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히 쓰는 그릇, 천히 쓰는 그릇은...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딤후: 2장 20~21]
큰일을 많이 치루는 집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필요합니다.
고급음료나 포도주를 빛내기위해 크리스털술잔이 필요한가 하면
화려한 음식을 담기위해 멋진 그림이 그려진 접시도 필요하고
조림이나 ,다만 야채를 데치기 위해 찌그러진 허드레 냄비도 필요합니다.
28년 전 서울로 살림을 날 때 우리 시어머님이 제게
닳아진 놋수저 한 개를 주셨습니다.
이른바 달행이 수저지요.
감자껍질이나 무를 긁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때 이미 나는 성능 좋은 감자칼이 있었지만 가난한 시어머니의 마음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닳아지지 않은 수저로는 닳아 얄팍해진 수저처럼 껍질이 잘 안 깎이고
번쩍이는 새남비는, 데레간장 넣고 오래 끓여야 하는 생선조림은 좀 조심스럽습니다.
두껍지만 오래되어 고운 때가 가시고 더러는 찌그러진 냄비가 훨씬 쓰기에 만만합니다.
아무리 번쩍이는 은그릇 금그릇이 있어도
샐러드는 나무그릇이 더 유용합니다.
금속의 속성이 음식을 오히려 상하게 하니까요.
그런가 하면 상치나 쑥갓 같은 쌈재료는 소박한 대소쿠리보다 더 좋은 用器는 없습니다.
사기그릇이나 스테인리스는 오히려 물기를 겉돌게 하며 맛없어 보이게 합니다.
다만 장식으로 놓이는 접시가 있는가 하면
뜨거운 냄비밑에 들어가야 하는 받침용 접시도 있어야 하고
각사람이 음식을 덜어먹기 위한 앞접시도 필요합니다.
그릇모두가 폼난다고 금그릇이 되어 번쩍거리고만 있다면
잔치는 오히려 엉망진창이 되어 주인을 망신스럽게만 하겠지요.
살아가며 어느 집단이나 모임이든지,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서로 어울려 일을 하다 보면 각자의 소질대로 달란트대로 일을 맡게 되는데
특히 성숙한 교회일수록 자신이 자신의 분량을 알아
소리 없이 자기 일을 찾아 하므로 조용하지만
지도자들부터 함량 미달인 교회는 일마다 시끄럽고 삐그덕거립니다.
교회의 큰 행사나 모임이 있어 부엌일이나 청소 뒷정리등
해도 별로 빛나지 않고 폼도 안나는 일이 있는가 하면
한복 곱게 입고 교회 입구에서 손님 안내를 한다든지
단상에 올라가 성경낭독이나 기도를 하고 목사님 방에 차 심부름을 하는 일들은
힘도 별로 들지 않고 폼도 납니다.
그렇다고 젊지도 않고 용모 단정하지도 않은 늙은 집사들이
다만 오래된 일꾼이란 자부심만으로 물색없이 앞줄에 서서 얼쩡거리다간 욕먹기 십상입니다.
<이 나이에 내가 하리?>하는 억울한 생각이 들어도
닦인 앞치마 두르고 쪽파 까는 일, 국솥 닦는 일에 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교회에서는 장로 권사 투표가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다른 교회에서는 장로나 권사가 되기 위해
알만한 교인은 물론 한 다리 건너 잘 모르는 교인들에게까지 전화로 한표 부탁하고
물량공세도 아끼지 않으며, 목사님이나 교역자들에게까지 은근히 뇌물을 갖다 바치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유력한 세분이 일차 후보에 오른 후 사퇴를 했습니다.
나이가 젊다고, 지방으로 전근가게 될 것 같다고,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시쳇말로 떼어놓은 당상이요, 땅 짚고 헤엄치 기인데 말입니다.
교회는 그 뜻을 존중하고 , 그리고 꼭 되어야 할 사람들이 선출되었습니다.
탈락한 사람들도 그 자리에서 서로 축하하고 화기애애하게 끝났습니다.
아무도 장로 권사자리가 權座라고 생각지 않으며 군림하려 하지 않고
자기 시간을 쪼개어 봉사하고 더 열심히 새벽기도를 하십니다.
나는 이런 우리 교회가 자랑스럽습니다.
교회에는 금그릇도 필요하고 은그릇도 필요하지만 천하게 쓸 그릇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무리 귀 한 그릇이라 해도
깨끗이 닦여있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물이 묻은 그릇은 제아무리 금그릇이어도 음식을 담을 수없다는 것을...
정말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이 귀히 쓰임 받는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 저는 이렇게 나일론 집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