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조금씩 다가가기

아굴의 기도처럼....

왕언니 2004. 1. 15. 11:30

                 

winter

 

 

1월12일 [월] 흐린후 오후에 눈

아침 8시 ,
같이 출근하기 위해 몇 안되는 아침식사 그릇들을 남편이 씻어 주는동안
나는 부리나케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누빈 바지에 알뜰시장에서 산 5천원짜리 브이넥 니트를 입고
모자달린 패딩파카를 걸친후 수세미와 면장갑,고무장갑을 넣은 천 가방속에
교통카드와 <가난과 부요의 저편> 한권을 넣고 집을 나섰다.

지난주 월요일에 이어 올해 들어 두번째 설거지봉사를 하러가기 위해서이다.

위축된 경기탓인지,관공서의 월요일 자가용차량출근 억제강조탓인지,
실직자가 많아진 탓인지,방학때문인지,..
아님 다들 겨울휴가를 떠난탓인지...
요즘들어 고속도로에 출근차량이 많이 줄은것 같다.

8시30분에 출발하여 신갈 오거리에서 조금 주춤거린것 말고는 일사천리로 달려
타워팰리스 맞은편 도곡역에 도착한것은 9시 10분,
남편은 나를 내려놓고 직진하여 가게로 가고 나는 뛰어서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지난 월요일은 성탄절날 미끄러져 계단오르기가 거북했는데도 불구하고
마포구역팀 설거지봉사를 도우러 갔었는데
일주일이 지난 오늘은 그날에 비하면 거의 정상을 회복한듯 걸음이 가볍다.

어제 주일날은 두시간밖에 못자고 새벽6시에 교회로 갔다가
제직회까지 마치고 집에 오니 7시,
다른날보다 더 일찍 자리에 들어 밀린잠을 보충하러 더 많이 잤는데도 피곤이 쌓였던 것일까...
책을 펴드니 눈이 무거워 몇페지 읽지도 못하고 이내 눈을 감고 약수까지 갔다.

약수역에서 6호선으로 바꿔타고 역촌역 1번출구로 나와
늘푸른선교회 역촌쉼터에 도착한것은 10시 40분.
옥수동과 신당동에서 온, 작년까지 내가 맡았던 우리구역 식구들은
고맙게도 약속대로 이미 10시에 도착하여 설거지를 시작하고 있었다.
당번이 아닌 내가 도착하니 다들 왜왔냐 말하지만 속으론 반가운 기색이다.

사실 한달에 한번씩만 봉사하기로 했으니 나는 세번째 월요일만 가면 되지만
이사람저사람 권유하다가 어물쩡 우리교회 설거지봉사 동원책이 된셈이라
내 성격상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만 보내고 그냥 말 수가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자기 집 허드렛 일도 힘겨워할 구역식구들이, 前 구역장의 권유로 물정 모르고 끌려와?
장화신고 비닐 앞치마 입고 커다란 고무물통앞에서 반쯤 구부린채
들통에 물 데워 노숙자 400명이 먹어치운 400개의 식판과 다른 조리그릇들을 씻는
생전 처음 해보는 원시적인 단순노동 작업이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래도 오늘은 쉼터의 남자들이 세분이나 거들어 주어 한결 수월하게 진행되는 편이었다.

나까지 세사람이, 미처 털어내지못한 시래기들이 둥둥 떠다니는 때에 절은 고무들통 속에서
무거운 스텐 식판을 하나씩 건져 올려,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닦아 한번 담근후
앉아있는 낮은 물통의 헹굼조에게 넘기면,
두사람의 헹굼조에 의해 두번 헹궈진 식판들이
쉼터의 아저씨의 숙련된 솜씨로 벽쪽의 간이작업대 위에 차곡차곡 세워 쌓여졌다.

설거지 내내 나는
김치국물로 벌겋게 변한 플라스틱 김치통은 어쩔 수없다해도
지난주에 락스에 담궈봤지만 별로 나아지지않은
검은 때로 찌든 두개의 커다란 플라스틱 도마만큼은
다음번엔 꼭 새것으로 사다주고 싶어 ,얼마나 할까,어디서 살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조류독감,돼지콜레라,부루셀라 감염쇠고기,비브리오생선...
날마다 신문지상을 도배하는 먹거리 걱정으로
온나라가 양은냄비처럼 달아올라 먹을게 아무것도 없다는듯 몸을 사리는 요즘이지만
이렇게 열악한 곳에서 조리한 무료급식을 먹고 탈이 났다는 사람이 아직 없다니
역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잡초처럼 환경에 적응하는 끈질김을 심어 주신것 같다.

눈이 안와서 막대한 돈을 들여 인공 눈을 뿌린 스키장을 찾는 사람들
따뜻한 동남아로 골프휴가를 떠나는 사람들
최신식 스파니,보석싸우나에서 하루종일 딩구는 사모님들이나,
웰빙이니 건강식이니 하며
백화점 매장에서 비싼 맞춤 유기농식품만을 골라사는 럭셔리한 고객들이
한달에 한번씩 주머니에서 굴러다니는 부스러기 잔돈 몇푼씩만 헌금해도
아니 준사람도 없고 받은 사람도 없이
임자없이 떠있는 검은 비자금 몇만분의 일쯤 떼어 던져준다면
이 네평짜리 지하차고 주방을 번듯하게 고칠 수 있으련만....


