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조에라이프...하나님 사랑,이웃사랑의 삶

왕언니 2023. 10. 24. 11:47

누가복음 10:25~28....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너가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 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시편 133:1~3..............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우리의 질문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영생에 관한 질문은 율법사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이 묻는 질문인데, 다만 사용하는 용어가 다를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는 헬라 문화권 속에 있어서, 그들도 영생을 구했지만 그것은 죽은 이후의 영혼불멸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역시 영생을 구했는데 , 그들에게 영생은 헬라 사람들처럼 영혼불멸이 아니라,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이룰 새 시대와 새 나라였고,. 그것을 그들은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그 나라는 로마에서 독립한 정치적 나라요, 또한 그 길은 다섯 가지 정도였습니다.

 

하나는 로마주의자의 길로, 로마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 로마처럼 먹고사는 길입니다.

당시 상층부 사람들이 갔던 길인데, 이것은 몸은 살지만, 우리가 일본 강점기에 주권도 이름도 글도 문화도 다 뺏김으로 정신은 죽었던 그런 길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열심당원의 길로, 로마에 대한 저항하는 길인데, 이것은 정신은 사는데 몸은 완전히 전멸하는 길로, 맛사다 항전이 그런 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주의자와 반로마주의자 사이, 극우와 극좌 사이에서 세 갈래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입니다.

 

어떤 것이 참 사는 길인가? 어떤 길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백성으로 참 사는 영생의 길인가? 이것이 그 시대의 쟁점이었습니다.

지금 그 장소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가자지구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땅 서안지구는 파타라는 자치정부가 통치하고 가자는 하마스가 통치하는데

파타는 두 국가론을 주장하고 하마스는 이스라엘 멸절론을 주장하고 있어서

가자지구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질문을 우리 시대의 용어로 바꾸면,

어떻게 하면 행복한가,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 가 됩니다.

영생, 즉 잘 사는 것, 참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시대의 영생은 아마 부자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일 겁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 지금의 60대 이후사람들은 <자녀들에게 기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경제력 있는 세대>가 되었고, 육체 또한 건강해서 <기대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세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는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 3일만  아프고 죽자는 9988234가 유행했는데... 

이제는 바뀌어서 9988231  되었답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 3일 앓고 다시 일(1)어나 100세 그 이후까지 살자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이런 영생을 추구하는데 이렇게 하면 정말 사는 것일까요?

 

영생, 참 사는 것, 영원히 지속 가능한 삶은 

과연, 죽은 이후의 영혼불멸, 지상에서 부유하게 오래 사는 것일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 영생은

진정 무엇이고, 그것에 이르는 길은 어떤 것일까요?

 

 

영생이란?

 

영생은 문자적으로 영원히 산다는 의미입니다.

원어로 “조에 아이오네스”입니다. 조에가 생명이고 아이오네스가 영원한 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영생이라고 하면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지만,

핵심은 어떤 생명인가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생명을 말할 때 <비오스.> <프쉬케>, <, 조에>이런 용어를 사용합니다.

 

비오스는 생물학적 생명을 말할 때 사용하는데, 프시케와 조에란 두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 두 생명의 차이는 어디에 속했느냐에 있습니다.

 

프쉬케는 첫째 아담에 속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민족도 혈통도 다르지만 크게 보면 다 첫째 아담의 후손입니다.

첫째 아담의 후손이란 , 첫째 아담의 생명을 갖고 산다는 말로

특징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간 생명>입니다. 이 생명의 특징은 자기 사랑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사랑의 대상이 심하게 자기 안으로 굽어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죄를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마음'이라고 정의했는데, 사랑의 대상이 항상 자기로 심히 집중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랑의 대상이 자기로 심히 굽게 되면 ,

자기 사랑을 위해,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을 사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고, 그런 하나님일 때 하나님이라고 여깁니다. 즉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웃 역시 사랑의 대상에서 사용의 대상으로 바뀌어, 자기를 위해 이웃을 이용하고 지배하고 속이게 되고, 나아가 사랑을 위해 사용해야 할 물질은 사용의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이 아닌, 숭배의 대상으로 바뀝니다.

