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친 막대기[7]....열길 물속은 알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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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희씨 집에서 나와 지척인 온정각으로 다시 나온 일행은
5시에 있는 모란봉교예단 관람까지 남은 두시간을 온천을 한번 더하자로정하였다.
원래 온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동네가 동네인만큼
개인적으로 뭘 할수있는 입장도 아니고 언제 다시 만날지 말지도모르는 금강산 온천물이고
게다가
여행주선측인 새천년측에서 공짜로 시켜준다니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어제보다 온천욕객은 더 많았지만 그게 다 남측
사람들이다.
다 빨가벗어서 신분은 짐작할수 없지만 대부분 뱃가죽 늘어진 환갑넘은 노인네들이었다.
그러나 북측 땅이건만 북측
사람들에겐 금강산 온천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
그야말로 금지된 장난 이요 그림의 떡이라니 이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온탕 냉탕을 거쳐 노천탕에 들어가서 30분쯤 있다 바로 탈의실로
나와
교예단 관람을 한후에 곧바로 목란각에서 만찬이 있다하여 드라이로 대충 머리를 만졌다.
로비로 나가니 네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남편도 먼저 나와 소파에 앉아있다.
남편과 목욕탕 로비에서 바알간 얼굴로 만나 본 일이 20년도 더 된것 같다.
단독주택에 살던
때말고는 대중목욕탕에 같이 가본일이 없으니...
다시 셔틀을 타고 온정각 한쪽에 있는 둥근지붕의 문화회관[공연장]앞으로
갔는데
온정각 마당이기도 한 그곳은 관광버스를 타고 온 남측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당일관광이나 1박2일을 빼고는
금강산 관광의 스케쥴에 거의 의무적?으로 교예단 관람이 들어있는 때문인것 같다.
앞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버스에 앉아 있는데 새천년 측에서 전광판을 보라한다.
무슨일인가하고 쳐다보니 우리교회가 착화탄전달식을 했다는 광고가 뜨는게 아닌가
김흥중회장의 자상한? 배려로 온정각관리소에 부탁하여 올렸다는데...
글쎄 이거야말로 오른손이 하는일을 동네방네 너무 떠드는것이 아닌가?
새천년측에서 일괄 구매해준 관람표를 들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 가보니
가득찬 사람들의 열기로 더 더욱 후끈후끈한데
설상 가상 좌석까지 무대 바로 앞 왼쪽 거의
끝쪽이다.
새천년측 사람들에게 자리를 좀 바꿔 달라고 해보자고 본부장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벌써 조명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되어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중국여행을 갔을때 가진돈이 달랑달랑하여 우리부부만 관람을 포기했었는데
이번에는 옵션이 아니고 필수여서 갈등없이 관람하게 되었다.
비록 너무 앞자리여서 목이 아팠지만...
1950년대말 초등학교 시절,추석이나 설날 즈음에
정읍 천변에 천막을 치고 공연하던 동춘서커스를,
가마니 깔고 앉아 구경하던 아스라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울긋불긋한 원피스에 타이즈를 입은 소녀들이 허공을 이리저리 날며 그네를 타고
허리를 동그랗게 말고 엎드리면
또 다른 소녀가 그위에 물구나무를 선채 항아리를 돌리곤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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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비하면 무대도 상설무대요,의상이나 장비도 최신식으로 바뀌고
공연하는 사람들의 평균연령도 높아보이고
그때의 청승맞은 트럼펫
연주대신
이층 오른쪽에서 생음악연주를 하는 검은색정장을 한 악단들도 중장년층이요
규모도 거의 오케스트라 수준이었다.
