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실상은 다르다..요한계시록(4)
요한계시록 4:1~6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5:1~14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인을 떼 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영이더라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히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지상의 교회 모습 >
1세기 당시,
로마는 중요 도시마다 거대한 신전들을 세워 여러 신들을 숭배하고 황제조차 신으로 숭배했는데
매일 엄청난 규모와 화려한 예복을 입은 사제들과 로마의 요직에 있는 이들이 참석하여
국가적 행사로 제사를 진행했기에 , 실제 모든 권력이 로마의 보좌에서 흘러나와서
로마의 황실이 온 세상의 중심인 것 같았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도 작은 교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라는 분을 신으로 예배했습니다.
그 예수는 로마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던 존재였고
그리고 모여 드리는 예배란 것이 고작 소수가 모여서 찬송을 몇 곡 부르고,
성경 몇 줄 읽고 기도하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기에
누가 봐도 ,신전 제사나 황제 숭배와 교회의 예배는, 전혀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규모나 모습, 참여인원에서 부터 초라하기 그지없는, 존재감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신이 있다면, 거대한 제사와 화려한 제복을 입은 로마의 신전 제사에 가 있었을 것 같고,
소수가 모이는 그곳에 신이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 실상 교회의 작은 모임 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요한이 본 첫째 환상이 바로 그 작은 교회란 공동체가 세상의 촛대이며,
그 속에 인자 같은 이가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보이는 현실과 다른 참 현실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환상을 통해서 참 현실을 보았기 때문에, 믿음을 지켜 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현실 그 너머의 참 현실을 말씀을 통해 보고 붙드는 것입니다.
지상의 예배와 천상의 예배
이렇게 요한이 밧모섬에서 먼저 본 환상은, 교회가 세상 속의 촛대이며
그 교회 가운데 인자 같은 이, 즉 부활 승천하여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신 그리스도가
그 촛대들 사이에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둘째 환상을 보니까 하늘로 들어가는 열린 문이 있고 그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계 4:1).
계시록은 “마땅히 속히 될 일”을 계시하는 내용입니다.
그 일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일어날 일인데
그 내용이 6장부터 16장까지 나오는 구원과 심판의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을 보여주기 전에 먼저 하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의 모습을 보게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세상은 세상의 일들이 로마 황실의 보좌를 통해서 일어난다고 여기거나,
그들이 믿는 신들을 통해 일어난다고 믿거나,
요즘처럼 정치와 경제의 권력자들이 일어나는 일들을 만드는 중심이라고 믿는데,
사실은 마땅히 일어날 일들은 ,
그들에 의한 것이나 우연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중심이 어디에 있으며 누가 예배를 받는 대상인지를 바로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열린 하늘 문으로 들어가서 하늘 보좌를 봅니다.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계 4:2)
요한이 밧모섬에서 예배를 드릴 때도, 소아시아 7 교회들이 지상에서 예배를 드릴 때도,
예배는 드렸지만 예배를 받으시는 분을 보지는 못합니다.
그 교회들의 모임과 예배의 내용이 2장과 3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4장과 5장에서는
천상에서 드리는 예배의 장면과 그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보게 해 줍니다.
이것을 통해 지상에서 예배하는 교회는 핍박을 받기도 하고 아주 소박한 모임으로 보이지만,
사실 참 예배를 받아야 할 분을 경배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요한이 본 보좌에 계신 분의 모양입니다.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 4:2-3)
보좌에 앉으신 분의 모습이 벽옥과 홍보석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석으로 치장했다는 말이 아닌, 하나님의 모습에서 빛이 비췬다는 뜻입니다.
빛이 비취는데 단순히 환한 빛이 아니라, 빛 속의 색들이 아름답게 뿜어 나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메랄드 빛 무지개가 그 보좌를 둘렀습니다.
빛이 무색인 것 같지만 프리즘을 통과하면 그 빛 속에 무한한 색깔들이 담겨 있고,
무지개는 7개의 색깔이 아니라 무한한 색깔입니다.
보석은 그 빛을 자기 안에 모아 들였다가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을 눈부시게 드러냅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에게서 비취는 빛은 그냥 환히 밝히는 무색의 빛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 안에 빛을 담아서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게 만드는 빛입니다.
즉 모든 생명을 그 생명으로 살게 하는 창조의 빛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해와 같은 발광체가 있기 전의 그 빛이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요?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서 비췬 빛입니다.
그 빛이 있기 전에 우주의 상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빛이 비취면서 혼돈과 흑암의 바다가 사라지고 모든 존재들이 생겨납니다.
