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걸레가 되기전에
지난 주일날 남편의 64회 생일을 치뤘다.
음식만들기 좋아하는 나지만 이번 남편의 생일엔, 아들 딸 덕에 손끝에 물하나 안묻히고?
아미가 호텔옆 나리스시라는 일식집에서 호강을 했다.
크리스찬이라면 주일은 가급적 매식이나 음주가무?를 삼가해야함이 원칙이나
서로의 바쁘고 복잡한 생활에 집까지 멀리 이사한 핑계로
언제부터인지 모두 모일수 있는 날로 주일보다 더 좋은 날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나마 모든행사가 반드시 예배 마치고 이뤄진다는점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지극히 형식적이지만...]
그리 아니할지라도 마침 생일이 일거리가 많은 주일이어서 ,
제직회도 있고, 피택권사소집도 있어서 하루종일 교회에 있어야 하는 날이라 어쩔수가 없었다.
남편은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 한번쯤 안쇠면 어쩌냐고
남북으로 동떨어져 사는 아들 딸을 귀찮게 하는것을 마땅찮게 여겼지만
나는 며칠전의 라디오에서 들은 충격적인 얘기가 생각나서 그냥 넘어가면 너무 서글퍼질것 같았다.
젊어서 과부가 된 엄마가 고생하며 잘 키운 아들하나를 결혼시켜
당신의 이름으로된 집을 아들명의로 바꿔주고 한집에 살고 있었다.
아들에게 물려주기전에는 자기집이었건만 일단 명의를 바꿔주고 나니
어쩐지 남의 집에 얹혀있는것 같은 느낌이었고 아들이 주는 용돈은 늘 모자랐다.
빠듯한 용돈은 자연히 꼭쓸데만 썼지만
교통비나 병원비같은데로 다 들어가니 좀처럼 여유돈이 없어서
초등학교 친구들 모임에 가도 늘 얻어먹기만 하게 되었다.
그래도 언제 까지나 얻어먹을수만은 없어서 한번이라도 밥값을 내고 싶어 아들에게 용돈좀 달라했더니
아들은 <집사람에게 말할게요> 했고 ,한참을 기다려도 며느리는 기척이 없었다.
<얘,아범이 용돈 주라고 안하더냐?> 어렵게 말을 꺼내자 며느리가 4만원을 주었다.
그러고도 두번에 걸쳐서 용돈을 타서 모았지만
15명이나 되는 친구들에게 5천원짜리 국밥한그릇을 사주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이 어머니는더 이상 용돈 달라는 소리를 할수가 없어 아예 밥사주기를 포기하고
며느리에게 가만히 돌려줄 요량으로, 안방 화장대서랍을 열자 가계부가 보였다.
기특하게 가계부를 쓰는구나 하고 가계부속에 돈을 넣어두려고 접힌곳을 펴보았는데...
X월X일 ...웬수 3만원, X월 X일 웬수 또 2만원.....이렇게 쓰여 있더란다.
처음엔 웬수가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으나 가만히 당신이 용돈 받은 날과 금액을 따져보니...
그 웬수가 다름아닌 바로 자신을 지칭하는 말임을 깨닫고는 아연 실색하지 않을수 없었다.
손발이 떨리고 맥이 풀려 ,돈을 그냥들고 나왔지만 어째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더란다.
내칼이지만 남의 칼집에 들어가 있으면 이미 그건 내칼이 아니다..
죽을때까지 유산을 넘겨주지 마라,
현금을 꼭 쥐고 있어야지 미리 주면 안된다는 친구들의충고가 생각났지만
이미 엎질러진물이었다.
어떻게 처신해야 현명한것인가?
가계부를 보았노라하면 며느리와 다시 얼굴을 대할 자신이 없고,
그렇다고 계속 모른척하면 며느리가 더 어떤 심한 말로 보이지않는 곳에서 나를 찌를지도 모르고...
그녀는 최근에 배운 컴실력으로 떠듬떠듬 그 사연을 mbc 여성시대에 올렸고
방송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이 할머니를 동정하며, 며느리를 지탄했다.
그러나 이튿날 단 한사람은
<그래도 당신은 행복한 분입니다>하는 사연을 보내왔다.
내 아버지는 일찌기 혼자되어 두번의 재혼에도 실패하고 혼자서 다섯남매를 키워 다 출가를 시키고
지금 폐암을 앓고 계신데 갈곳이 없으십니다.
