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4:20~23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코로나 이후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코로나 상황을 통과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신앙이 강해졌느냐, 동일한가, 약해졌는가, 이렇게 물으면
아마 약해졌다고 말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사실 코로나가 엄청난 충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예배를 드릴 수도 없는 그런 박해와 핍박은 아니기에
오히려 영상을 활용해서 더 편리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년 정도가 지나도 신앙은 여전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코로나의 충격이 컸다고 말하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의 바탕, 그리고 학생들의 신앙의 바탕이 약한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렸다면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시대는 가히 무서운 지식폭발의 시대입니다.
지식을 계속 습득하고,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고 또 활용합니다.
이전 시대 교육은 머리와 지능과 IQ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머리를 인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머리로 무엇을 알면, 그것이 몸으로 사는 삶을 만들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무엇을 알면 몸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아느냐가 곧 그 사람이 그렇게 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아는 것이 그 사람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힘이지만, 중심 되는 힘은 아닙니다.
영어로, 정보가 information인데,
이러한 지식과 정보가 formation 즉 삶을 형성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존재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여기서 마음을 지키라고 하고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인간 생명의 본질은 마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마음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음은 머리와 생각이란 지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지키란 말의 의미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하니 이것을 주의하라, 이런 뜻이 됩니다.
마음에는 이런 지적 요소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주로 가슴, 감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지키라는 것은,
어떻게 느끼느냐, 무엇을 느끼느냐 이것을 주의하라, 이런 뜻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마음은
머리와 가슴보다는 욕구와 갈망을 가져오는, 장, 오장육부를 의미합니다.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 느끼는 존재라기 보다는, 무엇을 욕구하고 갈망하는 존재로 봅니다.
일어나면서부터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욕구하고 갈망하고 추구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라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넘어,
무엇을 욕망하고 갈망하느냐, 즉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삶을 만들지만,
내가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정말 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내가 아니라,
내가 갈망하는 것, 욕구하는 것이 곧 진짜 나입니다.
너는 누구냐? 그럴 때
그 나는, 무엇을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 그것이 진짜 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너의 생명의 본질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진짜 너의 모습이란 것입니다.
네페쉬 하야
창세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여기서 생령이 원어로 ‘네페쉬 하야’입니다.
네페쉬가 호흡이란 뜻이고 하야가 살아 있음의 뜻입니다. 살아 숨 쉬는 존재란 의미입니다.
살아 숨쉬는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를 보면 무엇을 알게 됩니까?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욕망합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 갈망하는 존재인 네페쉬 하야라고 부릅니다.
예배하는 존재
이렇게 인간은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욕망하는데, 문제는 갈망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동물들은 먹을 것, 본능 충족을 갈망하고 그것이 충족되면 족합니다.
인간도 그것을 욕구하고 욕망하지만
인간은 그것들이 충족되었다고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사랑합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싶은데, 그 자리에서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을 추구합니다.
동물처럼 그냥 배를 채우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뭔가 더 맛있는 것, 더 다양한 음식을 만들고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림과 사진으로 찍어 더 아름다운 예술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냥 듣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음악을 만들고 계속해서 창조하고 추구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그 이상을 갈망하고 추구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결국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대상은 무엇일까요?
성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for God)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in God) 안식할 때까지는 평안이 없습니다.”(성 어거스틴)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네페쉬 하야,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그 사랑의 대상이 눈에 보이는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맛있는 것을 주고 달래도
자기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온전히 만족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궁극적 사랑의 대상으로 만나고, 그분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의 디폴트 값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여러 것, 좋은 것을 얻어도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온전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고,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하고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그 욕망과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은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그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 즉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무엇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그 사랑의 대상에 의해 움직이고 그것이 그 사람을 만듭니다.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이 그 사람을 만듭니다.
여호와를 경외함
인간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존재라면
무엇을 갈망하느냐,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잠언은 모든 것 중에서 너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머리 즉 생각을 지키라, 지식과 정보를 많이 습득하고 보존하라는 말,
가슴, 즉 감성과 감정을 지키라, 감정 조절을 잘하라는 말일까요?
마음을 지킨다는 핵심적 의미는
우리는 갈망하고 사랑하는 존재이기에, 사랑이 올바른 대상을 향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고 강조한 잠언의 시작 부분과 끝부분이
동일한 말씀으로 시작해서 끝나는 것을 봐서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잠언 첫 장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 1:7)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잠언 마지막 장 31장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씀이
서두와 말미에서 샌드위치처럼 잠언 전체 내용을 감싸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떨라는 말이 아니라,
경건한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갈망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잠언 속에 삶의 여러 지혜들이 있습니다.
