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가 중요한 이유
예배, 삶의 중심 - 예배가 중요한 이유 - (시 22:27-28, 29:1-2), 9장,
서론
예배의 낯선 경험
사랑하는 성도님들,
직접 뵙지 못한 채 삼 주에 걸쳐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은 처음입니다.
북한이나 회교권과 같은 박해지역에서는 혼자 비밀리 예배하기도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이렇게 예배하다 보니,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줄 몰랐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는 분도 계시고,
이렇게라도 예배를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참 여러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터넷 예배를 드리면서,
왜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예배를 반드시 드려야 할까?
예배는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 예배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배해야 하는 본질적 이유를 잘 앎으로
이 상황이 끝난 후에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지 않고,
이전보다 더 잘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예배해야 하는가?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관계적 존재
왜 예배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배를 종교 행사라고 여깁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자신은 예배와 무관하다고 여깁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틀린 말입니다.
예배는 종교 행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입니까? 이 질문은 가장 오래된 질문입니다. 많은 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설명보다 가장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답이 있습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란 것입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인간이란 한자어가 인간과의 관계성을 말합니다.
또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창세기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빚어신 후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네페쉬 하야’란 원어로 ‘숨쉬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흙이었던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간 존재로서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삽니다.
즉 인간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자연과의, 인간과의,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갈망하는 존재
관계 안에 산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 관계 안에 그저 조용히 물체처럼 있다는 것입니까?
관계 안에서 대상을 갈망하고 관계를 형성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가만히 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체는 계속 갈망하고 욕구합니다.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공기와 물을 마시고, 여러 물체를 만지고 소유하고,
자연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상하려는 갈망이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고 또 사랑하고자 하는
꺼지지 않는 욕구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갈망을 너머
궁극적인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것을 구약성경 전도서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바울 사도는 그것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롬 1:19).
성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지어졌으므로 당신의 품 안에 안기기까지는 참 평안을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이들 중에 벌 만큼 벌고 즐길만큼 즐겼는데 허무하다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는 존재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맞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머리만의 존재가 아닙니다. 몸을 가진 욕망의 존재입니다.
세 가지 관계 안에서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 중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사모합니다.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을 보려고 비용을 지불해서 여행을 갑니다.
만날만한 가치 있는 귀한 사람이라고 여기면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그를 만나고 싶어합니다.
청소년들은 아이돌을 멀리서라도 보려고 밤새워 기다립니다.
그리고 무엇을 궁극적 사랑의 대상으로 믿고 즉 신으로 여기고 그것에 마음을 쏟고
그것을 바라보고 갈망합니다. 또 엎드리며 절합니다.
이것을 “예배한다”고 합니다.
Worship = worth+ ship. 예배란 영어단어 worship이 가치란 단어 worth와 신분의 단어 ship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무엇인가를 욕구하고 사랑하는데,
특히 어떤 것을 궁극적인 가치의 대상인 신으로 여기며 갈망하며 예배합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면 예배하는 자와 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분되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이 다 무엇인가를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존재, 사랑하는 존재,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예배의 대상
모두가 무엇인가를 예배하는데, 문제는 그 예배의 대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사랑하고, 예배해야 할 하나님께 예배해야 됩니다.
이 음악을 잘 아시죠. 매우 익숙한 음악이죠. (음악 들음).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칸타타 147번 마지막 합창부분입니다.
독일말로는 Jesu, Bleibet Meine Freude인데 영어로는 “Jesus, Joy of Man’s Desiring”입니다. 인간의 갈망을 기쁨으로 채우시는 분,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갈망의 대상이 예수님이 될 때 기쁨이 옵니다.
창세기는 인간이 하나님을 궁극적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 때 에덴의 기쁨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제임스 스미스란 기독교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Love)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당신이 예배 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그럴 때 우리는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예배의 대상이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예배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예배하게 되었다.
예배의 대상이 잘못됨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신이 되었을까요? 자유케 되었을까요?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 대상을 궁극적인 가치와 목표로 정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신이 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집착하고 신뢰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진정한 당신의 신이다”(마틴 루터).
이것이 우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자,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
세상에는 예배하는 자와 예배 않는 자로 구분되는 것 같지만,
사실 모두는 예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궁극적 대상으로 삼고 무엇을 예배하느냐 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타락한 인간은 그 마음이 어두워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그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우상에는 자기 자신도 있고 재물도 있고 권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상숭배는 교회 안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우상도 함께 예배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이라고 하셨지만, 사실은 둘을 겸하여 섬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상의 지배
그러나 아무 것이나 예배해서는 안됩니다.
예배의 대상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형성하고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잘못되면 삶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타이타닉 호 사건이 있었던 1914년, 또 다른 선박사고가 있었습니다.
안개가 짙게 낀 버지니아 연안에서 증기선 먼로 호가 상선 낸터킷호와 충돌한 것입니다. 선원 41명이 목숨을 잃고 맙니다.
원인을 조사해 보니 선장이 표준 자기 나침반과 2도나 차이가 나는 항해 나침반을 가지고 배를 조타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잘못된 방향 설정이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면 삶의 나침반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게 되어
결국 인간이 가야 할 본래 항로에서 점점 더 벗어나게 됩니다.
상대적인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면 많은 이들의 정신이 마비되고 전쟁까지도 일으키는 결과를 만듭니다.
돈과 물질을 실질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가면
사회는 높아지는 풍요의 탑보다 더 높고 더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집니다.