그 때 그사람들은 이 동네 저동네로 장날을 따라 전전하던
떠돌이서커스단이었지만
북측의 이 교예단은 전체가 400명인데 금강산에 와 있는 사람들은 스텝까지 100명정도이고[ 두팀으로 나뉘어 교대로
고연한다고 한다]
고위층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급여나 숙식대우 수준이 거의 장관급이라고 하니,
북측에서 배곯지 않고 잘
살려면 어릴적부터 교예단에나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튿날 만물상 가면서 그들의 숙소가 따로 숲속에 있는것을 보았다]
앞자리는 고개가 아픈대신 배우들의 긴장된 표정을 실감나게 볼수있는 잇점이
있지만.
공연중에는 사진촬영이 금지라서 생생한 표정을 카메라에 담지 못하는 아쉬움이 컸다.
북측의 교예단 수준은 이미 세계적이라는
평을 들어 짐작은 하였지만
호흡이 척척 들어 맞는 40여명의 남여 공연단의 모습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얼마나 연습을 해야 저정도가 될까...
눈꽃 조형,봉 재주,장대타기,공중2인 회전조형,공중비행등등...
사회를 보는 아리따운 여자의 유치한 한복과 작위적인 멘트만 아니라면
손에 땀을 쥐게하는 아슬아슬한 묘기와 세련된 복장과 코믹한
판토마임은
저사람들이 과연 공산국가의 공연단인가 할 정도로 유연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80여분의 공연이 끝나고< 동포 여러분 감사합니다. 또
만납시다>라는 인사와 함께
전 출연자가 무대로 나와 손을 흔들며 <다시만납시다>라는 노래를 합창한다.
그제서야 여기
저기서 카메라의 후레쉬가 터지고 모두들 진심으로 감탄의 박수를 쳤다.
흩어졌던 일행들이 다시 버스앞으로 모이고 구룡연 가는길에서 보았던 목란각으로
이동했다.
원래 목란각은 낮에만 개방되고 밤에는 북측사람들 외에는 공개되지 않는 곳이라는데
무상으로 4년동안 연탄보일러를 지원해주는
새천년의 위상은 역시 달랐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5분쯤 걸어 목란각으로 갔는데
낮에는 만질수 없었던 계곡물에 감히 손을 씻기도 했고
바위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기도 하며 만찬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목란각은 바위나 소나무를 실내로 끌어들인채 지은 독특한 건물이었고
안에 들어가보니 꽤 수준있는 연회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는데 너무나 소박한 실내장식이었다.
흰테이블보를 씌운 둥근 테이블과 소박한
의자들 ,남측 시골의 찻집의 카운터를 연상케하는 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림 한점 걸리지 않은 흰벽이 마치 이사짐을 덜 풀은 신장개업을 한
음식점같다.
만찬이 시작되기전, 김흥중회장의 제의로 목란각역사상 처음으로 우리교회 강권사님이 식사기도를 하게 되었다.
북측 사람들이 끼어있어서 너무 강한 기도가 역반응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다시 올수 없을줄 알았던 금강산에 오게 하시고,남북이 한식탁에 앉게 하신것 감사
어서 통일을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십사..하는정도였지만
본인이나 참석한 크리스찬 모두에게 뜻깊은 순서가 아닐수 없었다.
우리 돈으로 약 4만원정도의 정식이라 그런지 이것 저것 다양한 코스의
요리들이 나왔지만
맛이나 음식소재에 있어서는 전라도지방의 2만원짜리 정식수준에도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우럭튀김이라는 통째로 튀긴
요리는 어찌나 비린내가 심한지 중국에서 먹었던 잉어튀김이 생각날지경이었다.
접대원동무가 뭘 잘못 알고 있는건 아닐가? 우럭은 바닷고기인데
,,,거의 민물고기의 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우리의 만찬에는 금강산관광총회사의 사람들이 두사람 합석을 하였고
노래방기기를 틀고 접대원들이 먼저 노래를 부른후 우리가 오면서 배웠던 북한노래를 그들도 부르고 일행들도 따라불렀다.
사람들이
친해지는 방법중에는 한상에서 같이 먹고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이 노래를 부르고,같은 방에서 자면 최고라는데...