수직축이 틀어지면 수평축이 다 틀어지듯, 프시케 생명에는 이런 뒤틀림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가 육체와 다른 육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육신은 body가 아닌 flesh라고 부른 생명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대상이 바뀌고 순서가 바뀌게 되는 것이 프시케 생명의 특징입니다.

 

만약 프쉬케 생명으로 영원히 살면 어떻게 될까요? 프시케 생명으로 살았던 모습은 일찍이 아담과 하와 사이와 카인과 아벨 사이에서 일어났던 무책임과 살해였고, 프시케 생명으로 살 때 일어나는 비슷한 일들을 우리는 지금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과 우리의 현실에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옥을 만들어 고통을 준다고 여기지만, 프쉬케 생명이 모여 살면 그곳이 지옥이 됩니다.

<오징어 게임>이 풍자하는 세상, 극단의 경쟁과 적자생존의 삶이 만드는 지옥 같은 현실, 그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지옥을 선택하는 세계, 사실 프시케 생명으로 살면 그런 세계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영생에는 시간의 길이보다 생명의 질이 더 중요합니다.

 

 

조에 라이프

 

둘째는 조에란 생명입니다.

첫째 아담에 속한 프쉬케 생명과 달리

조에는 둘째 아담에게 속한 생명이고, 그 둘째 아담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거듭나야 천국에 간다고 하셨을 때,

그 거듭난다는 의미는 첫째 아담의 생명에서 둘째 아담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과 달리 하나님과 사람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하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물질도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위해 사용하며 다스립니다.

 

이 생명은 의로운 생명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義’란 단어는 도덕적 무흠이나 법정 무죄보다 관계에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요셉이나 보아스가 의롭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친척으로서 친족 나오미에게 관계의 의무를 다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조에는 바른 관계 속에 있는 생명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합니다.

프시케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랑하지만,

조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물질은 사용합니다.

 

이런 조에 생명으로 계속 살면 점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그런 조에 생명이 함께 살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은 인간이 자기 사랑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진 환경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조에는 생명이 모여 살아가는 공동체가 천국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사랑

 

조에 라이프의 첫째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힘을 다해 사랑하는 사랑의 관계 안에 참 생명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사랑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프시케는 자기 사랑이 목적이기에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은 내 필요를 채워주는 한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조에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데 이것이 가능한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라고 하셨습니다.

영생 즉 조에 라이프는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앎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는 내용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비슷한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영생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셨음을 믿을 때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알고 믿는 것이 영생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알고 믿는다는 의미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독생자’(유일한, 모노)’(아들)를 수식하는 형용사이면 유일한 아들이 되고,

’(게네스)을 수식하는 부사가 되면 유일한 생명이 됩니다.

그런데 영어의 ‘only-begotten son’에서도 보듯이,

‘독’은 ‘자’가 아닌 ‘생’(낳다, 존재하다)을 수식합니다.

즉 예수님은 유일하고 독특한 생명을 가진 분이란 의미입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은 그러합니까? 하나님이 성육신 하여 인간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어떤 의미가 됩니까?

하나님이 가진 좋은 것 중에 무엇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일서 4:10)

 

즉 우리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은 , 우리를 먼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먼저 하신 사랑을 알 때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 생명의 조건인데,

이 사랑은 우리에게서 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의 먼저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주심 속에 있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사랑은 찬양으로 예배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우리와 하나님을 사랑의 관계 안에 세웁니다. 이러한 바른 사랑의 관계가 영생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갈릴리 호수로 찾아가셔서 세 번이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이때 상황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구워 놓으시고 기다리셨다가 물고기를 베드로에게 건네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물고기를 먹을 때 물고기만 보지 않고 그 손도 봤을 겁니다. 그 손에는 십자가 상흔이 선명하게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든 손의 상처를 보면서, ‘나는 너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했다’라는 메시지를 가슴 깊이 먼저 들었고, 예수님에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거나, 자신은 적게 사랑하면서 우리에게 큰 사랑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먼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시고 그 사랑에 응답하게 하십니다. 조에 라이프의 핵심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 하나님 때문에 살고 있음을 알고 감사하고 예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천국도 우리는 죽임 당한 어린 양 속에 담긴 하나님의 먼저 사랑과 그 사랑의 반응인 찬양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이웃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을 하나님에게 갚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웃에게 갚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을 받은 이를 통해서 계속 흘러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응답하는 사랑이고, 이웃 사랑은 흘러가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계속 흘러 넓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이웃과도 사랑의 관계를 만들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조에 라이프의 둘째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 사랑도 역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앎으로 가능합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일서 4:11).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 같은 허물 많은 존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안다면,

