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잃어버린 첫째 아들

왕언니 2021. 4. 21. 11:32

눅15:25~32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것이 다 네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두 잃어버림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와 한 묶음으로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는 찾는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림과 찾음이 기본 주제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잃어버린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는 첫째 아들은 어떨까요?

그는 집을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 곁에 있었으니 찾을 필요가 없는 아들일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잃어버림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남으로 잃어버린 상태가 된 경우도 있지만,

아버지의 집 안에 있는데도 잃어버린 상태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일차 대상은 세리와 죄인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주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자신은 율법을 잘 지키며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들도 역시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이지만,

윤리적이고, 종교적이고, 교회에 잘 다닌다고 하는 이들도

역시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들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는 잃어버린 자란 것은 자신도 남도 쉽게 알 수 있지만

첫째의 경우는 자신도 남도 그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둘째 아들도 될 수 있고 첫째 아들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 첫째도 잃어버린 자인지, 어떤 점에서 그가 탕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보다 깊은 문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밭에서 돌아오는 첫째 아들

 

첫째 아들을 보십시오.

둘째는 먼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첫째는 밭에서 돌아왔습니다.

둘째는 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왔는데 첫째는 일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명을 어겼다가 돌아왔는데

첫째는 아버지의 명을 지키다가 돌아왔습니다.

 

형과 동생은 참 다릅니다.

 

첫째는 착한 아들, 둘째는 나쁜 아들,

첫째는 아버지의 맘을 편하게 하는 아들,

둘째는 아버지의 속을 썩이는 아들,

첫째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아들

둘째는 아들의 자격도 없는 아들, 이렇게 다른 것 같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입니다.

 

겉으로 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켰고 유대교란 종교의 집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바리새파’라고 했는데, 바리새란 말은 “구별된, 선택된, 특별한”의 뜻이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착한 아들이고, 세리와 죄인들은 나쁜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들에 비해서 도덕적 윤리적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남다른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세상을 보는 나름의 기준이 분명한 이들은

자신은 옳은 편에 서 있고 바르게 산다고 여깁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들 중에도 자기는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을 받은 자라고 믿어

첫째 아들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노하는 첫째 아들

 

그런데 첫째 아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처럼 내면도 그럴까요?

대개 우리는 겉을 보고 판단하기에

어떤 일을 통해서 그가 보이는 반응을 보고, 말을 들을 때

비로소 아,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었구나 하는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그렇습니다.

 

첫째 아들이 평소처럼  밭에 나가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느날...

집에 가까이 왔는데 집 안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려

이게 무슨 일인가 종을 불러서 물어 봤더니 종이 이렇게 답합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눅 15:27)

 

일반적으로 볼 때, 집을 나갔던 동생이 돌아왔고

그래서 집에서 환영파티가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형은 집을 나간 동생이 돌아왔으니 얼른  동생을 만나 보려고 환영파티에 들어가는게 맞을 겁니다.

 

그런데 이 형은 얼굴을 붉히면서 분노하며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당황한 종이 집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당신의 첫째 아들이 들어오지 않으려 한다고 말하자

아버지가 나와 분노하는 아들에게 들어오라고 권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따집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는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 있었던 첫째는 집에 들어오지 않으려 하고 집 밖에 있습니다.

 

첫째와 둘째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왜 첫째가 화를 내고 집으로 들어오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요?

그의 이런 반응을 통해서 첫째는 어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일까요?

 

그는 아버지에게 자기가 화를 내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당신의)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얼마나 화가 났든지 아버지에게 ‘보소서’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이보세요!’라는  불경스런 어투입니다.

 

“내가 여러 해를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더니.”

 

이 섬겼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종처럼 당신을 섬겨”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마치 자기를 종처럼 부렸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읍니다.

그리고 또 말합니다.

자신은 명을 어기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하나도 잡아 주지 않더니

아버지 살림을 탕진한 둘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겁니다.

 

자신은 아들이지만 종처럼 아버지를 섬겼는데,

아버지가 이런 아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고,

오히려 종처럼 천대를 받아야 할 둘째를 아들처럼 여기니

이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인색하고 둘째에게는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섬기느냐?

 

그는 정말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아들일까요?

자기가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여러 해를 섬겼는데

왜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밭에 가서 열심히 일합니까? 왜 계명을 지킵니까?

 

이렇게 열심히 일하며 내가 이렇게 아들 노릇을 했고

내가 아버지 원하는 것을 해드렸으니 아버지는 제가 당연히 받을 몫을 주셔야죠.

