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교는 누구도 멈출 수 없다 ( 계시록 9)
요한계시록11:1~13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동안 짓 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 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다시 예언하라
요한계시록을 정교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7가지 인 심판, 나팔 심판, 대접 심판이 있는데,
인 심판 끝날 때 막간 장면, 나팔 심판이 끝날 때 막간 장면이 나옵니다.
주일에 본 것처럼 심판의 나팔소리가 불면서 세상에 심판이 임하는데,
여섯 나팔이 불고 난 후에 한 장면이 소개됩니다.
그것은 한 천사의 사자와 우레와 같은 큰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일어나는 심판을 겪습니다.
역사 속에 죄의 결과로 일어나는 그 사건의 의미를 바로 알려면
천사의 손에 들린 책을 통해서 압니다.
그것이 말씀이고 계시인데 그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보면서도 그저 물질만 보고
역사란 책을 보지만 일어난 왕들, 사건들만 보지, 이것이 무슨 깊은 원인으로 생겨나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이것을 바로 알려면 천사의 손에 들린 열린 책 속의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점에서 태양 빛입니다. 그것들을 제대로 보게 해주는 빛입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그 책을 받아 전하라고 합니다.
받아서 전하려고 하니까, 그것을 전하려면 그것을 자신이 먹어야 된다고 합니다.
즉 자신이 먼저 이해하고, 전해야 하는데,
그 전달 받는 사람의 상황에 맞게 그들의 언어로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들리도록 전하려면 그것을 번역해야 하고, 설명해야 하는 수고가 듭니다.
그런데 들으려고 하면 좋지만, 자기의 패러다임과 틀리기 때문에 오해하고 심지어 죽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할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도
유대인들이 가진 하나님 나라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보이는데,
그것을 고치지 않고, 결국 자기들이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고 하고서 예수님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을 아는 사람은 깨닫는 것이 너무 달콤해서 단 맛이지만,
그것을 전하고 이해시키려면,잘못된 생각을 가진 이들과 충돌하고
그들에 의해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는 그런 쓴 맛을 경험해야 합니다.
진영이 나눠져 있다는 것은 서로 동일한 사건을 보는 안경이 다릅니다.
그 안경을 벗어냐 제대로 보이는데 그것을 벗기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는 진리를 전하지만 쓴 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말씀을 알리는 것을 포기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말씀이란 태양 빛이 없으면 결국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언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하고, 안경을 바꾸게 하고,
사물을 보는 창문도 고치게 하고, 그래서 그 바른 안경과 창문이란 말씀을 통해서
역사는 우리에게 죄로부터 돌이키라는 나팔 소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심판이 유예되고 있다는 것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은총임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길을 바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알도록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 전파의 사역이 죄의 결과가 누적되는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성전 밖에 있을 고난
요한에게 다시 전하고 다시 예언하라고 하시던 분이 그에게 갈대로 된 자를 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지팡이 같은 갈대는 측량자입니다.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를 측량하라고 합니다.
길이를 측정한다, 숫자를 센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전 밖의 뜰은 측량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성전 밖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맘대로 살려고 하는 세상은 그대로 두라는 것입니다.
지금 성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단 맛을 알고 말씀을 통해서 세상과 삶의 목적을 바르게 봅니다.
그 말씀을 믿고 은혜를 받습니다.
성전 밖에 있다는 것은,
이제 말씀을 전해야 할 전도의 현장인 세상이 죄와 심판으로 쓴 맛의 세상이어서
박해와 핍박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영혼을 인도할 때 겪는 큰 고통을 말하기도 합니다.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단 맛으로 경험한 말씀을 그들에게 심어주려면 쓴 맛을 많이 맛봐야 합니다.
고난의 제한된 기간
당시 초대교회는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쓴 맛과 고난이 있는데 그것이 누구에게서 옵니까?
