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대로 살아나사ㅡ부활의 몸,새하늘과 새 땅
(고전 15:4,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롬 8:19-22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복음서, 맥락 속에서 예수님 이야기
신약성경에 4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각 복음서가 각각 예수님의 이야기를 소개할 때 ,그저 예수님의 이야기만 소개하지 않고
그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떤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
더 잘 알게 해주는.... ,보다 큰 맥락 속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예수님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따라 오셨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마침내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말해줌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더 분명히 드러냅니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의 맥락속에서 보게 함으로
예수님이 그들이 고대했던 바로 그 메시아임을 더 부각시켜줍니다.
누가복음은 아담에서 시작되는 인류의 족보를 말하면서
예수님을 인간의 긴 역사의 흐름 속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두며
예수님이 아담의 타락문제를 해결한 둘째 아담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 맥락에서 보게 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로 오신 하나님임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더 큰 맥락 속에서 어떤 맥락에 두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고 더 깊어집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성경의 큰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라고 말하는데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셨다는 말씀은 성경의 예언대로 되었다는 말도 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와 부활은, 성경의 이야기의 맥락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의 맥락에서 볼 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와 부활은
아브라함 다윗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이야기, 메시아와 구원을 고대한 이야기가 비로소 성취되고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우리의 죄를 씻고, 죄 없이 천국에서 지내게 한다는 속죄만 말하면,
창조에서 시작한 성경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이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십자가는 속죄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탄과 싸워 이기어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시킨 것이고, 죄인에서 의인이 되게 할뿐 아니라
죄의 종노릇에서 의의 왕노릇하며 되게 했습니다.
의의 왕노릇이 된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하나님이 형상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창조에서 시작된 성경의 이야기를 성취하고 완성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회개해야 할 것은 미워했고 시기했다는 등의 도덕적 죄만이 아니라,
창조된 목적대로 살아가지 못한 것, 돈, 성, 권력과 같은 우상의 종노릇하는 것,
의의 왕노릇을 해야 하는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이런 죄를 더 크게 회개해야 합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이야기 흐름에서 보지 않으면
그저 죽은 자가 사는 기적이 있구나, 죽은 후 부활한다더라, 이런 정도에 그칩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 흐름에서 보면
부활이 창조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큰 이야기를
어떻게 완성하는 중요한 사건인지를 알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이야기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몸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부활의 몸”이 됨을 알려줍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사후와 궁극적 운명에 대해
보통 영혼은 더 존재하지 않게 되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소멸되고 ,
게임은 끝났고 한 줌의 흙 외에는 남는 것이 없다는 답입니다.
또는 영혼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이곳 저곳 다니다가 가끔씩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는 답,
또는 물방울이 바다에 흡수되듯이 영혼이 대자연과 융합되어 나무와 바람과 들판 속에 존재한다는 답,
아니면 조상들과 같이 어느 곳에 있다거나,
또 죽으면 영혼이 위로 들어올려져서 어떤 '빛'을 향해 나아간다는 답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은 우리는
결국 예수님의 보이신 그런 부활의 몸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최종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의 몸은 지금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소생의 몸이 아닙니다.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는 환생의 몸은 더욱 아닙니다.
그 몸은 지금의 몸과 유사성이 있지만 매우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몸으로
그 몸은 영혼만의 존재도 아니고, 날개 달린 천사와 같은 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동산지기나 여행자처럼 착각할 정도로 사람의 모습을 가졌지만
보통 사람과 달랐습니다.
음식을 드셨고 손에는 못자국도 있었지만
닫힌 문으로 들고 나가는 다른 시공의 차원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몸이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몸은 감각을 통해서 세상과 접속하고,
인터넷을 통해서 가상 세계와 접속하지만 하나님의 영적 세계와의 접속은 거의 안됩니다.
그런 감각이 죽어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몸은 감각을 통한 세상과 접속만이 아니라
영적 감각을 통한 하나님과의 접속이 가능한 몸이란 것입니다.
땅과 하늘과의 접속이 살아 있는 몸입니다.
