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나 헛되지 않다...성경적 인생관과 영적 성장
전도서 1:2~4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세대는 가고 한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헛되나 헛되지 않다”
우리는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눈으로 보고 살아가는데,
영적생활에서도 말씀을 듣는 귀, 기도로 말하는 입, 성경을 통해 보는 눈이 있어야 성숙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보는 것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에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각각 자기 관점으로 인생을 보며 살아가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열심보다 바른 방향입니다.
인생의 길을 보여주는 인생관 자체를 물어야 합니다.
코헬렛
그래서 인생에 관해 묻는 이들이 많았고 답을 찾는 이들의 무수한 발자국들이 도서관에 꽂힌 수많은 책 속에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관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중요한 책은, 바로 구약성경 전도서입니다.
전도서는 제목이 “도를 전하는 책"이고, 책의 화자인 전도자는 “도를 알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그 도란 ‘인생 길’이요 ‘인생의 바른 관점’입니다.
전도서란 책의 제목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 70인역에서 "에클레지아스테스"(Ecclesiastes)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모으다’라는 뜻의 "에클레시아"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교회를 모인 공동체란 의미로 ‘에클레시아’로 부르는데,
‘에클레지아스테스’는 인생에 관한 지혜를 모으고 그것을 모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전도서를 "코헬렛"이라 부르는데 이 단어도 ‘불러 모으다’라는 "카할"에서 나왔습니다.
구약의 회중도 카할이라고 부릅니다.
코헬렛은 인생 지혜를 모으는 사람, 그것을 모인 이들에게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특히 모인 젊은이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전도서입니다.
지혜를 모은 전도자의 말이 성경이 되었는데,
일반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를 통해서 위로부터 주어지기도 하지만,
관찰과 수집을 통해 귀납적으로 찾아낸 지혜를 통해서 아래로부터 발견하기도 하는데,
잠언과 전도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꽤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잘 관찰하고 지혜를 모은 전도서가 보여주는 인생은 무엇일까요?
헛되다
전도자는 인생에 관해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12:8) 헛됨이란 단어가 한 문장에서 무려 5번, 전도서 전체에는 38번 나옵니다.
같은 문장이 마지막인 첫 부분과 , 12장 8절에서도 반복됩니다.
‘헛됨’이란 단어를 들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허망함, 부질없음, 덧없음, 부조리함 등입니다.
불교적 맥락에서 인생은 무상한 것이고 변하는 인생의 모든 것이 허망하고 헛됩니다.
무신론 철학자들의 맥락에서 인생은 부조리합니다.
그 부조리함 이란 우리의 지적 한계 때문에 세상이 이해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닌,
인생 자체가 뜻도 목적도 의미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헛됨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원어가 ‘헤벨’인데 ‘입김,’ ‘수증기’ ‘안개’란 의미입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편 62:9) 이 구절에 나오는 입김(‘헤벨’)처럼, 인생은 추운 날 숨을 내쉬면 잠시 하얗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입김과 같습니다. “ 너희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 개니라”(야고보서 4:14) 이 구절에서처럼 인생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오래 살지 못하고 형에 의해 죽음을 맞은 성경의 인물 ‘아벨’의 이름이 곧 ‘헤벨’입니다.
전도자가 인생이 헛되다고 할 때 그 뜻은 인생 자체가 뜻도 목적도 의미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생의 시간과 시간 속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란 순간은 금방 과거로 사라지고, 그 지금은 잠시도 붙들 수 없고 과거로 사라진 후는 되돌이킬 수 없이, 이러한 지나감과 사라짐의 시간 안에서 우리 모두는 삽니다.
이런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헛된 모습을 삶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 왕이 많은 업적을 세우나 그 업적이 다음 세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금세 과거로 사라집니다.
“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전도서 12:12)라는 구절처럼, 한 사람이 세상 이치를 찾는다고 일생을 바쳐 책을 썼지만, 금세 도서관 한구석에 꽂히고 다시 새 책을 쓰는데 그 책도 곧 그렇게 되고 맙니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며 싸웠지만, 금새 다른 악이 등장하면서 그 노력이 물거품으로 만듭니다. 일생을 바쳐 이룬 사업의 수식도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악단 가무로 즐긴 지금의 쾌락이 금방 시들해진 채로 사라집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고난의 시간이 올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구절을 듣고 위로받지만, 지나가는 것 속에 좋은 시절도 젊음도 있는 것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시절도 힘든 시절처럼, 그렇게 연기처럼 안개처럼 바람처럼 금방 과거 속으로 사라집니다.