본문에는 이방인들이 성전 밖을 짓밟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들은 당시 핍박하는 로마인데 정치적으로 위험하여 로마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이때 유대인에게 가장 악랄한, 이방인 핍박자는 안티오쿠스 4세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면서 가장 잔인하게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가 통치했던 기간이 B.C 167~164년까지의 3년 반인데
그 3년 반이 42달입니다. 42달이란 가장 참혹했던 그 당시입니다.
그런데 또 42달은 엘리야가 사역할 당시, 하나님의 진노로 3년 반 지면에 비가 내리지 않았던 기간입니다.(왕상 17:1)
42달, 즉 3년 반은 완전수 7의 반입니다. 7이 영원한 기간이라면 3.5는 유한한 시간입니다.
42달은 핍박의 기간이지만, 그 시기는 ‘제한된 환난의 시기’임을 알려줍니다.
그 시기는 바울의 말씀을 빌리자면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고후 4:17).
또 42달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내는 고난의 때입니다.
그들은 마흔두 번 진을 쳤고, 광야생활하였던 해가 마흔두 해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흔두 달이 고난의 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가 당하는 박해와 고통의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증인
이처럼 초림과 재림 사이에 하나님의 영적 보호도 있지만, 세상에는 고난과 박해가 있습니다.
말씀을 먹을 때의 단 맛도 있고,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의 쓴 맛도 있습니다.
그런 두 경험을 같이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기간 동안,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사이에 우리는 성전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은혜 베푸심,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의 태양 빛으로 세상을 바르게 보고
영적으로 자라는 성숙의 기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우리는 성전 밖,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즉 말씀을 전하며 선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 11:3)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줍니다. 증거의 핵심은 참이어야 하는데
율법에 두 명이 같이 말할 때만 참으로 인정되므로 두 증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베웃의 의미는 회개를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회개를 촉구했고,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했고,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라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증거의 기간이 1260일로
이 기간은 42달이고, 3년 반과 동일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기간과 고난의 기간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과 심판이 있지만 이 때는 복음을 전할 때이고
또 복음을 전할 때에는 고난과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심판과 고난의 기간도 제한되어 있듯이, 복음을 전하는 기간도 제한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예배와 기도를 힘써야 하고, 동시에 복음 증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이렇게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셨는데
그 두 증인이 누구입니까? 그것을 좀더 자세히 보게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요, 촛대 두 개입니다.”(계 11:4)
두 증인이 감람나무와 촛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감람나무입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 나무로 등불을 켤 때도 사용하지만
올리브 열매의 기름은 왕, 제사장, 선지자들에게 기름 붓는데 사용합니다.
그들이 감람나무란 것은, 그들에게 기름 부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왕, 제사장, 선지자들에게 기름부음이 있듯이,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성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스가랴서에도 보면 성전 재건을 위해 바벨론에서 돌아온 두 사람을 감람나무라고 합니다.
그들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슥 4:14).
이처럼 감람나무는 구약의 세 직분인 왕, 제사장, 선지자처럼, 이 땅에 하나님의 임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증인의 다른 모습은 촛대로
촛대의 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관을 타고 촛대에 전달되어야 하는데
감람나무 기름이 그들에게 흘러가면, 그들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촛대가 됩니다.
두 증인은 기름부음을 받아 세상에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두 촛대가 구약과 신약의 교회요, 택한 받은 백성입니다.
이처럼 두 증인이 감람나무와 촛대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기름 부으심을 받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촛대가 됩니다.
그래서 이 두 상징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택한 백성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일컫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기름 부음을 받은 백성들이고, 제사장은 세상 속에서 촛대의 역할을 하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택함을 받은 교회의 사명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공급받는 것으로
그것이 예배와 기도와 성령충만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가지고 세상 속에 복음을 증거하는 촛대가 되는 선교입니다.
구약의 교회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 선지자, 제사장들이 그 사명을 감당했다면,
신약의 교회도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증인인 촛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지 않으면 촛대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 일에서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성령님을 구하는 기름부음 받음과 그 힘으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쓰고 선교비를 보내도 기도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없으면
구제복지는 되지만, 영혼구원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참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를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기름부으심을 구하는 기도를 그만큼 해야 합니다.