잠만 같이 자지않았을뿐
친해지려는 노력은 여러모로 하는 셈이었다.
대화속에는 체재에 대한 얘기만 빠졌을뿐 어쨋든 자주 만나고 통일은 이뤄져야한다는것이었다.
박교수님이 관광총회사 대표라는 김일성대학을 나온 젊은이와 이야기를
해보더니
북에 살았던 사촌형의 아들과 같은 연배라고 반가워서 서로 아저씨,조카 하기로 했다 하신다.
여러차례 노래를 부른
접대원들에게 줄 팁이라고 테이블마다 접시가 돌아가고 모두들 거의 50불씩 내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접대원들의 표정이 많이 상기 되고
부드러워지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해도 흔쾌히 받아주고
농담을 주고 받기까지 하였다.
두시간 넘는 만찬은 다같이 손을 잡고 둥글게 돌며
우리의 소원,나의 살던 고향,,다시만나요,등을 부르고 끝이
났다.
밖으로 나오니 가로등 하나없이 깜깜한 어둠이 우리를 맞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주차장까지 걸어가는데
앞사람이 라이터를 켰다 껐다를 하지 않았다면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전력난이 심각해서일까,보안을 위해서 일까...
하긴 인적도 없는 산길에 그 아까운 전등을 괜히 켜둘 사람들이
아니지...
중국여행때도 깜깜한 길을 오로지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의지하고 이동했었는데...
사회주의국가의 특징은 어무워지면 전기
아끼기 위해서라도 불끄고 일직 자라...가 아닐가?
호텔로 와서 교회식구들이 우리층의 로비에 모여 회의를 했다.
새천년이나
북측에서는 앞으로도 이런식의 지원을 은근히 요청하고 있는데
다음달 제직회때 우리가 보고를 어떻게 할것인가를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자는것이었다.
박교수님은 북측에 아직 친척이
있어 그런지
어떤식으로든지 북측에 지원을 해주자는 쪽으로 말씀하셨지만
강권사나
나,다른 남자집사들은 우리가 본대로 전달한대로만 보고를 할뿐
지원여부의 판단은 교인들에게 맡겨야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상황은
본사람과 얘기만 듣는 사람,
북에 끈이 있는 사람과 전혀 없는 사람의 그 느낌이 같을 수는 없기에...
마지막날, 쾌청한 아침이 밝았다.
다른 스케쥴은 없고 아침식사를
한후 8시 반부터
만물상과 해금강 둘중에서 원하는방향의 버스를 타고 관광을 한후
12시에 점심을 먹고 1시에 북측 CIQ로 간다 고 하였다.
전에 만물상쪽을 다녀왔거나 걷는것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해금강코스를
택했고
우리 교회사람들은 다 만물상코스를 택했다.
그러나 만물상 코스는 직선거리는 짧으나 경사가 급하고
암벽으로 오르는 사다리들이 겨우 한사람만 지나갈수있는 폭이어서
구룡연코스보다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리고 있었다.
제일 높은 천선대까지 가려면 두시간 반은 걸린다는데
화장실에 갔다가 연탄바께스 사진까지 찍고 늦게 출발한 우리부부는
사람들에 걸려 자꾸만 뒤로 쳐졌다.
결국 우리는 망양대까지만 오르고
백코스를 해야했다.
주차장에 11시반까지 도착하라는데
팔순 노인과 초등학생까지 골고루
섞인,오늘 떠나지 않을 2백여명의 등산객들을 뒤따르다가는
도저히 시간안에 등정을 마칠수가 없어보여 차라리 일찍 되돌아 내려오며
사진이나 찍자는 심산이었다.
금강산의 등산 코스는 22가지나 된다고 하는데
지금 남측이 갈수있는 코스는 네곳 뿐이라고 한다.
군데 군데 조잡한
노점을 지키고 있는 처녀들을 제외하고는
북한주민들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위해서일것이다.