메멘토 모리
이처럼 모든 것이 시간 속으로 나타났다가 시간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빨리 흐르는 시간의 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간의 끝이 갑자기 찾아오지만 시간 속에 살다 보니 그것을 잘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권합니다. “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전도서 7:2).
전도서 맥락에서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좋은 이유는 슬픈 사람을 위로함이 더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 마지막이 온 것처럼 내게도 그 시간이 속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이렇다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시간이 짧으며 그 시간은 속히 지나가고 시간 속의 모든 것이 쉽게 잊힌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일찍이 로마 개선장군이 개선행렬을 끌고 돌아올 때 노예가 곁에서 “메멘토 모리”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했듯이, 언젠가 생의 모든 순간이 사라지고 죽음이 온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즉 이 땅의 인생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지 말고 인생은 빨리 지나가고 속히 지나간다는 것,
즉 인생은 헛되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이 소중하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이 속히 지나간다고 해서 넋을 놓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속히 지나가는 시간이기에 인생이 비극인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그 시간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고 살아갑니다. 물고기에게 물이 존재 조건이듯, 우리에게 시간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 존재 조건입니다. 시간 속에서 만남과 성장과 사랑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비극은 시간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산다는 것, 인생을 다 보낸 마지막 순간에야 그 의미를 깨닫고 후회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신속히 가는 시간 속의 인생을 잘 모르고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만나고 후회하기에 십상입니다. 그런 경험을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는 자기의 묘비에 이런 위트 있는 문구로 남겼습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 내 언젠가 이 꼴 날 줄 알았다.” /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조지 버나드 쇼)
인생의 비극은 이렇듯 준비되지 않은 채 마지막을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또 사라질 것을 위해 생을 다 사용해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로 가치 없는 것들을 위해서 가치 있는 인생 시간을 낭비해 버리는 경우가 많고, 또 다 지나가고 말 테니 즐기며 살자는 염세적 쾌락주의를 따라 사는 비극도 있습니다.
또한 인생 자체를 뜻도 목적도 의미도 없는 부조리라고 여기는 카뮈 같은 철학자는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만들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시지프스가 돌이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돌을 올리면서 사는데, 그런 부조리에 대한 저항 자체가 삶의 의미라고 말합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배보다 큰 청새치와 사투를 하면서 잡는데, 항구로 가져오면서 상어에 의해서 다 먹히고 뼈만 남습니다. 이룬 것이 다 사라졌지만, 고기를 잡으려는 불굴의 의지 자체가 의미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의미가 없는 세상 속에서 자기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사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부르면서 부조리한 세상을 스스로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라고 합니다.
선물
그러나 전도자는 금방 사라지는 인생을 단순히 헛된 것만으로, 뜻이 없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금방 사라지는 점도 말하지만, 그 지금이 매일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도 함께 강조합니다.
산다는 것은 지금을 과거로 보내는 것이면서 지금을 계속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시간을 선물로 받을 뿐만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살 수 있는 조건들인 먹고 마시는 것도 받아 삽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도서 2:24)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도서 3:13)
삶의 조건인 시간과 함께 그 속에서 살 수 있는 물질적 조건과 여러 상황을 선물로 받아 삽니다. “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도서 5:19) 여기 ‘몫’(분복)이란 단어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갔을 때 각 지파에게 주어진 분배된 땅을 의미합니다.
시간이란 선물과 함께 그 속에서 살 분복을 주셨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선물('마타트 엘로힘')이라고 합니다. 성경적 인생관은 허무적 관점과 다른 인생을 선물로 보는 은혜의 관점입니다.
사라지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만이 있지 않고 주어지는 시간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제한 시간이 있는 선물
이렇게 인생의 시간이 선물로 주어졌는데, 그 시간은 제한 시간이 있습니다. 한강공원에 가서 자전거를 2시간 빌립니다. 그 시간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시간 안에 열심히 타고 사용해야 합니다.