외부에 돈을 많이 보내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돈으로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그만큼 더 기도하고 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불
이렇게 감람나무와 촛대의 측면을 가진 두 증인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마귀는 그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합니다.
마귀가 교회를 해하는 방식은 늘 두 가지로, 하나는 핍박이고 하나는 유혹입니다.
마귀는 중국과 북한의 교회의 경우는 핍박, 우리시대 교회는 핍박이 없는 유혹으로 해하려고 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핍박과 유혹이란 두 방식으로 증인의 역할을 방해합니다.
핍박이 안되면 유혹을 통해 타락시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사탕 발림의 번영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 교회가 세상에서 참 증인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역사 속에 늘 그렇게 증인을 해치려는 마귀의 작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럴 때마다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원수를 삼켜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입에서 불이 나온다는 것은 거짓을 이기는 참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로 마귀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주님에게 돌아오는 이들이 생기게 함으로 원수를 이깁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계 11:5)
로마 제국이 핍박으로 증언을 막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순교를 통해 진리의 복음을 증언했고 많은 이들이 회심하여 마침내 로마의 종교가 됩니다.
그런데 다시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힘을 가진 교회를 유혹하고 타락시킴으로 증언을 막습니다.
그럴 때 순결한 종들이 일어났고, 또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나서 다시 교회를 갱신합니다.
이것이 두 증인의 입에서 진리의 불이 나와서 거짓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두 증인, 엘리야와 모세
그런데 이 두 증인은 구약의 엘리야와 모세를 닮았습니다.
구약의 엘리야는 당시 바알 선지자와 대결하여 말씀의 증인이 되었고
구약의 모세는 애굽의 바로 왕과 대결하여 말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계 11:6)
이 구절은 비가 오지 않게 한 엘리야, 나일강물을 피로 변하게 한 모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각 시대 속에 엘리야처럼 모세처럼 증언을 하는 증인이 있는데,
그들은 사탄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하여 순교자가 생기기도 합니다.
또 진리가 거짓에 의해서 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여 어둠이 빛을 이기는 것 같은 암울한 순간도 생겨납니다.
그들은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에 죽은 시체처럼 던져지고
그러자, 세상은 너무나 좋아합니다.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계 11:10).
그들이 이긴 것 같지만, 사흘 반 동안 무덤에 있다가 생기가 들어가서 발로 일어납니다.
그들을 향한 하늘의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하고 구름을 타고 올라갑니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12)
참된 증인이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암시합니다.
이들이 핍박을 받아서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통치자의 의미입니다. 그들이 죽은 것 같지만, 그들이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의 허다한 승리한 증인들이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선교는 멈출 수 없다
두 증인들이 죽었지만 다시 살아납니다.
시대마다 증언하는 교회를 향한 핍박과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 같지만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납니다.
핍박이 있지만 다시 살고, 유혹으로 타락했지만 진리의 종들이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교를 결코 멈추시지 않습니다.
드디어 이 땅의 증인들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참 진리를 말한 승리자임을 하나님이 증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먼저 세상이 죄의 심판을 받게 되었고,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바로 그 때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그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졌는데, 그 지진으로 사람이 칠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두려움에 싸여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계 11:13)
큰 지진으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져 칠천 명이 죽은 것이요,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심판의 기간과 복음 전도의 기간은 동일합니다.
이 시간 중에 복음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사탄의 방해가 있지만, 하나님은 구원 받게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사명
이제 코로나 이후 시대이지만, 그래서 선교가 너무 힘들지만,
그러나 교회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은 바로 증거의 사명입니다.
빛을 발하는 사명입니다. 선교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빛을 밝히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교를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교를 막는 세력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악한 힘 중에는 핍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혹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것은 어떤 쪽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변질시킴으로 복음이 참 증언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도 있으니 깨야 합니다.
둘째는 증인이 되려면 두루마리 책의 내용을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감람나무가 되어야 촛대가 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땅 끝까지 증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위해서는, 활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을 구하는 기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교가 중요하기 때문에 더욱 기도를 통해 성령을 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2021년 12월15일 수요예배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