땅은 북한 땅이로되 그 땅을 밟는
사람들은 다 남측사람들이니
이 세상에 이렇게 돈버는 사람들이 북한말고 또 누가 있을까?
어떤 여행이건 계획하고 준비할때는 오만가지를 다 보고 올것처럼 꿈에
부푼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 가보니,내겐 산속이라 추울가봐 가져온 긴팔옷 긴바지가 무용지물이었고
모자고 썬그라스고 비옷이고
여러상황을 상상하여 이것저것 여유있게 가져왔건만
줄줄흐르는 땀때문에 모든것이 귀찮고
오직 썬캡과 목에두르는 타월과 시원한 반바지가 최고였다.
우리팀은 모두들 시간엄수를 하여 겨우 열한명만 1호차를 타고 서둘러 내려와
샤워를 하고
2층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었다. 온정각이나 금강원에서 한번쯤 다른 밥을 먹었으면 했는데
이쪽 사정이 잘 맞지가 않는지
계속 점심은 호텔에서 먹어야했다. 맛도 없는 냉면 아니면 비빔밥을...
원래는 아침에 가방을 챙겨체크아웃을 한후 짐을 프론트에 맡기고 등산을
다녀오라는거였는데
등산을 하고 땀에 범벅이 된채 그대로 밥먹고 호텔을 떠날수는 없다고 사정을 하여
이미 체크 아웃을 한 방에
우리팀만 특별히 다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밥을 먹는 특혜를 누렸다.
다 그동안 온정리마을에 길을 닦은 새천년의 공 때문에 현대측에서도 눈을
감아주는것 같았다.
온정각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제2 온정각이 지어지고 있는 한켠에 서있는 정몽헌 추모비를
구경?했다.
어찌됐건 정주영씨의 동키호테?같은 용기와 정몽헌회장의 노고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많은 사람들이 특히 나같은 사람까지
금강산 관광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꿀일일게다.
아직도 수십억이 적자라는데...
현대가 안고있는 여러가지 미스테리를 안고 뛰어내린 정몽헌...
이제
그의 아내가 뒤를 이어 대북 사업을 계속 할거라하는데
또다시 김윤규 부회장의 비리로 삐걱거리는것을 아는지 모르는지...죽은자는 말이
없다.
그의 머리카락 몇올이 묻혀있다는 묘? 옆에
도올 김용옥이 쓴 비문이 무심하게 칠월말의 햇볕에 뜨거워져
있었다.
주말과 피서철이 겹치면서 관광객이 폭주하여
서울에서 오는 버스들이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지는지
온정각에서의
대기시간이 길어져 면세점과 기념품 판매소를 구경했다.
아무것도 사지 않으리..했던것을 그래도 여비를 마련해준 애들에게
무언가 사다줘야할것같아
가짜가 없다는 꿀과 송화가루를 사고 지도를 한장 사고
더위에 지쳐 2불씩을 주고 냉커피를사서 교회식구들에게 돌렸다.
올때와 똑같은 절차를 거쳐 북측 CIQ와 남측 CIQ를 거쳐
드디어 금강산콘도에 도착하여 핸드폰을 돌려받았다.
그동안 핸드폰에
고파?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가족들에게 전파를 쏘아대기 시작한다.
<응 난데 이제 남쪽으로 넘어 왔어 여기서 3시 반쯤 출발하면
중간에 저녁먹고 서울에 8시쯤 도착한대...>
그러나 밀리는 휴가차량에 곳곳에 도로공사가 겹쳐
진부령을 지나 면서부터 막히는 길때문에 가다서다를 반복하여
우리가 서울에 도착한것은 9시가 넘어서였다.
인천시의원들은
미사리를 통과하다 중간에 마중나온 시의회버스에 옮겨탔고 ,
우리교회팀들은 모두 한남대교를 넘어 차에서 내렸고
강권사님과 우리부부는 택시를 타고 교회로 갔다.