올가을 우리교회 바자회 수익금중 일부라도 이곳에 헌금하자고 제안 해 봐야겠다.

생각보다 설거지가 일찍 끝나 물뿌려 바닥까지 비질하여 말끔히 쓸었는데도
여섯 정거장쯤 떨어진 늘푸른교회에서 데릴러 오기로 한 차가 미처 오지 않자
다들 점심 먹지 않고 그냥 가겠다는걸
두집사님만이라도 내가 부득부득 우겨 시내버스를 태웠다.
오늘 점심 한끼 내가 사줘도 되지만
노인무료급식 현장을 눈으로 보아야 설거지봉사의 보람을 더 느낄것 같아서였다.

교회에는 여전히,먹고있는 할머니,기다리는 할아버지들로 가득차 있었고
[근데 왜 항상 할머니들이 더 빨리 오고,숫자도 몇배나 더 많은지 모르겠다.]
콩나물국에 시금치.콩나물,고사리,무우나물,쇠고기,계란지단까지 얹은
오늘 메뉴 비빔밥은 강남 한 복판 논현동 우리교회 점심보다 엄청나게 호화판이다.

주일마다 4,5백명이 먹는,[언제나 국,밥 김치뿐인] 우리교회 점심부식비용은 십오만원 안팎이지만
[우리구역주관 지난주일 메뉴는 들깨가루넣은 감자국은 감자가 비싸서 3만원초과였다]
국과 김치 불고기에 나물 한가지를 곁들이는
우리교회 주관 <행복한모임>에 오시는 70명 가량의 노인급식비용은 조금 더 써도 십오만원 안팎이다.

그런 광경을 처음 본 두 집사님은 처음엔 어리버리하다가
이내 겉옷을 벗어부치고 커피배달과 그릇회수에 나섰다.
노인들 급식이 대충 끝나자
이미 구면이 된 그교회집사님들은 십년지기나 된듯 허물없는 미소로
우리를 주방 안쪽의 간이온돌방으로 끌어들이고
몇가지 재료가 동이나 시금치와 콩나물만으로 비벼야할 비빔밥을 미안해 했다.

그래도 우리는 감사기도하고 웃으며 맛있게 먹었다.
역시 한국사람들은 곳간에서 인심나고 밥상머리에서 정이드는것 같다.
두 집사님들의 표정이 더 한층 푸근하고 만족해보여 나도 기뻤다.

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단다.
삼주만에 처음 뵌 심목사님이 선교회달력을 굳이 나눠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신다.
약수역에 두집사님이 내리고 그제서야 자리를 잡은 나는
아침에 읽다만 전광식교수의 <가난과 부요의 저편>을 펴들었다내가 좋아하는 아굴의 기도를 중심으로 쓰여진 책이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잠언 30장 7~9 아굴의 기도>


이 아굴의 기도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첫째,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두고 일시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닌
일생을 두고 하는 기도 제목이라는 점,
둘째,자기 모습과 삶에 대한 적나라한 인식의 고백에서 나온
매우 진솔한 기도라는 점,
셋째,철저히 하나님 뜻을 좇는 하나님 중심적인 기도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아굴이 했던 기도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신앙적,윤리적 의미때문이다.
허탄과 거짓말을 일삼고 그것을 선량한 가면으로 위장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이시대에,
오로지 富와 번영에 최고 가치를 두며 물질적 욕망으로 충만한 이시대 사람들에게,
아굴의 기도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나를 부하게도 마옵시고"라는 기도는
오로지 부를 획득하는것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활동하는사람들에게,
심지어 기도에서조차 富만 갈구하는 현대 물질 지향적이고 祈福적인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신과 신앙차원으로 나타난다.

배움도 지식도 못가진, 자칭 미천한 자 아굴이 했던 기도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단순히 큰 정도가 아니라 감동적이고 감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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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재물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때문에 재물이 있고,하나님을 위해 재물이 있는것이다.
재물은 건강,재능등과 같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셔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게 하신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감사와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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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굴은 여기서 자신을 비롯한 인간의 죄악과 심성을 잘 인지하고
자기 고백적으로 告하고 있다.
아굴은 인간이 부요해지면 남을 업신여기고 하나님께 마저 대항하여
바벨탑의 우상을 쌓을 수있는 교만성이 있고,
또 逆으로 가난해지면
재물에 대한 유혹에 빠져 비굴할 수 있는 인간의 연약성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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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돈있음과 돈 없음이 중요하거나 중심이 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 섬김이 중요하다.
재물이나 소유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가진 사람의 의식과 마음자세가 중요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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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거니!1 아멘!!짝짝짝...

주여 제발 나도 부하게도 마옵시고 너무 가난하게도 마옵소서
다만 내가 어려운 자들을 도울수 있을만큼의 재물과 아까워하지않는 용기를 주시고
그 위에 그것을 감사하는 겸손과 건강을 주신다면 더 무엇 바라리이까.....


두시간 반을 달려가서 도운 설거지봉사도 좋았고
때맞춰 내리는 눈도 좋았지만
다른곳에 있었더라면 차분히 읽지 못했을 그 책을 읽게 된
지하철속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 더욱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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