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천 동화 - 꿈을 직는 사진관 -
I.
따사한 봄볕은 나를 자꾸 밖으로 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젯밤만 해도, 내일은 일요일이니 어디 나가지 말고, 방에 꾹 틀어박혀 책이라도 읽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정작 조반을 먹고 나니 오늘은 유달리 날씨가 따뜻했습니다.
나는 스케치북과 그림물감을 가지고 뒷산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리거나, 그림에 취미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빈손으로 가기는 싫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들고 앉아 그 따사한 봄볕에 읽는 것은 한층 더 싱거울 것 같았습니다.
봄을 그리려고 산에 오른 이 서투른 화가는, 좀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내 눈이 맞은편 산허리에 갔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리만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활짝 핀 꽃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살구꽃이 피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할텐데, 저렇게 연분홍 꽃이 전등이라도 켠 듯이 환히 피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꽃나무 있는 데로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골짜기를 내려 다시 산으로 기어올라, 그 꽃나무 아래까지 갔습니다.
단숨에 달린 나는 숨이 차서 그만 땅에 주저앉았습니다.
숨을 돌리며 내가 꽃나무를 자세히 바라보았더니, 나무 밑줄기에 이런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 꿈을 찍는 사진관으로 가는 길 - 동쪽으로 5리 ★
나는 그 연분홍 꽃나무에 핀 꽃 같은 건 생각할 사이도 없이, 곧 이 꿈을 찍는 사진관을 찾아 떠났습니다.
동쪽으로 사뭇 좁다란 산길을 걸어가느라니까, 정말 조그만 집 한 채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집 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약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 문 앞엔 또 이런 것이 씌어 있었습니다.
★ 꿈을 찍는 사진관은 여기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
나는 남쪽을 향해 또 걸었습니다.
지금 온 만큼 가니까, 정말 또 한 채가 보였습니다.
나는 참 잘 왔다고 좋아라 집 문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까보다 좀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와 똑같은 글이 문 앞에 붙어 있었습니다.
아니 꼭 한 자만 틀립니다.
그것은 남쪽으로 5리가 아니라, 서쪽으로 5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나는 조금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만 더 속아 보자 하고 또 서쪽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꿈을 찍는 사진관을 찾은 것입니다.
이런 산중엔 어울리지 않으리만큼 커다랗고 훌륭한 양옥집이었습니다.
벽과 창문만이 아니라 지붕까지 새하얀 집 - 다만 정문에 커다랗게 써 붙인,「꿈을 찍는 사진관」이라는 일곱 글자만이 파아란 하늘빛이었습니다.
나는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시오? 들어오시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습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늘빛 파란 가운을 입은 점잖은 신사 한 분이, 하늘빛 파아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놓으며, 회전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오셨지요?"
"저어 … 여기가 꿈을 찍어주는 사진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찍지요?" 하고, 나는 찍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내게 조그맣고 얄팍한 책 한 권을 주며, 저 쪽 7호실에 가 앉아 소리 내지 말고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7호실을 찾아갔습니다.
1호실 다음엔 3호실, 그 다음이 5호실, 바로 그 다음이 7호실입니다.
어쩌면 사진관이 꼭 여관집과도 같습니까?
나는 그제야 이 집의 방 번호는 모두 홀수만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벽과 천장까지 새하얀 방 -
들어가는 문외에는 들창 하나도 없는 방입니다.
나는 그 방에 앉아, 지금 받은 얄팍한 책을 펴 들었습니다.
불도 안 켠 방이, 왜, 이리 화안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빛이라곤 들어올 곳이 조금도 없습니다.
9포 활자만큼 작은 하늘빛 글씨가, 어쩌면 그리도 잘 보입니까.
꿈을 찍으시려는 분들에게!
이렇게 멀리서 찾아오신 손님에게 먼저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께서 이 곳까지 찾아온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을 줄 압니다.
그 하나는 신기한 것을 즐기는 마음이요,
또 하나는 무척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당신이니 말이지만, 오늘 저 세상 사람들은 오늘의 문명을 자랑해서 '텔레비전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는 이 일에 비하면, 그까짓 게 다 무엇입니까? 문제도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 더우기 6.25 사변을 치루고 난 우리들에겐, 많은 잃은 것 대신에 가진 것은 안타깝게 보고 싶고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 우리에게 없지 못할 가장 귀한 것의 하나는 과거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추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묵은 앨범을 꺼내어 사진 위에 머물러 있는 지난날의 모습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사진이란 다만 추억의 그 어느 한 순간이요, 그 전부는 아닙니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란 흔히 사진첩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불완전한 것이나마 사변으로 인하여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행히 우리에겐 '꿈'이란 게 있습니다.