육체와 미모와 성적인 매력을 중요한 가치로 숭배하면
사람들의 정신 세계는 점점 무너지고 다수의 사람들이 건강한 자존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권력과 힘, 재물, 성 등의 우상이 세상을 움직이는 신으로 여기는 이야기를 써갑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무엇이 가치이며,
목적이며 인생인지를 생각하면서 서서히 그 우상들의 이야기 속에 흡수되어 갑니다.
자연스러운 흡수
주일 예배를 마치고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티브이 앞에 앉고 쇼핑을 갑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세상 이야기의 방향으로 디폴트 세팅이 됩니다.
쇼핑몰과 스포츠와 영화와 유투브란 공간에서 행동하고 욕망하고 갈망하며 바라봅니다. 그렇게 갈망하며 바라보는 것을 닮아가고, 그 생각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배의 형태를 지니지 않았지만, 사실상은 그 무엇을 예배합니다.
예배하되 교회에서의 예배보다 더 집중하고 더 갈망하고 더 열심히 참여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예배의 대상을 삼고 다양한 방식으로 사실상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삽니다.
우리는 계속 예배함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의 대상 재조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이 이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정말 중요하게 여겨야 할까요? 바로 참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예배를 통해서 예배의 대상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마음이 나침반이 창조주를 가리킬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튜닝해야 합니다.
마음의 눈금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계속 수정해야 합니다.1)
그렇게 함으로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보게 하고,
삶에 대한 그릇된 전망을 만드는 많은 우상에 대해 맞서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꾸준한 예배
우리가 예배의 대상을 바르게 세움으로 삶의 방향을 재정립해야 하는데,
이것은 한 두 번의 예배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우상에 의해서 점령당한 마음의 지배권을 단번에 빼앗아 오기가 힘듭니다.
사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되 계속 꾸준히 예배해야 합니다.
매주 꾸준하게 참된 예배를 드려야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스며들었던 우상에서 벗어납니다. 우
상을 향하던 마음의 습관을 고칠 수 있습니다.
루이스C. S. Lewis는 "나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는다.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중에 세상 우상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를 계속 듣고 무의식적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그 우상들의 빛 아래서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란 참된 빛 아래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란 것을,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란 것을 알게 하는,
성경 속의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
예수님을 보내사 구원하시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삶의 나침반이 정북이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다시 조정되는 것입니다.
예전의 순서 속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예배는 매주 평생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무의식적으로 습득된 세상의 신을 향한 숭배에서 벗어납니다.
방향을 지향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예전이란 것, 즉 예배의 순서를 따라 드립니다.
이런 예배의 순서를 매주 반복하는데,
이것이 우리 속에 참된 하나님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넣어줍니다.
먼저 예배는 예배로의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누가 부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일찍이 흙인 존재에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우리를 인간으로 부르셨던 창조주가 부르십니다. 타락한 우리를 향하여 십자가에서 사랑의 소리를 부르신 구원주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에서 쓰러진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누구’라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사랑 받는 대상으로 부르시고, 사랑을 하는 주체로서 서도록 부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우리는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둘째는 말씀의 들음입니다.
부르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소리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삶은 생존경쟁이요, 적자생존이라는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옳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이 존재케 했고, 하나님이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 구원이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임을, 우리는 죄인임을, 그러나 그런 자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매주 반복되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야기를 우리의 상상력 안에 새겨 넣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이야기의 빛 아래서 우리와 세상을 다시 바르게 보게 합니다.
셋째는 사귐입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왕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를 갖습니다.
그 식탁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만인을 위한 참 포도주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그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사귑니다.
그 사귐 속에는 불평등의 사회와 달리 높은 자도 낮은 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가족입니다.
넷째는 보냄입니다.
예배를 마치면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다시 파송합니다.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삶의 자리로 보내십니다.
보내시되 사랑의 궁극적 대상을 재조정시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서
다시 삶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배당이란 성전에서 창조세계란 또 다른 성전으로 보내십니다.
예배당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서 삶의 자리란 다른 형태의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보내십니다.
이러한 예배의 순서를 따라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분명히 알고 예배하며,
우상이 만든 이야기에서 빠져 나오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완성된 모습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는 꾸준히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어떤 존재로 살아갈까요?
요한계시록은 완성된 천국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수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매우 분명한 것은 우리는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영원한 예배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자로 창조된 우리는 그곳에서도 예배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창조주를 예배하는 인간이었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인간은 창조주 만이 아니라 구원하신 구원주를 더 경탄하면서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천국은 예배하는 이들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는 종교행사로서의 예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는 삶이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정말 가치 있다는 것을 가치있게 여기는
그런 갈망하는 것, 그런 바른 예배가 온전히 회복된 곳이 에덴이요 미래의 천국인 것입니다.
왜 예배해야 하는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배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예배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이 아닌 것을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배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라 예배를 각 처소에서 인터넷으로 드리고 있습니다만, 이것 때문에 예배 자체를 등한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편한 방식에 익숙해져서 이런 식으로 예배에 대한 태도가 굳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기에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인터넷으로 예배를 보지만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고 드려야 하고,
그에 맞게 정성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알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전보다 더욱 예배를 삶의 중심에 놓기를 바랍니다.
이렇게라도 예배를 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깨닫고
이 일이 종식되고 이후에는 이전보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이전보다 더 예배를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온 맘을 다해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바른 예배가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키고 삶을 되살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