임이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이 되십시오.

신앙의 중요한 축이 되도록 하십시오. 나도 살고 다른 형제자매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흘러가야 한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은혜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말로 전파되고, 우리가 모습을 통해서 반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바른 방향이고 복되다는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아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아브라함처럼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란 명사는 형용사를 필요로 하는, <그래도 괜찮은 교회>라고 붙여야만 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교회가 아닙니다.

 

참 교회는 뉴스 속에 나오고 우리가 보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 교회를 바로 알고, 교회의 사명과 목적을 바로 알고 또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021년 5월 23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