유산은 말할 것도 없고 평소 염소새끼 몇 마리는 잡아 주심으로 아버지 노릇은 하셔야죠.

 

이렇게 자기의 공로와 선행이

자기에게 ,아들의 권리, 유산을 받을 권리, 구원 자격증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신뢰의 부족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공로를 근거로 아버지의 유산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들이 된 것, 유산을 받는 것이 아버지의 은혜가 아니라, 다 자기 공로로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자기가 자기의 구세주가 되는 것입니다.

 

또 그가 자기 공로와 선행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를 섬겼다면,

그는  아버지를 섬긴 것입니까? 아니면 아버지 섬김을 통해서 자기를 섬긴 것입니까?

아버지를 사랑한 것입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랑한 것입니까?

 

부모님을  찾아가고 돌보는 것이 부모님의 은혜에 고맙고 감사해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유산을 사랑해서이구나, 이것을 안다면, 그런 섬김이 행복할까요?

아버지의 은혜가 고마워서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바른 순서인데,

그 순서가 바뀌면 사랑의 관계가 아닌 거래의 관계처럼 바뀌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섬김이라면, 큰아들은  잃어버린 아들이고 그의 신앙생활에는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또 정말 아버지를 섬긴다면 아들은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섬기는 것인데,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둘째가 집을 나간 후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셨을까요? 평소처럼 지내셨을까요?

아버지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들이라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정말 원했던 것이 형이 밭에 나가서 종처럼 일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밭 일은 종들에게 맡기고,

“아버지, 제가 동생을 찾으러 가 보겠습니다” 라고 하고 동생을 찾으러 나가는 것이었을까요?

 

아버지가 정말 원하는 것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것인데,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다면 그는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모르는 아들답지 못한 아들이요,

또 이런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음에도 행하지 않았다면

그가 밭에 가서 일하는 것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행한다면,

그것은 자신은 스스로 아버지를 섬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아버지를 섬기는 것도 아니고,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뜻과는 무관하게 아버지를 섬김으로 아버지에게 자기 공로를 내세우려고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 도리어 하나님께 의무를 지우려고 한다면

결국 누가 주인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아버지를 조종하려는 주인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를 섬기는 것입니까?

 

팀 켈러 <탕부하나님>책에도 나오지만

죄란,

계명을 어기는 것이지만,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삶입니다.

둘째나 첫째나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인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자리를 벗어나 있는 것이 죄입니다.

 

종교는 겉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요 사랑이지만

속으로는 자기에 대한 추구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그런 종교의 길에는

은혜에 대한 감사,감격, 순수한 사랑이 없고,

그 사랑이 주는 기쁨이나 자신의 참된 변화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일하는 착한 아들인 것 같지만,

아버지의 마음도 모르고, 아버지의 뜻보다 자기 뜻을 주장하는 아들입니다.

 

 

잃어버린 형

또 그는 좋은 형일까요?

 

둘째가 집을 나가게 되었을 때 , 그는 동생을 찾으러 가지 않았고

둘째가 돌아왔을 때도 그를 반갑게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왜 반갑게 맞지 않았을까요?

 

아버지가 집 나간 둘째를 위해서는 송아지를 잡는데

집 안에 있는 자기를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마리도 잡지 않는 불공평 때문인데, 정말 그럴까요?

또 그가 동생에 돌아옴을 기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미 유산이 각각 분배가 되었고, 이제 집에서 동생 몫은 없습니다.

그러나 동생이 집에 오면 형이 받은 두 몫과 밭을 가지고 동생도 살아야 하니

형에게 주어질 유산에 손해가 날 수 있습니다.

자기 권리, 자기 특권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동생을 반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형이 동생보다 두 배의 몫을 받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형에게 두 몫을 준 것은, 아버지를 이어 가족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뜻입니다.

가족이 힘들게 되었을 때

형만 두 몫을 누리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두 몫을 가지고 동생을 살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오는 고엘제도로, 나오미와 룻을 살린 보아스처럼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자기가 입을 손해 때문에 동생이 돌아온 것조차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형이라는 특권만 주장했지 동생에 대한 책임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동생보다 나은 형이 아니라 동생보다 못한 형입니다.