벌써 내일이 주일이라 우리부부는 새벽에 갖고갈 성가대의 빵과
김밥주문이 급했다.
마담포라주차장에 얌전히 서있는 우리차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빵집에 전화를 하니
11시반이 넘으면 마트앞의 회집에 맡기겠다한다.
다행히 문닫기전에 빵집에 도착하여 빵을 찾아 집에오니 12시
10분전...
그러나 오는길 내내 대낮같이 밝은 가로등들 간판들을 보며 ...
하늘과 땅같이 다른 어젯밤 칠흙같던 금강산 목란각 가는길이 생각난다.
어쨌거나 이제 정주영씨가 98년 소떼를 몰고 물고를 튼지 7년이 지난 지금
금강산관광이 북한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는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남한의 어떤 사람들은 금강산관광을 트로이의
목마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북측에서는 단지 달러벌이의 목적으로 시작하였기에
금강산관광의 여파가 전국에 퍼지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고 있다한다.
장전항과 온정리의 토박이들을 다른곳으로 소개시키고
黨性이 강한 평양토박이들을 이주시켜 입조심을 시켰다지만
2~3년 전에는 금강산호텔에 유숙하는 직원들에게 접근하여
한끼 10달러씩의 밥값보다 싼 8달러에
더 좋은 밥을 먹여줄수있다고 흥정해오기도 하여 따라가 먹어보았더니
실제로 더좋은 반찬을 내놓더라는 얘기도 전해지는 걸로 봐서
북한땅에도 알게 모르게 시장경제 자본주의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한길 물속은 알아도 저들의 꿍꿍이속은 알수없지만
한번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리라.
그런면에서 군대로도 열지못할 철의 장막외투를 DJ의 햇볕정책이 벗기고 있는
셈이니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여눈부신 발전을 하는것처럼
북한도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아무리 되풀이 되어도
백두산
관광,개성관광사업이 성사된다면 ,
여기저기 남한의 물자가 기계들이 속속 올라가고 공장이 세워지고
그
공장에서 북한처녀들이 물건을 만들고 ,
남측사장이 주는 월급을 받는 여공들이 많아지면
결국은 자본주의의 거센
바람앞에 두손 두발 다 들고 흐물흐물해지는 날이 결국은 오리라 생각한다.
그 때가 되면 북한땅에도 24시간 편의점이 생기고 밤12시에도 암시랑토않게
돌아다니며
컵라면이나 햄버거로 야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우리가 50년대말,정전이 밥먹듯 되풀이
되던,
희미한 알전구를 대책없이 쳐다보던 때를 추억처럼 떠올리듯
그들도 2005년 배고프던 시절을 옛날얘기처럼 말할때가 정말로 오리라.
내가 죽기전에 그런날이 도래한다면
그때 나도 옛말하며 , 제대로 못본 금강산구경을 다시 가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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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말 알 기........온정각 에서 적었습니다.
외래어...들어온말. 갈등....마음다툼. 살뺀다[다이어트]...몸깐다. 표준어...문화어.
웅담...곰열. 스킨.....살물결. 주민증.....공민증 샤워장....물맞이칸.
캠페인...캄파니아. 소시지...칼파스 뻥튀기......펑펑이 옹고집....땅고집
양파......둥글파. 목발......짝다리 찌개........지지개 양갱.......단묵
흡연실...담배칸 절친한친구...딱친구 주름살...주근살 트럼프...주패
대머리...빈대머리. 두건.....배감투. 도시락통....밥곽 탁아소....애기궁전
그럴듯하다...얼싸하다. 야무지다....오돌차다. 올케...오레이 화장실...위생실
여리다...대리다. 도와주다...망조하다. 추수...벼가을 별똥.... 별찌
잘못된말....빗말. 잔돈...부스럭돈 잼....단졸임 어렵다...배차다.
상투...부두 미소....볼웃음 세탁소,...빨래집 설탕.....사탕가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