“네 헛된 [헤벨]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헤벨]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도서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이란 평생이 의미도 목적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잠깐 있다 사라지는 짧은 인생”이란 의미입니다. 제한된 젊음이고 시간이라면, 그동안 내게 주어진 삶의 몫인 가정, 관계, 만남, 직장이란 지금을 잘 사용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7~80년간 제한 기한이 있는 시간을 선물로 받아 살고, 잘게 쪼개면 매일 24시간이란 선물을 받아 사는데, 시간의 길이가 정해져 있다면, 그 시간이 지금도 계속 과거로 사라져 간다면, 선물로 주어지는 지금을 더욱 소중히 붙들며 사는 것입니다.
카르페 디엠
황금, 소금, 지금, 세 가지 중에 황금이 좋다고 하지만, 황금도 지금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지금이니 그 지금을 최대한 잘 사용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끝을 향하여
지금을 잘 붙잡고 산다는 것은 지금 먹고 즐기라는 도덕적 방탕의 쾌락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사라지듯이 시간 속에서 살았던 삶의 기록도 사라진다는 무신론적 허무주의 인생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인생관은 지금이 속히 지나간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이란 선물을 지금도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허무적 관점이 아닌 은혜의 관점으로 삽니다. 또 지금이란 시간을 주신 분의 뜻을 물으면서 삽니다. 그 이유는 시간은 지나가지만, 시간 속에서 살았던 기록도 기억은 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고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삶의 끝에 심판이 있으니 영원한 것을 추구함으로
속히 지나는 지금을 붙들자는 성경적 까르페 디엠을 말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 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 11:9)
”이제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을 듣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이다.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은 그것이 악한 일이든 선한 일이든 지금은 비록 숨겨져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전도서 12:13-14, 현대어)
인생은 무엇입니까?
인생이 속히 흘러가고 사라진다는 점에서 헛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살았던 삶이 기록되고 평가된다는 점에서는 헛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두 모순적인 진술이 함께 있습니다. 인생은 헛되나 헛되지 않습니다.
인생이 헛되나 헛되지 않고,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헛되나 헛되지 않으려면, 시간이 영원히 이어져야 합니다. 시간을 사용해서 주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한강 강물이 흘러가는데 햇빛을 받으면 강 위에 보석이 깔린 듯이 반짝입니다. 수평으로 흘러가는 강물과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햇빛이 만납니다. 시간이 영원과 연결되면, 시간 속의 인생이 그렇게 빛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간 안의 존재로 살게 지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때를 따라 피고 지고 때를 따라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영원과 연결되면 그 시간이 헛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 속에 살면서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영원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젊은 시절에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늙고 병들어서 아무런 기쁨이 없다고 한탄하는 나이가 되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전도서 12:1, 현대어)
전도서가 가르치는 인생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인생은 시간의 강을 두 개의 노를 저어가면서 목적지를 향하는 배와 같습니다. 배는 시간의 강 위에서만 존재합니다. 시간을 떠나서 인생은 없습니다. 이 시간의 강 위에서 양손에 노를 저으며 갑니다.
하나의 노는 인생은 헛되다는 노,
인생은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기억하는 헤벨 하발림의 노,
죽음이 곧 온다는 것을 기억하는 메멘토 모리의 노입니다.
또 하나의 노는 인생은 헛되지 않다는 노,
시간은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알고 사는 마타트 엘로힘의 노,
그 지금을 소중히 붙들고 영원과 연결해 사는 까르페 디엠의 노입니다.
한 손에 헤벨 하발림, 한 손에 마타트 엘로힘, 한 손에 메멘토 모리 한 손에 까르페 디엠, 한 손에 인생은 헛됨을 기억하는 노, 한 손에는 인생이 헛되지 않다는 노, 그 두 노를 저으면서 하나님 앞을 향합니다. 그 끝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기만 할 수도 있고, 헛되지만 헛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생의 안경을 끼고 살아왔습니까?
인생은 모두 헛되다는 염세적 허무적 인생관 안경?
이 땅이 인생이 전부라는 물질적 인생관 안경?
즐기면서 사는 것이 최고라는 쾌락적 인생관 안경?
우리는 성경의 안경을 끼고 , 두 개의 노를 저으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면,
우리의 시간의 강물 위에 영원의 빛이 반짝이게 될 것입니다.
두려운 끝이 아닌 아름다운 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2023년 2월 26일 설교 (정현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