재산의 반이상을 물려받은 큰아들과 며느리는 아버지 모실 생각이 없고
딸들이 돌아가며 모시는데
다 여유있는 딸들이 아니라서 시집 눈치보며 그간병에, 음식 수발들기도 쉬운일이 아닙니다.
젊어서 아내없이 손톱이 다 빠지도록 일하며 키운 자식들이건만
이제 도움을 받아야하는 나이가 되니 ,아무도 전적으로 아버지를 모실 자식이 없는겁니다.
아들 아닌 딸들이 마지못해 돌아가며 모시고 있지만 언제 포기할지 모릅니다.
이러니 웬수야 악수야 해도 ,그래도 아들 며느리와 같이 사시는 당신은 행복한 분입니다.....
바자회준비로 이리저리 이동하며 이틀동안,
우연찮게 전과 후의 그 사연을 듣게된 나도 가슴이 먹먹했다.
우리 자식들은 절대로 그럴 아이들이 아니라고 나혼자 장담하고 있지만
둘중 누군가먼저 하늘나라 가버리고,남은 사람도 늙고 병마저 든다면
그제서야 아들곁으로 가서 지금 처럼 편히 살수가 있을가?
나는 아직은 돈때문에 아이들에게 손 벌려본적은 없지만 , 컴때문에 아들을 귀찮게 한 적은 많다.
주제넘게 이나이에 컬럼을쓰고, 디지털 사진을 찍어 ,인터넷으로 인화주문하는< 용감한 >엄마라
늙고 굳어버린 머리가 복잡하고 잘 잊어버려 번번히 SOS를 치면
아들은 힘든 시간이 아니면 대부분 참을성 있게 내 <용감한 무식>을 다받아주고
원격지원이라는 방식을 통해 내 컴에 들어와 시원하게 해결해준다.
돌아가신 시어른들의, 전자제품에 갖던 두려움과 기피증을 속으로 웃었던 내가
타고난 기계치인 주제에,시거든 떫지나 말지...
이제는 그보다 몇배나 어려운 디지털 세상에서 짧은 혀로 침은 멀리 뱉고 싶어 매번 용을 쓰고 있으니...
똑같은걸 번번히 또 묻고 또묻고, 해결해 달라는 나에게 왜 짜증이 나지 않겠는가?
지금은 흔연스럽게 잘 받아주지만 언젠가는 낡은 명품?처럼 부담스러워 질것이다.
진솔옷일때는 매번 드라이크리닝을 하고 조심스럽게 입지만
명품도 세월의 때가 묻으면 ,물빨래도 하고 허드레일에도 입게되고
더 세월이 지나면 분리수거통에 던지거나 걸레로 쓴다한들 누구를 탓하랴.
아무리 곱게 늙은 사람이라해도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라해도
늙음이 가져다주는 추함과,고집과 ,편협을 남의 일인양 매번 그냥 넘어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혼자서 외롭게 살아온 사람들일수록 남들이 견디기 힘든 습관들이 있고
그것을 못견뎌하는것을 보는, 당사자의 심정을 생각하면 더 가슴이아프다.
한때는 흰 와이셔츠 빳빳이 다려입고 회전의자에 앉아 지점장이라고 목에 힘주던 남편의 은행동기들이
주차관리원 완장을 두르고 주정차위반 차량 범칙금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가하면
아파트 경비를 서는 사람도 있으니, 수입이야 많건 적건,그나마 남 눈치 안보고 자기혼자서 일할 직장도 있고
아직 앓아누울 만큼 불건강하지도 않으니 복받은 삶이라고 자위할수도 있으려나?
남편이 퇴직하고 4년쯤 되어서 급하게 목돈을 채우는데 딱 천삼백만원이 모자란적이 있었다.
나는 한두달 정도 지나면 만기가 되는 정기예금이 있었기에
애초에 언니나 동생에게 잠깐 사채 이자를 주고 빌리자고 말했었건만,
고지식의 대명사인 우리 남편은 싼 은행이자 놔두고 형제간에 아쉬운소리 할게 무어냐고 막무가내였다.
우리는 가게를 시작할때 옥수동 집을 은행에 설정한적이 있었고
남편이 지점장으로 있었던 지점이니 별로 어렵지않게 대출이 되리라 생각하고
남편이 3년넘게 최고 책임자로 있었던 논현동의 그 지점에 가서 대출 의뢰를 했었다.