 

이 첫째를 통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선택의 특권을 받은 것은

하나님을 아는 특권으로, 열방을 섬기라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택이란 은혜를 배타적 특권으로 여기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하는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얻은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는 특권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러나 그 특권이 곧 잃어버린 자를 향한 책임도 포함한다는 점을 모른다면,

세상을 더 섬기고 품고 이해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바로 이야기 속의 첫째 아들이고, 좋은 형이 아닌 나쁜 형입니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모습

 

첫째 아들은 사실은 좋은 아들이 아니고, 동생보다 나은 형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되었다면 되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방식만 다르다 뿐이지

나도 동생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 있어.

나는 우월감을 느낄 권리가 없고, 나는 동생보다 더 부족한 형이야.

아버지께는 아버지 저가 부족한 아들입니다.

동생에게는 못난 형을 이해해다오. 이렇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면 아버지는 두 아들을 잃었다가 찾았구나, 하고 기뻐했을 것이고,

가정이 정말 잔치가 되었을 것인데

이야기 속의 첫째 아들은,

자기는 여전히 아버지 명을 어김이 없는 아들, 동생보다 나은 형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자기 착각이 자기 확신이 되어 있습니다.

 

남이 보면 알 수 있는 자기를, 자기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둘째보다 더 심각한 탕자요, 더 돌아오기 어려운 탕자입니다.

 

 

의심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릇된 확신으로

신앙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그릇된 확신입니다.

아무 것도 의심하고 질문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과도한 확신을 갖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더 위험합니다.

그들이 위험한 것은 그들의 그릇된 확신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잘 안다는 생각입니다.

오래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자신은 대부분 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수십년을 다녔으니 다 알아. 그런 자만에 갇혀

자기도 보지 못하고, 신앙의 새로운 면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오래 다닌 분들이 막 믿기 시작한 분들보다 은혜 받는것도, 바뀌기도, 더 힘듭니다.

 

방황하는 것보다 때로는 더 위험한 것이 종교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잘 나가고, 교회 생활이란 습관이 익숙하고 편한 옷처럼 느껴집니다.

그저 습관을 따라 행합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알려고 하거나, 그것을 행하는가를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없는데 하나님을 안다고 여깁니다.

이런 종교적 삶이 첫째 아들의 모습입니다.

 

때로 믿음이 약하다는 생각보다 ,자기 믿음이 좋다는 생각이 더 위험합니다.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며 자기 관심을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하지만

그 열심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른 열심인가를 잘 모릅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열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게 되고, 섭섭한 마음을 가지기 쉽습니다.

또 자기가 관심을 갖는 열심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관용하고 포용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남들은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정작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은 별로 없고

개인적 기도 안에서 주님과 나누는 은혜가 없어 은혜의식이 고갈되고 공로의식만 자리잡아

이런 식으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잃어버린 첫째 아들의 길을 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아버지

 

우리는 종종 둘째 아들이기도 하고 첫째 아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둘째 아들과 같은 우리를 기다립니다.

돌아오기를 날마다 기다리시고 돌아오면 달려 나아가서 맞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첫째 아들 같은 우리가 역시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가 불평할 때마다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기를 기다리십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우리의 것임을,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이 많은지를 알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가 있는 곳에서 다시 돌아와 아버지의 은혜를 다시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가 나가서 권한대”(눅 15:28).

 

여기서 ‘권한대’는 미완료시제로서 한 두 번이 아닌 계속 권하는 것으로

부드럽게 타이르고 설득한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돌아오자, 나가서 맞이하신 아버지는 첫째가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나가서 권합니다.

권하는데 계속, 그가 깨닫기까지 권합니다.

둘째를 따뜻한 몸으로 안아주신 아버지는, 첫째를 따뜻한 말로 계속 계속 안아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계속해서 권하고 있고, 첫째 아들은 계속 버티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떠한 결론으로 끝나는지 모릅니다. 결론이 열려 있는 오픈 앤딩입니다.

 

이 말은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전개되느냐는 바로 형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첫째 아들처럼 자신을 알지 못한 채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까?

자신의 익숙한 습관에 갇혀서 아버지의 뜻과 무관하게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까?

자기의 열심으로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합니까?

 

이야기 속의 첫째 아들과 같은 우리를 향해, 아버지는 지금도 말씀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집에서 있으면서 아버지와의 교제의 기쁨이 없고

교회에 다니지만 구원의 감격이 없고, 은혜로 살지만 감사가 없다면,

신앙생활이 반복되는 메마른 종교적 의무처럼 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첫째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집 안에서 있으면서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다시 아버지 품으로, 아버지와의 교제로, 섬김이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와의 교제의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2021년 4월18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