빛은 모든 존재들을 그들 만의 색깔로 존재하도록 한 것입니다.
다양한 색깔을 가진 생명체들이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땅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서 빛이 비취는데, 그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창 4:6)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빛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 그 보좌 앞에 혼돈과 암흑의 바다가 물러가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요한이 본 보좌에 앉으신 이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세상의 거창하고 화려한 제의들은 황제란 피조물과 거짓 우상들을 예배하고 있지만,
이 세상은 물질과 인간을 숭배하고 있지만,
일곱 교회가 지상에서 드리는 예배는,
겉으로는 소박해 보이지만 실상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십사 장로
더 자세히 보니 그 보좌 주위에 24 보좌가 둘러 있고
그 보좌에 24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앉아서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습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계 4:4)
여기서 24장로란,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제자를 상징하는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둘러서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귀족들이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무수한 무리들이 우상을 중심으로,
세상 사람들이 정치권력과 물질과 자아를 중심으로 그것들을 예배하는,
지상의 숭배들과 대조가 됩니다.
이렇게 보좌를 중심으로 모여있는 이십사 장로들도 다 보좌에 앉아 있고 금관을 쓰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동시에 그 하나님의 통치 권한을 받아 그들도 다스리는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네 생물
보좌 주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둘러 있는데 그 이십사 장로 주위로 네 생물들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이렇습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계 4:7)
24 장로가 신구약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듯,
네 종류의 생물은 세상의 다양한 피조물들의 대표입니다.
위엄 있는 존재들, 힘센 존재들, 지혜로운 존재들, 민첩한 존재들과 생명들이
보좌 주위에서 서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계 4:8).
우리는 생명체를 우연히 존재하는 물질로만 봅니다.
하지만 새들, 개미들, 벌들 꽃들, 열매들, 하나 같이 기묘하고 신기한 그 모든 생명체들은
그들의 언어와 방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 예수님, 사도 바울, 성 프란시스와 같이 영안이 열린 분들은
그 찬양과 자연의 탄식을 들었지만,
대부분 인간들은 전혀 그것을 듣는 귀도 보는 눈도 없습니다.
새소리를 들어도 꽃을 보고 향기를 맡아도 그저 물질 작용일 뿐이지
그 이상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영적 장애인입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들은 밤낮 쉬지 않고, 그들의 존재를 통해서 본능적으로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는데,
오직 타락한 인간만이 가짜 신을 숭배하고 창조주를 모르고 삽니다.
네 생물들이 그들의 방식과 언어로 예배를 드리자,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이십사 장로들은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그 찬양의 내용이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 그리고 만물이 주의 뜻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으로,
즉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도 창조주를 알고 찬송하고,
더 지성적인 피조물인 인간은 더욱더 창조를 보면서 창조주를 더 예배해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황제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물질과 자기를 숭배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만드신 모든 것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창조주 하나님을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예배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수많은 것들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지상의 예배는 우리의 눈을 열어서
우리가 봐야 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계속 보고 예배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구원주 어린양
열린 하늘 문으로 요한이 보좌에 앉으신 이를 봤는데, 자세히 보니 그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로 된 책이 있었고
그 책은 일곱 인으로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봉인을 떼어야 그 두루마리를 펼치는데 이 말은 봉인을 떼어야 그 속의 내용을 알 수 있고,
또 그 속에 기록된 내용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그 책에 기록된 내용은
세상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방법, 즉 세상 회복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알아야 하고 이루어야 하는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가 봉인을 뗄 자격을 가진 자입니다.
문제는 그 책 속의 내용을 제대로 아는 존재도
그것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역사 속에 이루어내는 존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두루마리 책은 있는데 그 책의 봉인을 뗄 인물이 없는 것 같아서 크게 웁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계 5:4)
지금 우리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고,
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루어 낼 사람을 찾아봐도 없으니,
온 국민들이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한심스러워서 다들 울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런데 장로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울지 말라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5).
유대 지파 후손 중의 사자 같은 위대한 인물이 그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해
요한은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돌려 누군가 하고 봤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자가 아닌 어린양이었고, 게다가 죽임당했던 흔적을 가진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그 죽임 당한 흔적을 가진 어린 양이 보좌에 나아가 두루마리를 받습니다.
그러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리는데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그 어린양 앞에엎드립니다.
거문고는 땅에서 드린 예배요, 향이 담긴 대접은 땅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엎드렸다는 것은, 땅에서 구원을 소망하며 예배하고 기도했던 것을
어린양이 이루어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어린 양이 두루마리 책 속의 내용을 역사 속에서 펼쳐 가심으로
그 기도의 응답과 구원의 소망을 이루어가실 것이라고 믿고 경배한 것입니다.
