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예수님...새롭게 만나는 예수그리스도(6)
마 4:1~11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 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 드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 후 나사렛에서 자라나시고,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버지의 뜻을 행할 사명을 가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을 듣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메시아의 길을 가십니다.
하나님은 메시아의 사명을 행하실 예수님에게 그 사명을 행할 권세와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마치 대통령직이란 사명을 맡기면 그것을 이룰 권세를 주는 것과 같아서,
돌로 빵도 만들 수 있는,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는, 온 천하를 굴복시킬 수도 있는 그런 능력과 권세가 있었는데,
그 능력과 권세를 어떻게 사용함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의 사명인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일까요?
광야의 유혹
주어진 권세를 잘 사용하여 사명을 이룬다는 것은,
사명 자체가 변질되거나 능력과 권세가 남용 오용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아담은 하나님을 드러낼 사명을 받았고, 그 사명을 감당할 권세인 통치권을 가졌지만,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 사명도 이루지 못하고 권세도 잘못 사용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에덴에서 유혹을 받았던 아담을 따라 시험에 넘어지는 역사를 써왔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들도 40년간 광야의 시험에서 넘어졌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40일 동안에 금송아지를 만듦으로 실족했습니다.
대통령은 막중한 사명의 자리이면서 막강한 권세의 자리인데,
역사 속에서 권세를 사용해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 사람을 보기 힘듭니다.
이처럼 대부분 사람들이 시험에 넘어집니다.
사람들이 겪는 다양한 시험들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은 빵, 성전, 산으로 상징되는 세 가지 시험들에 포함됩니다.
그것은 각각 경제, 종교, 정치 속에 있는 유혹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시험을 받으시면서 이러한 아담의 후손들 중의 하나가 되심으로
시험에 넘어진 인류를 자신의 몸에 껴안으시고 시험에 넘어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둘째 아담의 길을 가십니다.
주님은 어떻게 그 시험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을 이루시는 것일까요?
돌로 빵을 만들라
마귀는 광야에서 40일을 굶주리신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마태 4:3)
40일을 굶주려 몹시 주린 예수님에게, 가진 능력을 사용해서 개인의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이 말은
매우 배려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배고픔을 겪고 있는 무리들을
빵을 통해서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라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광야에서 겪는 배고픔은 유대 백성들은 상시 겪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배고픔을 광야에서 절실하게 체험한 주님에게 빵은 문제 해결의 길이라고 생각할 법합니다.
빵을 돌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며, 당장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실 때 그들이 예수님을 강제로 왕으로 삼으려 했는데,
이는 대부분 빵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를 따르고 그것을 참 구원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오직 경제만 살린다면 대부분 그에게 표를 던질 것입니다.
그만큼 빵을 배불리 먹는 것은 모두 소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그것이 곧 구원입니까?
그랬다면 주님은 기꺼이 돌들을 가지고 빵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살아야
주님은 돌로 빵을 만들지 않으시고 도리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태 4:4, 신명기 8:3)
이 말씀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지냈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만나를 먹으면서 지냈던 그들은 만나가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며 다음 날까지 쌓아두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과, 만나는 축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메시지)를 함께 먹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빵만이 아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함께 먹는 자, 즉 말씀을 함께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배만 부르면 , 공산당이나 정부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 ,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소크라테스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식탁 위에 빵을 먹으면서
이 빵은 하나님이 비와 빛을 통해서 내게 주신 것임을 믿고 감사하고, 빵과,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먹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빵을 먹으면서, 빵을 먹어야 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자기 빵을 나눔으로
빵과 함께 그 속에 담긴 사랑을 함께 먹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식탁에서 드리는 기도가 이런 의미입니다.
이처럼 빵과 함께 말씀을 먹어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아는 사람이, 곧 빵이란 물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가 가져오려는 구원의 모습입니다.
오병이어로 빵을 만듬
그래서 주님은 돌로 빵을 만들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빵을 만드십니다.
광야에 오천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이 모였을 때 주님은 광야에 지천으로 깔린 돌들로 빵을 만들 수 있었지만,
대신에 한 소년이 내어 놓은 오병이어로 빵을 만드십니다.
왜 오병이어로 오천 명 식사를 만드셨을까요?
무리들이 한 소년이 내어 놓은 자기 식사를 가지고 만들어진 빵을 먹을 때, 그 빵 속에 담긴 감동을 함께 먹었을 겁니다.
빵으로 배만 부르지 않고 사랑으로 마음까지 배불렀고, 빵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했을 겁니다.
이렇게 그들은 빵과 함께 말씀을 먹었고, 그러면서 그들은 육체적 생명만이 아닌 영혼의 생명이 살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빵은 물질이지만 물질 그 이상, 은혜와 사랑이 담긴 거룩한 빵과 거룩한 물질이 됩니다.
그런 빵을 먹는 자는 빵을 먹고 빵을 먹이는 사람, 물질에 지배당하지 않고 물질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그 빵은 사회적 영적 부가가치인 관계, 공동체, 인격을 만들어 내기에, 주님은 오병이어로 빵을 만들어 먹게 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주님은
유월절 만찬에서 자기의 몸을 거룩한 빵으로 만드시고 자신의 몸을 우리를 살리는 빵으로 주십니다.
그 속에 주님 자신이 담기게 되고, 그 빵은 영혼을 살리는 거룩한 빵이 됩니다.