이런 몸을 바울은 신령한 몸 (spiritual body)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신령한 몸은 인간이 영혼만이 아닌 몸을 포함한 전인이 구원을 받은 모습입니다.
이런 몸의 부활이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흔히 몸은 썩어 버리고 영혼만이 남는다고 하지만,
성경은 인간을 몸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첫 계획은 버리고 영혼만 남기는 것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영혼만이 아닌 몸까지 새롭게 함으로
몸으로 창조하신 인간을 향한 처음 계획을 이루시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되게 하십니다.
또 몸의 부활은 우리의 최종 모습은 창조된 세계와의 관계성이 지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하나님의 세상을 맡아 다스리는
청지기와 같은 존재로 창조되었고,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면서 창조세계에 대한 왕노릇하게 되어 있었기에
창조세계와 관계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습니다.
죄의 핵심은 도덕적 실패보다 예배의 실패,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인데
그 결과 우상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을 구원하실 때 영혼만 구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물질이 세상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부활의 몸으로 구원하신 것은 창조된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은 부활한 후에 신비로운 방식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왕노릇하며 하나님의 세상을 다시 새롭게 다스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시록 5:10)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시록 20:6)
영혼이 되어 몸을 벗고 땅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이 되어 땅에서 왕노릇합니다.
왕처럼 스스로를 높이고 권세를 부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행하여 모든 곳이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충만한 곳이 되게 하는 청지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부활의 몸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라고 주셨던
창조시의 사명을 무효화하지 않고 다시 회복시키고 그것을 성취하고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불멸의 영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이 되는 것이고,
부활의 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이 세상을 왕노릇하며 다스리며 사는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부활의 몸이 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있는데
이 세상은 오직 물질이 전부라는 생각으로 이 세상은 물질로서만 영원하고,
모든 영혼이나 정신은 다 물질적 현상일 뿐이라고 봅니다.
또 세상은 실체가 아닌 가상이나 허상이며
이데아란 본질세계, 혹은 참 세계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언젠가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침내 어떻게 될까요?
정말 모든 것은 물질이며 물질로서 어떤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며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 물질세상은 불에 타서 없어지듯이 그렇게 결국 다 사라지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은
몸으로 살아갈 물질세상이 사라지지 않고, 대신 새롭게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물질이 가진 성질 자체가 바뀌어진다는 것일까요?
그런 부분도 전혀 없지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을 문제가 되도록 만든 원인을 제거함으로 세상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세상은 보기에 좋은 곳으로 창조되었고, 이 세상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적의 곳인데
왜 이 살기 좋은 아름다운 창조세계가 점점 살기 힘든 곳이 되고,
어떤 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 되고 있는지...
그 원인은 물질세계에 있지 않고 바로 인간에게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다스림을 대행해야 할 왕이
도리어 우상과 죄의 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세상을 고통의 세상으로 만든 핵심 원인입니다.
그래서 세상도 “썩어짐의 종노릇”(롬 8:21)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썩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이 썩어질 우상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세상도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인간도 탄식하고, 모든 피조물도 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롬 8:22).
그러면 이렇게 탄식하며 고통하는 이 세상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문제의 원인이 되는 인간은 ,자기가 원인임을 잘 모른 채 계속 문제를 만들고
문제가 되는 방식을 고치지 않고 삽니다.
그러나 고통하는 피조물은 본능적으로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답은 이렇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난다는 말이 어떤 의미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수가 아닌 아들들이란 복수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나타나거나, 인간과 다른 어떤 신의 아들이 나타난다는 말도 역시 아닙니다.
여기서 복수형 하나님의 아들들은 바로 사람입니다.