그러나 격동의 IMF를 지나면서 데리고 있던 직원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유일하게 남편을 알아보는 사람은 은행직원이 아니라 ,그건물 주차관리를 하는 경비아저씨였었다.
대부계직원은 아들 나이또래정도의 젊은 사람이었는데 ,
그때 하나은행의 부실이 극심했던때여선지 신용으로는 어렵고
이미 담보가 말소되었으니 다시 설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순서를 밟아야한다고
지극히 사무적으로말하는것이었다.
이래서 한번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뒷자리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인가?
나는 아무도 남편이 그지점의 지점장이었던것을 몰라보고
밝힌후에도 <그래서요?>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것이 얼마나 모멸감이 느껴지는지....
얼굴이 뜨거워지고 땀이 솟으며, 밖으로 뛰쳐나가고만 싶어서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남편은 그 뜨거운 숯불을 머리에 이고, 묵묵히 시키는 절차를 밟고 대출신청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남편이 너무나 불쌍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전 지점장이란 사람이 주변머리 없이 겨우 천삼백만원이 없어 대출을 일으키는가 하는 손가락질?을 받기 싫어
천오백만원을 대출받았고 마이너스통장을 만들고
그 담보로 적금을 들어야 했다 . 그리고는 대출 받던 상황이 억울하여
적금이 끝날때 까지 마이너스통장을 잘 써먹었다.
남편은 요즈음 아침엔 강남역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다시 시내버스로 가게까지 이동하여 2200원을 쓰지만
시간이 촉박하지 않은 퇴근때는 한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미금역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니 1500원밖에 들지 않아 매일 700원을 절약한다고 자랑하며 기뻐하고 있다.
남편은 나와 같이 나갈때는 자가용을 움직이지만 자기 혼자는 절대로 차를 끌고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교회일을 위해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것은 크게 야단치지 않으니
그걸 信心? 이라고 여겨야 할지,
언제나 트렁크 가득가득 건어물과 부식들을 장봐서 가득 싣고다니는 내가 고생할가봐
눈감아주는 사랑이라고 여겨야 할지...
700원을 절약하는 방법을 알았다고 기뻐하는 남편인데
나는 번번히 우리주머니에서 나가는 휘발유값 생각은 안하고 교회 돈 몇푼 더 절약했다고 기뻐했으니..
손톱밑 아픈줄은 알아도 염통 곪는줄은 모른다는 옛말이 맞는건지도 모르겠다.
바자회에서, 시중가격의 30% 가격에
파크랜드의 기증품 골프용티셔츠와 가디건과 따뜻한 바지를 사서 미리 생일선물로 주었더니
이제 골프도 안치고 ,있는옷도 다 못입고 죽을텐데 왜 자꾸 옷을 사느냐 한다.
한마디도 틀리지 않는 , 돌아가신 아버님과 어머님이 늘 하시던 말씀의 재탕이었다.
아이들이 밥값을 나눠내고 한복을 지어입으시라고 봉투를 주었다.
그때 아무리 좋고 비싼것으로 지었다해도,
결혼때 내가 해준 한복을 30년동안 설날마다 입는 남편이 안쓰러워 , 남편은 사양하려 했으나 나는 받게 했다.
딸기를 사도,포도를 사도 무른것은내가 먹고 멀쩡한것은 남편과 애들에게 주고 살았다.
무엇을 먹고싶다,무엇을 사다오 하면서 애들에게 손을 벌려본일도 기억에 별로 없다.
딸이건 아들이건 SOS를 치면 아픈몸을 용수철처럼 벌떡 일으키고 달려갔고
아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랴...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세월이 빗겨가진 않을테니,
머지않아 고운때 가신 헌옷이 되어
대롱대롱 벽에 걸렸다가는 발치에 놓이고 ,
더지나면 걸레가 되어 뒷베란다에 놓이고
더 지나면 웬수덩어리가 되어 쓰지도 버리지도 못하게 되는 그 날이 언제올지...
아아 제발 명품걸레가 되기전에 우리 부부 스톱하게 하시고
맑은 정신으로,또렷한 걸음으로 웃으면서 하나님 앞에 불려가는 복을 내려 주소서.....