세상은 돌로 빵으로 만드는 기술, 더 많은 수량을 만드는 효율을 강조하지만,
말씀이 담기지 않으면 그 빵은 배는 부르게 할지 모르지만 사람이 되게 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함께 먹어야 인격과 성품이 자라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이러한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바르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구함
이어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태 4:6)
당시 성전은 정신적 바탕이었던 유대교의 중심이었고, 성전을 관할하는 제사장들은 실세였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권위는 당시 위용이 있는 성전 건물에 의해서 더 강화되었습니다.
헤롯이 증축한 성전의 크기와 화려함에 사람들은 감탄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며, 얼마나 대단한 건물들입니까?(마가 13:1)라고 놀라워했습니다.
그 안에서 매일 약 1만 8천 명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반열"이라 불리는 24개 조로 나뉘어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니,
모두들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기적을 베푸셨다면 다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인정했을 것이고
당시의 종교 세력도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전에서 행하는 기적은 얼마나 메시아 사명을 위한 얼마나 손쉬운 길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구하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신 것은
기적을 구하는 사람이 메시아가 이루려는 구원받은 사람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아니고 참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 기적을 베풀면 환호하며 하나님을 더 숭배하게 되었겠지만, 아마 계속 또 다른 기적을 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주요 관심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기적이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순종이 아닌 것에 두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기적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매우 자기중심적입니다. 이런 신앙은 겉으로 매우 열광적이고 종교적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실 이렇게 기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시험이라고 지적합니다.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하여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눅4:12)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을 시험한 내용으로,
약속의 땅을 가기 위해 맛사 혹은 므리바란 장소를 거쳐갔던 그들은 목이 말라,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의도마저 의심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쳐 물을 내라고 명하셨고, 물이 나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적을 구한 이들을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테스트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 출 17:7).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이 자신의 요구에 맞춰주느냐에 따라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
하나님 자격시험을 치르는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10가지 기적들, 홍해 도하의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기적들을 경험했다면 이제 그분을 신뢰해야 하지만,
여전히 원대로 기적을 보이지 않자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모습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하나님을 사용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순종을 요구하는 신이 아닌 우리의 말을 들어주는 길들여진 사자와 같은 신을 바랐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요 무속입니다.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는 메시아가 가져올 구원이 아니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
대신에 성전 안에 들어가 장사판을 엎으시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시면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십니다.
자기중심적 기적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 중심적 순종을 먼저 구하게 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자신이 되는 것을 구하게 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림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인정을 받았을 수 있었지만,
성전에서 일으킨 소요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오해를 받고 죽음의 위협에 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능력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사용하십니다.
자기를 위해 기적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 자아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구하는 참 신앙의 사람이 되게 만드십니다.
그런 구원의 사명을 위해서 주님은 권세와 능력을 사용하시는 메시아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상대를 이기는 세상 권세
이어 사탄은 높은 산에서 천하를 보여주면서 내게 절하면 이 천하를 다 주겠다고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 4:9)
온 세상을 통치하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길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사용하는 거짓과 무력이고, 그 방식을 로마가 지금 사용하고 있고,
로마와 싸우려는 열심당원들도 이런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들의 힘이 로마보다 약하지만,
그 반대가 되면 그들이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또 다른 로마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그런 구원을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주려는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가 로마가 사용하는 그런 방식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의 주체가 로마에서 유대로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정권이 바뀐 것이지 권력을 사용하는 방식인 정치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하늘의 열두 군단의 천사를 불러서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그 힘을 로마를 이기는 데 사용하지 않으시고, 로마의 지배 방식을 이기는데 사용하십니다.
로마와 유대 속의 악, 그들과 우리 속에 있는 죄와 싸우십니다.
그것이 정말 처리해야 할 진짜 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악을 이기는 참 권세
그 죄와 악을 이기기 위해서 주님은 거짓과 폭력과는 전혀 다른 , 선과 사랑과 희생이란 무기를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악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로마와 유대 속에 있는 악의 추한 정체를 드러내시고,
십자가의 선으로 악을 이기심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참 권세를 얻으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산에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마태 28:18-19)
마귀는 자기에게 절하면 가장 쉽게 권세를 얻는다고 했지만,
주님은 마귀와 싸우고 그 방법을 배척함으로 얻은 참 권세를 얻으신 것입니다.
그 힘은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아닌 회복시키는 힘이고,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아닌 섬겨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되게 하여 복의 통로가 되고, 이방의 빛이 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참된 힘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의 힘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바르게 사용하는 하나님의 형상들이 되게 하는 구원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빵과 성전과 산, 즉 경제, 종교, 정치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삶의 필수 영역인데 이 속에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빵만으로 배부른 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고,
신의 기적만 구하는 것을 종교라고 하고, 남 위에 올라서는 것을 승리라고 말하면서
목표가 비뚤어지는 시험을 받으면서 삽니다.
이런 비뚤어진 모습 뒤에 시대의 우리가 숭배하는 세 가지 시대의 우상이 있습니다.
빵 뒤에 물질의 신 맘몬이 있고, 성전 뒤에 쾌락의 신 아프로디테가 있고,
산 뒤에 전쟁의 신 마르스가 있습니다.
또 그릇된 목표를 그릇된 방식을 달성하려는 시험을 받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매일 빵을 먹을 때 빵의 의미를 함께 먹고,
물질을 사용할 때 그 청지기적 목적을 기억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기적보다 순종을 먼저 구하는 참 신앙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섬김과 사랑의 힘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2022년 3월 6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