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 말씀훈련과 영적성장
시편 133편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변화가 필요한 세상
2023년 새해가 시작된 두 번째 주입니다.
시간에 NEW란 수식어를 붙여 새해라고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코로나 위험은 지속되고,
기후 위기는 반복되고, 전쟁은 그치지 않고,
남북관계는 악화되고, 전망은 희미해지고,
문제들은 더 많아집니다.
요즘 지속가능성이란 단어가 화두인데,
정말 이런 식으로 지속 가능한가를 묻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한데,
그 변화는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야 합니까?
우리가 보는 수많은 모든 문제의 상수는 바로 사람입니다.
문제 속에 사람이 들어 있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어 ‘사람이 문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떠나서 답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답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니,
사람은 문제이면서 또한 답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교육하자, 사람을 훈련하자고 합니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의인이 되게 하자고 합니다.
결국 문제가 사람에서 시작되었고,
답을 만드는 변화도 사람에게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범위를 좀 좁혀 보면.. 내가 겪는 여러 현실, 그 속에 문제들이 많습니다.
인간관계, 가정과 일터, 내 마음의 상태... 문제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의 원인이 다양하지만,
이 모든 문제 들마다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문제는 적어도 내가 원인이 된 것이고,
나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문제인데,
그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가 나이면서, 늘 답을 , 상대를 바꾸는 것에서 찾으려고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나를 바꾸지 않으면, 결코 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바로 나고, 답도 나입니다.
변화는 ‘내가 바뀌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변화는 결국 사람에게서 시작되어야 하고. 또한 내게서 시작해야 하는데,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이들, 소리치는 이들이 많지만,
자기를 바꾸지 않고 큰소리를 치다 보니 우 습게 되고 내로남불 소리를 듣습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가장 어려운 것이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나 한 사람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도 있지만,
평생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다가 끝나는 것 같으니,
그런 나를 내가 바꾼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변화는 사람에게서, 또 나에게서 시작해야 하는데,
그런 나의 변화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과 나의 변화는 어디서?
시편 133편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 133:1-3)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많지만, 정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런 감탄이 나오는 장면이 무엇입니까?
형제가 오손도손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
이웃이 오손도손, 정치가 오손도손, 경제의 주체들이 오손도손,
민족들이 서로 오손도손, 살아가는 것,
나아가 인간이 자연과도 오손도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이 있다고 하고, 이것을 영생, 영원히 지속가능한 삶이라고 하고,
이것이 샬롬이고 구원입니다. 이것이 삼위가 각각 자기답게 존재하면서
일체가 되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고 싶은데,
이스라엘은 12지파가 오손도손 연합하고 동거하지 못하고,
결국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우리는 한 민족이라고 하지만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지역으로 계층으로 세대로 갈라져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도 너무나 오랫동안 서로 오손도손하지 못합니다.
이런 아름답지 못한 장면 속에 항상 우리가 있고, 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는 사람에게서, 나에게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 그 우리, 그 나의 변화는 어디서 시작됩니까?
이 시를 보면 두 개의 이미지가 나옵니다.
첫째 이미지는 대제사장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그 기름이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흐르고 옷깃까지 내리는 이미지이고
둘째 이미지는 유대에서 가장 높은 헐몬 산 위에 이슬과 눈이 내립니다.
그 이슬과 눈이 낮은 산으로 계곡으로 그리고 평지까지 흘러내리는 장면입니다.
사람과 자연과의 오손도손 연합하여 동거하는 복, 샬롬, 영생은
아론의 머리에 먼저 기름이 부어지고 그 기름이 아론 자신을 적시고 변화시키고,
그 기름이 옷깃에 흘러 다른 사람을 적시고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변화는 헐몬 산 꼭대기에 내린 눈과 이슬이 산 정상을 적시고 중턱을 적시고
평야를 적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변화, 나의 변화는 변화해야 할 사람의 머리 위에,
변화해야 할 나 자신 위에 기름이 부어지고
눈과 이슬이 내리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이의 존재
이 이미지의 의미를 성경의 사람 이야기로 다시 풀어 봅시다.
사람에 관한 매우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두 극단적 관점을 제시하자면,
첫째는 사람을 영혼으로 보는 관점,
그래서 인간은 땅을 떠나 하늘로 가는 것,
몸을 떠나 영혼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불교 힌두교 헬라 철학 뉴에이지 등이 그렇습니다.
둘째는 사람을 육체로만 보는 관점,
그래서 인간은 땅에서 나서 땅으로 가는 것,
육체로 살다가 흙이 되는 것으로 보는 우리 시대의 생각입니다.
즉 인간은 하늘과 연결된 존재거나 혹은 땅과 연결된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로 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곧 일어나 섭니다. 그리고 서서 걷습니다.
서서 걷는 모습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연결선과 같습니다.
실제 사람의 영혼은 하늘과 연결되고, 육체는 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일 인간의 육체는 땅과 연결되어 숨쉬고 먹어야 삽니다.