허물이 많은 이웃도 사랑할 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살면서, 이웃에 대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배반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이웃에 대해서 사랑을 받을만한 존재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내가 이웃에 대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앉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용서를 받은 종의 비유를 통해서,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다면 이웃의 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하는 것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도 용납해 주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웃도 용납하고 이해하려고 할 수 있는 이유와 힘이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도 나 자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웃 사랑에서 핵심은 가진 것 중의 일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나 자신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란 소설이 있었습니다.

What would Jesus do? 이것을 이니셜로 WWJD라고 새겨 손목에도 밴드로 차고 차에도 붙이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물어보라는 겁니다. 이웃에 대해서도 “내가 그였다면”이란 질문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그의 입장에 먼저 서보는 것이 이웃 사랑의 시작이자 완성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는 서로서로의 처지에서 서 보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도 죄를 보고 바로 법을 따라 심판할 수 있지만,

먼저 우리의 자리에 서보셨습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현실 속에 들어오셔서,

친히 가난한 사람이 되시고, 멸시를 받으시고, 억울함을 당하시고, 모욕을 받으시고, 욕설을 들으시고 , 동족과 친구에게서 배반을 받으시고 , 뺨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폭행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되어 보시고, 우리의 입장에 서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전혀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시고

구원이란 선물을 아래로 던져주듯 하셨다면 사랑의 관계는 생기기 어려웠을 겁니다.

 

상대에 대해 공감하고 그의 입장에 서보지 않고 내 처지에서 판단하고 시혜를 베풀 듯 행하는 것은 사실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나 자신처럼 너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남이 나를 그렇게 해주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지난주 황 선교사님이 말라위 선교 보고를 하셨는데, 기도 제목 중에 말라위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왜 그런 기도를 했을까요?

지난주 보고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부정직함, 도둑질, 거짓말을 보면서 사랑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교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그것은 살만한 한국 기준으로 그들의 행동을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내가 저런 극한 가난 속에 살았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자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기준으로 판단하기 전에 말라위 형편의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마스가 잔인한 테러를 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강력한 복수를 하려고 하는데, 만약 자기들이 받은 고난만 크게 생각하지 않고 상대가 받은 고통을 생각하고 공감하는 일을 꾸준히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영생을 시편 133편은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 133편)

 

헤르몬산 꼭대기에 이슬이 내리면 그것이 산 아래로 흘러 산 아래까지 모든 생명이 자라서 산은 생명이 자라는 곳이 됩니다.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 기름이 수염을 타고 옷깃까지 흘러내립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각양의 은사의 기름을 붓습니다. 그것은 재능, 재물, 직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공동체 밑바닥까지 흘러내려갑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늘의 기름 부 음의 은혜 아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수직적 결속이 형제자매들의 수평적 결속을 만듭니다. 하나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웃 사랑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이웃이 형제자매적 연합과 동거가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고 천국의 모습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영생에 관해서 묻자 예수님은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에게 행복, 만족, 잘 사는 삶에 관해서 물으면 예수님은 성경을 보라고 하십니다. 성경이 증거로 제시하는 영생은 영혼이 혼자서 이웃이 없고 타자가 없고 혼자서 특권적 낙원에 안주하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육신이 혼자서 프쉬케 생명을 사는 것, 자기 사랑으로 즐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서로 형제자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속에만 참 영생이 있습니다. 이렇게 참 사는 것만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유사품 영생을 붙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 길을 자기 사랑이란 길에서 찾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길을 통해 참 영생, 조에 라이프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023년 10월15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