이미, 저 세상에 가 버리고 없는 그리운 얼굴들도 꿈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리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이라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꿈길에는 38선이 없습니다.
정말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 꿈이란 사람의 마음대로 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 꿈에 보려고 애를 써도 뜻대로 잘 안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잠깐 꿈을 꾸게 된다 해도, 그 꿈이 곧 깨면 한층 더 안타까운 것뿐입니다.
여기에 생각을 둔 나는, 이번 꿈을 찍는 사진기를 하나 발명했습니다.
이는 결코 거리의 사진사들처럼 영업을 목적한 건 아닙니다.
내게는 안타깝게 그리운 아기가 있습니다.
나는 그 아기의 사진까지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이 사진기를 만들게 된 게,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자아,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럼, 인제 꿈을 찍는 방법을 설명해 드려야죠.
무엇보다 그게 더 궁금하실 테니까요.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방에서 나오는 한 줄기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은 바로 사진기가 놓여 있는 곳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꿈을 꾸기만 하면 그 꿈은 곧 사진기 렌즈에 비치게 됩니다.
꿈이 비치기만 하면, 사진기가 저절로 '쩔꺼덕'하고 사진을 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필름에 사진이 찍히면 곧 현상하여 손님의 요구대로 크게 또는 작게 인화지(사진종이)에 옮겨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꿈을 꾸는 일입니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꿈을 꿀 수 있으며, 또 꿈을 꾼다 해도 그게 정말 자기가 사진에 옮기고 싶은 꿈을 꾸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로 내가 제일 오랫동안 연구에 고심을 한 것이 이것입니다.
꿈을 찍는 것쯤은 이것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오래 가졌었고,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는 마음대로 꿈을 꿀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실로 이것은 세계적인 아니 세기적인 발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럼 당신도 곧 그리운 이를 만나는 꿈을 꾸십시오.
그리운 이의 꿈을 사진 찍어 드릴 테니.
그 방법 - 당신이 있는 방 한구석에 흰 종이와 한 장과 만년필 한 개가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그 종이에 그 파란 잉크로 당신이 만나고 싶은 이와 지난날의 추억의 한 토막을 써서, 그걸 가슴속에 넣고 오늘밤을 주무시오.
내일 날이 밝으면, 당신은 지난밤에 본 꿈과 꼭 같은 사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을 겁니다.
한 가지 미안한 것은, 이 곳은 산중이어서 손님들에게 대접할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미안하지만 하룻밤 그냥 주무셔 주십시오.
꿈을 찍는 사진관 아룀.
II.
나는 종이쪽에 이렇게 썼습니다.
살구꽃 활짝 핀 내 고향 뒷산 - 따사한 봄볕을 쪼이며, 잔디 위에서 같이 놀던 순이, 노랑 저고리에 하늘빛 치마 - 할미꽃을 꺾어 들고 봄 노래를 부르던 순이 - 오늘 밤 정말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아직 해가 지기엔 시간이 좀 남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글 쓴 종이를 가슴에 품고 방바닥에 눕자, 방은 그만 캄캄해졌습니다.
참말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샘처럼 솟아오르는 지난날의 추억들.
정말 내가 민들레와 할미꽃을 좋아하는 까닭은 순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순이의 그 노랑 저고리가 어쩌면 그 때 내 마음에 그렇게도 예뻐 보였을까요?
III.
"순아! 오늘은 정말 네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감추려고 했지만 역시 알려 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만 순아, 울어서는 안 돼! 응?"
"무슨 얘기냐? 어서 말해 줘!"
"정말 안 울 테냐?"
"울긴 왜 우니? 못나게 …"
"그래! 픽하면 우는 건 바보야, 울지 말아 응?"
"그래! 어서 말해!"
"저어 …"
"참, 네가 바보구나, 왜 재깍 말을 못하니? 아이 갑갑해 - 어서 말해 봐!"
"저어, 말이지, 이건 정말 비밀이야,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랬어. 아무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만 난 네게 숨길 수 없어. 우리는 며칠 있으면 38선을 넘어 서울로 이사를 간단다. 여기서야 살 수가 있어야지. 지난 해 8월 해방이 되었다구 미칠 듯 즐거워했지만, 우리는 토지와 집까지 다 빼앗기지 않았어? 지주라구. 그리구, 우리를 딴 데로 옮겨가 살라구 그러지 않아. 빈손이라도 좋아. 우리는 마음놓고 살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을 찾아가야 해 …"
"얘, 나보고 울지 말라더니, 제가 먼저 울지 않아?"
소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는 원산이나 함흥에 같이 가자던 순이, 너와 내가 헤어진 것은 겨우 소학교 5학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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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V. |
ps: 어린이날을 맞이하여서 강소천 선생님의 동화를 감상해 보았습니다
http://www.kangsochun.com/ 이곳에 가면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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