인간의 영혼도 하늘과 연결되어야 영혼이 삽니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서게 되면서 생긴 중요한 것이 자유로운 손입니다.
이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기도하고, 땅을 향해 사용해 경작하고 도구를 만들고,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어 서로의 손을 잡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인간이란 말의 의미처럼 ‘인간 사이’에서 존재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이, 사람과의 사이,
땅과의 사이에 서있는 ‘사이의 존재’입니다.
‘사이의 존재’로 살기에 서로 사이 좋게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과도 자연과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근본적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하나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에서 사람의 머리 위에 기름 부으심이 있고,
산 꼭대기에 눈과 이슬 이 내려야 하는데,
그래야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좋은데,
사람의 머리에 부어지는 기름이 없고,
산 정상에 내리는 이슬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기름부으심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기의 유한한 자원으로 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결과 사람사이, 자연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늘에 뿌리 내린 나무
시편 1편은 복이 있는 사람을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나무에 맺히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내가 받는 여러 복들이 아니라, 내가 복이 되는 사람이 됨으로,
나, 우리를 통해 시편 133편이 말하는 사람이 서로 오손도손,
사람이 자연과 오손도손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무가 그런 열매를 맺으려면 시냇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 시냇가가 무엇입니까?
시편 1편은 “복이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말씀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릴 때 오손도손 살아가는 참 복, 그 샬롬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각 사람이 그 머리에 말씀과 성령의 기름이 부어지고,
말씀의 이슬이 내릴 때, 그 기름이 자기를 바꾸고
바뀐 자기가 주위를 변화시키면서, 오손도손이 가능해집니다.
형제가 오손도손 살려면 우리는 너가 잘해야 된다고 여기지만,
너가 잘해도 내가 못하면 오손도손의 비전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변화는 내게서 시작해야 하고, 나의 변화는 나란 나무의 뿌리가 시냇가에 내리고,
나의 머리에 성령과 말씀의 기름이 늘 부어져야 됩니다.
인간은 서 있는 존재로서 땅과만 연결되지 않고
하늘과 땅에 동시에 연결된 사이의 존재이기에
땅에 속한 것만 먹는다고 사람답게 변화되어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늘에 속한 것도 매일 먹어야 비로소 사람으로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태복음 4:4)
말씀을 받는 여기
변화는 여기서 시작되는데, 그 여기가 사람이고, 나입니다.
그 사람의 변화, 그 나의 변화는 말씀을 먹는 여기,
말씀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는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먹는 지금 여기,
말씀의 시냇가에 닿는 지금 여기를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새해 바쁜 일이 나를 몰아가려고 할수록
우리는 세상의 변화가 너에게서 시작해야 한다고 외칠수록, 매일 말씀과 연결되는 여기,
매일 말씀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소화해서 양분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말씀도 내 영혼을 살리는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라야 양식이 됩니다.
레위기를 보면 부정한 동물과 정한 동물이 나옵니다. 정한 동물은 되새김질 하는 동물입니다.
영적으로 해석하자면 말씀을 듣고 금방 잊어 버리는 사람이 아닌,
다시 기억하는 사람이 성화될 수 있고 변화가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되 그것이 양분이 되려면 기억해야 하는데 기억을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록입니다.
여행가면 그때는 좋지만 서서히 잊히는데 기억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사진입니다.
말씀도 읽음으로 끝내지 말고 양분이 되려면 하루에 석장 씩 읽을 때
분명히 마음에 다가오는 한 구절은 있습니다. 그 한 말씀을 기록하십시오.
그러면 일년에 365구절이 생깁니다.
그것이 소화된 말씀, 양분이 된 말씀, 나를 성장시키는 말씀이 됩니다.
말씀 일기를 쓰는 것이 말씀을 먹는 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말씀을 들을 때 응답하며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까지도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이 별로 없어서 랍비가 읽어주면 성도들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냥 듣지 않고 구절마다 아멘으로 응답하면서 들었습니다.
아멘으로 응답하면, 그 아멘이 들린 구절을 내 속에 깊이 넣어 양분이 되게 합니다.
들은 말씀을 머리로만 생각하고 고개만 끄떡이면 대부분 마음까지 닿지 않고
실행으로 나가게 하는 힘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응답하면서 듣는 훈련을 합시다. 들을 때 아멘으로 응답하십시오.
말씀을 나누는 여기
나의 변화는 내가 말씀을 받는 그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내 머리에 부어진 기름, 내 마음의 산에 내린 이슬은 내게 주어진 것이고,
그것이 나를 바꿉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그 말씀이 나를 바꾸면 바뀌어진 내가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바꿉니다.
개인의 변화는 반드시 그 한 사람의 변화로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변화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느낀 것, 본 것을 SNS에 올리면, 그것이 본 사람들에게 확산되고,
그들이 또 공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변화는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시작하지만 말씀을 나누는 자리에서 더 확장됩니다.