대인관계 재정, 언어, 생활 가정의 여러 지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세상의 것들에서 자기의 갈망을 채우려고 하지 않고,
보이는 것들을 갈망하되 그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참된 목적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한 도구로 삼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시몬아 너는 무엇을 아느냐? 시몬아 너는 무엇을 믿느냐?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 이것을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 지식도 중요하고 무엇을 하는? 윤리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드러난 지식과 윤리 외에, 드러나지 않는 더 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정말 네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를 주목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를 주목하십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루를 생각해 봐도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망하고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을 따라가고 그것이 나를 지배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우리를 만나신다면, 그래서 단 하나의 질문을 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아느냐, 느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
네가 정말 욕망하고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진짜 나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세상에서 우리는 궁극적 사랑의 대상을 잘못 알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C.S. 루이스가 쓴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 무한한 기쁨을 주겠노라는 제안을 듣고서도,
그저 술이나 섹스, 야망 같은 것들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놀려고만 하고 있는 우리는,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대체 상상을 못 해서,
그 제안을 거부하고
그저 달동네 지저분한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장난이나 하면서 놀고 싶어 하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꼬마 아이와도 같다.
우리는 너무 시시한 것에 쉽게 만족해버린다.”
우리가 갈망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데,
일시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에 만족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격하고 예배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는데
상대적인 것에 쉽게 만족해 버리고 그것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쁨을 방해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약간의 기쁨이고,
참 만족을 방해하는 것은, 불만족이 아니라 약간의 만족이고,
큰 성공을 방해하는 것은 실패가 아닌 약간의 성공이며,
진짜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미움이 아닌 미지근한 사랑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을 덜 사랑하지 못해서 문제이지만,
하나님에 속한 것을 더 사랑하지 못해서, 그 소망 그 영광 그 은혜를 더 알지 못하고
열망하지 않음이 더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은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제대로 알게 될까요?
바로 예배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예배가 worship입니다.
이것은 worth...(가치 있는) 이란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 가치에 맞게 제대로 보게 하는 훈련입니다.
예배가 그 하나님을 보고 그분에게 몰입하고 사랑하고 흠모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몸의 습관
그러므로
첫째 우리는 예배가 중요함을 강조해야 합니다.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사랑하게 욕구하게 되어 있는 우리들이기에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시고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분인지를 계속 보게 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예전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하나님 나라 소망이 얼마나 높고 아름다운지를 계속 보게 하고 사모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갈망과 사랑이 금방 다른 것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전혀 비교도 안 되는 것들을 오히려 보려고 하게 됩니다.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대체 상상을 못 해서,
그 제안을 거부하고 그저 달동네 지저분한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장난이나 하면서 놀고 싶어 하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꼬마 아이와도 같이 됩니다.
둘째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우리의 몸의 습관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계속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서 실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는 것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고, 몸에 밴 습관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몸에 배여야 합니다.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귀가 그분의 소리를 듣도록,
마음이 그분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몸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반드시 드린다는 몸에 밴 습관이 중요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몸에 배인 습관이 되도록 강조해야 합니다.
그러면 비대면일 때는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대면일 때는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
큐티를 통해 매일 묵상한다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매일 감사 제목을 하나씩 찾아서 쓰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십분 이상은 기도한다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예배의 습관이 있으면 그것이 가정을 지킵니다.
이런 습관이 없으면
아무리 감사하자, 기도하자, 예배하자, 그래도 몸의 습관이 받쳐주지 않으면
결국 신앙은 서서히 무너집니다.
그러나 이런 습관이 형성되면 그 습관이 나를 얽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지킵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리 오래 믿었다고 해도 아무리 머리로 많이 안다고 해도
코로나 상황의 일 년이 우리의 신앙을 흔들고 무너지게 합니다.
몸에 영적 습관이 배이지 않으면
머리 따로 몸 따로 놀다가, 코로나와 같은 상황이 오면 흔들리고 약해지고 무너집니다.
이런 영적 습관이 중요한데 이것은 나 혼자 갖기 어렵습니다.
군대에서 서로 함께 훈련함으로 군인의 모습이 우리 몸에 배이듯이,
우리는 주일학교 분반 모임을 통해서, 또 구역에서 카톡상에서 체크해주고 나눌 때
영적 습관이 형성됩니다.
매일 성경 읽기를 체크해주고, 기도제목을 올리고 기도해주고, 또 묵상을 나누고,
그렇게 하다 보면 서로 영적 습관이 우리에게 형성됩니다.
이것을 꾸준히 하십시오. 이런 몸에 익은 습관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코로나 상황은 지금 우리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정말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추구하는가? 정말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를 보고자 하고 만나고자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예배를 중히 여기는가? 예배의 바른 대상을 알고 또 사랑하고 있는가?
나를 끌고 가는 몸의 습관은 무엇인가?
머리로는 어떤 생각을 한다도 해도 결국 몸의 습관이 나를 끌고 갑니다.
실제 나를 끌고 가는 몸의 습관은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예배를 더욱 소중히 여기십시오.
빠지지 않는 예배를 통해 꾸준히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는 영적 습관을 몸에 훈련하십시오.
그래서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코로나를 통과하면서 오히려 신앙이 더 성숙해지기를 바랍니다.
2021년 5월16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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