원래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행하는 왕들을 가르킬 때도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죄와 우상의 종노릇이 아닌 의의 왕노릇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받는다, 이런 쪽으로 주로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순종함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그런 부왕,
그런 청지기가 되었고 그런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시켜 의의 왕노릇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의의 왕노릇을 하면,
곳곳에서 모든 자리에서 모든 직업에서 하나님의 자비 사랑 공의의 다스림을 흘러 보내면,
그 땅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되고 탄식과 고통이 그치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충만한 에덴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 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말씀을 보십시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시록 21:1)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마지막 모습은, 물질세계만 목적이 없이 존재하는 것도,
땅이 없어지고 영혼의 세계만 남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 하늘과 땅이 없어졌다는 것은 하늘과 땅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옛것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처럼 하늘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스카이란 창공이 있습니다. 이 하늘은 창조세계의 한 부분입니다.
헤븐이란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 통치가 있습니다.
즉 헤븐이란 하늘이 스카이와 어스를 포함한 땅에 임합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됨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세상이 연결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혼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 낙원이란 곳에 잠시 거합니다. 깊은 안식의 잠을 잡니다.
그러나 마침내 부활의 몸이 되어 의의 왕노릇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그래서 하늘의 통치가 땅에 임합니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고,
헤븐인 하늘과 땅이 서로 깊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 보여준 비전입니다.
계시록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시록 21:2)
하나님의 첫 창조가 사라지고 우리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옵니다.
즉 첫 창조가 다시 회복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창조로 시작된 성경의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보여주는 구원의 비전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예배는
계속해서 이 구원의 비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부활이 보여주는 비전을 봤습니다.
부활은 사람이 부활의 몸이 되고,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비전은 현재와 무관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셋째
부활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지금 온 천지에 꽃들이 만발했는데, 그 꽃들은 봄이 오고 있음을 보여주고,
봄이 이미 들어온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앞으로 부활의 몸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그 미래가 지금 이곳에 이미 들어왔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부활이 세상이 다 끝날 때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부활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역사의 끝이 아닌 역사 중간에 부활하셨고,
모든 사람들이 아닌 한 사람으로 먼저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부활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구원이 옛 세상이 다 사라진 이후 오는 것이 아니라,
옛 세상의 한 가운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미래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주면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 줍니다.
봄이 오는 것이 확실하다면 겨울을 살면서 우리는 겨울을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봄을 위해 씨를 뿌리고 나무를 돌봅니다.
그러면 봄이 오면 그 노력이 열매를 맺습니다. 헛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란 봄이 온다면,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씨를 뿌리고 나무를 가꿉니다.
그러면 그 노력이 헛되지 않고 새 하늘과 땅이 올 때 그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석공이 돌을 다듬습니다.
아직 대성당이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 모습이 온전히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기는 그저 돌 하나는 다듬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대성당의 엄청난 모습이 드러날 때
그는 자기가 정성을 다해 조각한 그 돌이 완성된 대성당의 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일은 마침내 하나님의 위대한 미래, 그 설계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이 보여준 그 미래에 속한 일을 지금 여기서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봄을 믿는다면 봄을 위해 더 씨를 뿌리고 나무를 가꾸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 더 감사와 친절로 대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더 사랑하려고 힘쓰고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음악을 한다면 더욱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주님을 찬양하고,
가르치는 일을 한다면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고,
어려운 장애자를 돕는다면 그를 더 정성으로 돌보고,
불공평으로 고통하는 세상을 본다면 더 공정과 공의를 펼쳐 나가도록 힘쓰고,
주님의 진리를 전한다면 더 분명히 잘 전하기를 힘쓰고
주님을 위할 때 고난도 받고 힘든 일이 생긴다고 해도 낙망하지 말고
그 일을 묵묵히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결코 바뀌지 않는다면 만약 세상 자체가 사라진다면
이런 모든 노력이 헛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보여준 그 미래가 있다면, 또 오고 있다면,
지금 이곳에서 행한 모든 섬김과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하나님의 새 창조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부활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부활을 믿는다면 지금 이곳에서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이 보여준 그 미래를 여기서 수동적으로 기다리지만 말고,
그 미래를 지금 여기서 붙잡고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부활의 몸이 되고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그 소망을 분명히 가질수록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더욱 주의 일을 하십시오. 견실하여 흔들리지 말고 더욱 주님을 위하여 일하시고,
더욱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헛되지 않는 삶, 부활의 소망과 은혜가 더욱 충만하신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