그 어린 양이 두루마리 책 내용을 역사 속에서 펼침으로
하나님 나라가 오고 구원이 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자, 창조주를 향하여 찬양과 노래를 하다가
타락한 세상을 보면서 그 찬양을 그쳤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다시 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어린양의 통치
그렇다면 그 어린양이 어떻게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이루어가십니까?
5장 9-10절입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두루마리 책의 내용인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가십니다.
첫째
어린 양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방법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자가 자신을 십자가에 죽음으로,
그 흘린 피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된 이들을 대신해서 피를 흘림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흘린 피를 통해 출애굽이 일어난 것처럼,
자기가 피를 흘림으로,
죄인들을 의인으로, 사탄의 무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둘째,
어린양의 피로 값 주고 산 이들을 나라와 제사장이 되게 합니다.
즉 하나님에게 속한 백성이자, 세상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게 하여,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세상을 다스리고, 각 영역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존재가 되게 하는데,
그 방식은 로마나,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방식인 사랑의 방식으로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을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뒤에 나오는 용과 짐승과 음녀를 따르지 않고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따라 그분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두루마리 책의 내용이 이루어지고, 그들이 참으로 이기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봉인된 두루마리
이처럼 창조세계를 보고 찬양했다가 찬양을 멈췄던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들은
이 타락한 세상이 이대로 끝나지 않고, 죽임 당한 어린양을 통해서
두루마리 책의 내용이 펼쳐지는 것을 알고 이전보다 더 큰 감격으로 찬송을 부르며 예배합니다.
그러자 그 주위에 천천, 만만의 수많은 천사들이 모여들어 더 크게 찬송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계 5:12).
어린양이 구원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다시 그들 주위에 더 많은 무리들이 모여듭니다.
하늘 위에 있는 존재, 땅 위에 있는 존재, 땅 아래에 있는 존재,
바다 위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모여서 이렇게 찬송을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에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이것이 천상에서 일어나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가짜 평화 폭력 핍박이 지속될 때 그들도 수많은 질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정말 복잡하고 타락한 세상을 살고 있어 수많은 질문들이 생깁니다.
이런 타락된 세상이 어떻게 될까?
이런 식의 추악한 권력투쟁, 죄악, 탐욕, 충돌로 굴러가는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가을 경치를 보면 참 아름답고 멋있지만 뉴스를 보면 한숨이 나오고 탄식이 생깁니다.
아이를 보면 예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해서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이 생깁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모두가 무엇인가를 숭배하거나 의지합니다.
권력을, 물질을, 자기를 숭배하고 다양한 형태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 자기 방식의 예배를 통해서 의지하는 것을 주목해서 보면서 시야가 갇힙니다.
가짜 중심에 갇혀 버립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문을 열어 지상의 현실이 아닌 천상의 보좌와 예배의 장면을 봐야 합니다.
예배가 매주 한 번의 모임이지만 잠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지만,
이 예배는 보이는 현실의 실상을 제대로 보게 해주는 하늘의 창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집니다.
세상의 구원에 관한 두루마리 책 내용이 이루어지게 됨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서 시작되고 유지되었고,
구원주 예수님을 통해서 회복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가을 경치를 보면 감탄하다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한숨이 나오는 우리들이
진짜 실상을 보고 참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들, 우리 교회들, 이 땅에서 모든 성도들은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말씀을 통해서 열린 하늘 문으로 우주의 참 중심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기는 자가 됩니다.
또 우리는 이 세상을 통치하는 참 왕은 죽임 당한 어린양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어린양을 따라가는 길이 구원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군의 방식으로 권력과 숫자와 파워로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방식으로 섬김과 희생의 방식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 너머 실상을 봐야 합니다.
진짜 이 세상의 중심이 무엇인지, 왕의 왕이 누구시며,
그분은 어떻게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분은 사자이지만 죽임 당한 어린양이시며, 그분이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통치를 따라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이 세상의 왕의 왕이 누구이며 주의 주는 누구입니까?
로마 황제도, 이 세상 권력자도 아니고 자기를 십자가 죽인, 죽임 당한 어린양이십니다.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왕의 왕이십니다.
그분만이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모든 존귀와 영광을 영원히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노래한 것이 그 유명한 헨델의 메시아입니다.
오직 그분께 창조주에게, 구속주이신 어린양에게 영원히 영원히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2021년 11월 28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