피차 가르침
그래서 내가 말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로새서 3:16)
먼저 기름이 자기 머리에 부어지고 이슬이 헐몬 산에 내리듯,
그리스도의 말씀이 먼저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고, 그 다음 자기가 받은 말씀을 피차 나눕니다.
그러면 서로를 가르칩니다.
한 사람에게 임한 말씀의 기름이 옷깃을 적시고 이슬이 평원을 적시듯,
성도들 공동체에 임하여, 모두의 입에서 찬송과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모두가 시인이 됩니다. 한 사람이 부른 독창이 중창이 되고 합창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가 서로 연합하고 동거하는 시편 133편의 영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은 그 개인에게도 주어진 말씀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서로가 받은 말씀을 가지고 만나면 ,
마치 뷔페처럼 다양한 음식을 먹고 영양가를 골고루 취하듯,
모두가 영적으로 자라고 성장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의 변화가 말씀을 듣는 여기서 시작하고,
그 변화는 말씀을 나누는 여기서 배가가 되고 더 확산됩니다.
교회는 말씀을 전하고 배우는 곳이기에
대제사장 아론처럼 교회에 세우신 말씀의 사역자를 통해서 말씀을 듣지만,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 말씀을 함께 나눔으로 함께 성장하는 곳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장애인 아담을 돌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장애인 아담이 나우웬의 최고의 스승이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가난한 아이들이
한국에서 진짜 성공했다는 김혜자 씨에게 인생을 가르치는 진짜 스승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우고 서로를 가르칩니다.
구역교회는 그런 점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말씀이란 기름을 서로 나눔으로
함께 성장하는 필수적인 현장이고 학교입니다.
서로 받은 말씀을 나누고 서로 말씀 읽는 것을 상호체크하면서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변화는 언제나 내가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상호 나누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지시하고 호통치면, 자기도 가정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먼저 받은 은혜를 자기에게 적용하고, 그것을 나누면,
자기도 바뀌고 가정은 자연스럽게 바뀝니다.
너는 이래, 그렇게 말하지 않고 나는 이랬어,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바꾸는 나의 변화는 공동체의 변화를 자연스레 가져오는 것입니다. .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은혜 받고 일함으로 서로가 서로를 성숙시켜 가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함께 봉사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주로 봉사하는 마르다가 됩니다.
마르다처럼 열심히 일하다가 마르다처럼 불평으로 끝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말씀을 받고 나누는 마리아가 되고 마르다처럼 일을 한다면,
일도 잘 되고 일을 통해 성장도 있습니다.
교회에 회들이 많습니다. 당회, 제직회, 위원회, 권사회, 여전도회가 주로 일로서 만나고 회의합니다.
언제나 일로 만나고 일로 헤어집니다. 그러면 불평이 생기기 쉽고 성숙은 없습니다.
그먼저 마리아가 되고 마르다가 되면, 마르다처럼 일도 되고 마리아처럼 내적 성숙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보다 은혜를 먼저 붇들려고 해야 하고,
회의보다 말씀을 먼저 붙잡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과 함께 성장이란 열매를 봐야 합니다.
회사는 좋은 제품, 명품을 만들어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없으면 사실상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킵니까?
명품이 아닌 명인, 좋은 제품이 아닌 좋은 사람, 복을 받는 사람만이 아닌
복이 되는 사람을 만들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벌과 나비를 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향기나는 꽃이 되고 꿀을 가진 꽃이 되는 것입니다.
섬김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섬기는 사람의 매력적인 변화를 통해서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더 많이 활동하고 더 바쁜 일을 따라 산다고 되지 않습니다.
자기를 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을 꾸준히 투자함으로만,
남을 바꾸려는 노력 이전에 자기를 바꾸는 시간을 계속 가질때 가능합니다.
외적으로 직위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지만 내적으로는 아이와 같은 이들,
외적으로는 풍부하지만 내적으로는 빈곤한 이들이 있다면,
교회는 영적으로 내적으로 성장하여, 복이 되는 사람, 선물이 됩시다.
매일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영적 학교요,
교회가 매일 나무들이 쑥쑥 자라는 향기로운 숲이요,
교회가 마음과 육신이 아픈 이들이 회복되는 영적 병원이 됩니다.
변화가 반드시 필요한 세상에서, 그 변화는 누구에게서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합니까?
사람에게서 저 사람이 아닌 이 사람, 나에게서,
그리고 말씀을 읽는 이 자리, 나누는 이 자리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여기를 붙들어 삶으로, 나의 변화가 우리의 변화를,
우리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합시다.
주님, 변화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외치기 전에 우리가 변화되도록,
너의 변화를 말하기 전에 내가 바뀌도록 매일 말씀의 시냇가에 있게 하시고,
말씀의 기름부으심을 얻게 하소서.
변화가 조용히 내 안에서부터 매일 말씀을 통해 일어나게 하소서.
2023년 1월8일 설교 (정현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